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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사업은 있고 예수는 없다

[정중규 칼럼]

교회사에서 의료·복지사업은 교육사업과 더불어 선교의 핵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선포와 치유행위를 양대 축으로 삼아 공생활을 하셨기에 그 모범을 따라 교회의 사명으로 삼았던 것이다. 의료·복지사업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나타나듯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여겼기에 더욱 그러했다. 교육사업은 정통 교리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로마 제국 멸망 뒤 중세시대엔 시대정신을 지키고 담아내며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바탕이 되었다.

교회는 가는 곳마다 병원과 학교와 복지시설을 세웠다. 그러한 소명의식으로 교회는 인류의 의료·복지, 교육 분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하지만 근대 산업사회로 접어들어 의료와 교육을 국가가 국민을 효과적으로 관리 통제하는 권력 장치로 인식하면서 의료, 교육사업에서의 교회의 이제껏 주도권도 국가와 사회로 넘어가게 되었다. 또한 현대로 접어들면서 사회복지 역시 갈수록 국가책임주의로 흘러가고 있다. 새로운 변화에 교회의 사업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우리 한국교회의 사업 역시 그러하다. 교회 밖에서도 교회의 사업체들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교회 사업의 주체들 역시 복음적 가치 구현이라는 목적과 취지가 실종되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 시대와 물신주의가 팽배한 현실과 상황이 교회 사업의 정체성 확립에 어려움을 주고 있으며, 시대적 추세에 따라 복음정신을 훼손하면서까지 대형화, 영리화, 생산성을 추구해야 하는 곤란지경에 처해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행위는 우선 무상이었고 그것도 소외받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이야기에서 드러나듯이 예수운동은 소외된 이들을 이스라엘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이려는 공동체 복원 작업이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도 그대로 하라고 요구하신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열두 제자 파견사다.

 

예수는 돈을 받고 사업하는데 목을 매지 않았다

무상성은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3-14)라는 말씀에서 드러나듯 그분 삶을 관통하는 정신이었다. 예수는 이런 무상행위 때문에 종교 관련 모든 것에서 갖가지 이권을 챙겼던 종교권력의 미움을 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가난한 이들에게 무상으로 베푼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행위, 이 원칙에 지금 얼마나 충실한가를 되돌아보면서 교회의 사업을 바닥부터 점검할 시점이 되었다. 그렇고 그런 또 하나의 병원, 또 하나의 학교, 또 하나의 시설이 아닌 복음적 가치를 온전히 구현하는 사업체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교회의 사업은 선교의 수단 이전에 교회의 존재방식이다. 교회를 대조사회(contrast society)라 정의한 신학자 로핑크는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존재방식 곧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줄 때, 오히려 대사회적 복음적 영향력이 발휘된다면서 교회의 교회됨은 본질을 획득할 때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일반 사업체와 차별성을 잃어버렸다는 교회의 사업체가 새겨야 할 대목이다. 이것은 성속이원론이 아니라 본말전도에 처한 상황을 재정립하자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특히 한국교회 복지사업의 경우에 국가보조금을 받으면서 파생된 것이라고 볼 때, 영리와 성과를 추구하는 행태의 사업에서는 물러서는 큰 결단을 내리라고 권고하고 싶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현장에서 구현되도록 시장과 자본이 외면하는 이들을 찾아나서는 교회 사업의 새로운 영역 개척도 요구된다. 모든 예언적 개혁은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 이제껏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면서 첫 마음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악마의 맷돌’이라 칭한 대로 서민들의 삶을 옥죄는 비인간적이고 반공동체적인 장치들이 산재하는 신자유주의 시대 사회현실은 교회 사업에도 새로운 부르심으로 다가오고 있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교회 사업은 복음 원칙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을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할 기회를 다시 맞고 있다. 교회의 정체성과 신원을 회복할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려면 예수의 방식을 교회가 심사숙고하는 자세로 벤치마킹할 때다. 예수의 방식, 곧 예수 마음은, ‘구조 혁파를 통해 소외된 이들을 사회로 통합시켰던’ 복지 마인드다. 교회의 모든 사업에서 이 예수의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

더 나아가 교회는 사업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빈익빈부익부를 낳는 구조악과 실제로 싸워야한다. 사업이 아니라 운동을 해야 한다. 정의로운 구조가 훼손될 때 하느님 정의를 세우기 위한 투쟁과 그 예언자적 의무에서 교회가 비켜갈 여지는 없다. 그것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에서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라고 표현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교황청의 정의평화평의회, 사회복지평의회, 이주사목평의회, 보건사목평의회를 합쳐 “인간발전성”을 만든 것은 그런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충주성심맹아원 김주희양 의문사 사건 은폐축소 규탄대회(사진=충주성심맹아원김주희양의문사사건진상규명대책위원회)

스캔들로 매스컴 단골이 된 한국교회

언제부터 한국가톨릭교회가 ‘그것이 알고 싶다’ ‘추적 60분’ 등 탐사보도 프로의 단골 타깃이 되었는가? 꽃동네, 대구시립희망원, 충주성심맹아원 사건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가 세간의 관심을 끄는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매스컴에서 다루는 것에서 예언적 징표 그 메시지를 읽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건들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속으로 곪아오던 것이 교회의 집단적 문제가 밖으로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한다. 한국가톨릭교회가 근본에서부터 자신을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는 암시다.

이제껏 가톨릭의 거룩하고 좋은 이미지에 가려서 한국가톨릭교회는 불가침의 성역이었다. 가톨릭 내부에서도 자신들의 이미지가 무너지는 것이 염려되어 대구시립희망원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사건이 터지면 호교론적으로 방어하고 변명하기에 급급하며 은폐 축소하고 덮으려고만 했다. 하지만 1인 미디어의 SNS시대에 가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두려울 만큼 투명한 사회에 가톨릭도 적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직 교회의 대응은 서투르기만 하고 무엇보다 비복음적이어서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그러나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고 거짓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미 2천 년 전 예수께서 하신 경고의 말씀이다.

이 시대의 예언자 프란치스코 교종은 교회 쇄신을 위해선 엄정한 자기비판도 마다 않는 내부 고발자이기도 하다. 아니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독설을 날리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내부 고발자이셨고, 구분은 이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교회가 내부를 향한 예언적 기능을 상실할 때 안으로 곪아가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암이 무서운 이유도 속병인 까닭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 ‘추적 60분’ 등에서 한국가톨릭교회를 단골 타깃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미 그 곪은 정도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반증이다.

 

꽃동네 전경

다시 예수의 마음으로

교회 사업은 넋이 꺾이고 기 꺾인 이들을 향한 측은지심으로 그 시대의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동고동락하시다 끝내 가장 보잘것없는 그들을 당신과 동일시하며 죽음에 이르신 ‘예수 마음’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철저히 당사자주의에 입각해 그것을 실천하셨다. 교회가 원하는 대로가 아닌 모셔야할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다. 그것은 분부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착한 종(루카 17,10)의 신세다.

그러면서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마르 1,38)는 말씀이다. 선교란 개척이다. 국가와 사회가 돌보지 않는 영역으로 다가가 새로운 미션을 수행하고 도전할 때다. 새로운 땅에 가서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예수 그분 위에 내렸던 거룩한 영을 교회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교회는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나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순례여정 그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지난 9월 15일 열린 천주교개혁연대 제1차토론회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정중규 베네딕도
경북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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