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영성으로부터 해방의 실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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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영성으로부터 해방의 실천으로
  • 레오나르도 보프
  • 승인 2016.05.1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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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 활동의 관계-4

영적인 위기

근래에 와서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는 대다수의 가난한 이들을 정책결정에 참여시키고 보다 큰 정의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사회변화에 책임을 지는 신앙을 끊임없이 자각하고 강조하여 왔다. 신앙의 빛에 따라 그리고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의 복음적 연대 때문에, 수많은 교회단체들, 심지어 주교단까지도 총체적인 인간해방에 원동력이 되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살고 가르치려고 노력해왔다.

이와같이 하여,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신앙과 삶에 뿌리를 둔 해방의 과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그 체험을 성실하게 정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체험의 과정은 비판적인 신학화 작업을 거쳐 해방신학으로 발전되었다. 해방신학은 총체적인 해방, 특히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을 위해 정리된 것이다. 그러나 해방신학 (해방론)과 그 실천의 근거는 가난한 이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영적인 만남이다.

새로운 얼굴의 하느님과 만남

모든 영적인 체험이란 역사의 현실이 제기하는 거대한 도전으로부 터 나타나는 새롭고 도전적인 하느님의 얼굴과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이 당신 존재를 알리는 성사인 가난한 이들

근래에 이르러 라틴아메리카 대륙에는 폭발적인 하느님의 출현이 있어 왔다. 그것은 하느님이 당신존재를 가난한 이들을 통해서 알리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하느님이 연대와 일치, 정의와 존엄성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진다. 가난이라는 스캔들 앞에서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대신하여 가난과 불의에 대항하라는 요구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활동은 가난한 이들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과 일치되기를 바라는 신앙에 의해 역사적 실재를 살아가는 과정으로, 분명한 해방차원을 지니고 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투쟁하고 그들의 갈망을 구체화하는 것은 가난한 그리스도와 통교하는 것이며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해방을 향해 일하면서 관상적이 되는 것이며, 하느님과의 신비로운 일치와 거룩함을 추구하는 새로운 길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하느님과 영적으로 만나는 것이 형제자매의 전적인 해방에 투신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실천하는 영성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만남의 충격은 해방신학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영적 성숙

기도와 활동의 생동적이며 구체적인 통합

라틴아메리카에서 태동되고 있으며 통합될 필요가 있는 것은 행동 속에서 행동과 함께 실행되는, 행동과 기도의 통합이다. 그렇다고 기도와 행동을 각각 별도의 영역에 보존하는 것이 통합은 아니며, 억압 받는 이들의 해방에 대한 구체적인 투신 바깥에 기도를 놓아두는 것도 통합은 아니다. 오히려 해방의 과정 속에서 기도가 투입되어야 하며, 형제자매들과의 만남 속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살아내는 것이 올바른 통합인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기도와 활동 간의 문제는 단순히 기도와 활동의 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도와 정치, 사회, 역사적인 변혁 활동 자체의 문제인 것이다. 더 올바르게 표현하자면, 기도와 활동의 문제는 신앙의 신비와 정치라는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에 철저히 투신하면서 동시에 모든 해방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어떻게 투신할 수 있는가? 종교적인 사람들이 지니는 특징인 하느님께 대한 열정과 사람들에 대한 열정, 모든 정치적 투쟁가들의 특징인 정의에 대한 열정을 어떻게 통합할 수 있는가? 말로만 통합을 하는 것, 혹은 개념상의 올바른 상호관계수립은 별 반 의미가 없다. 문제는 기도와 투신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교적 삶을 살아내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투신이 기도로부터 파생 되고, 기도는 그러한 투신의 한가운데로부터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 다. 어떻게 이러한 의미의 통합이 가능할 것인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열정 속에서 
하느님께 대한 열정을

진정으로 신앙을 살아내는 체험은 기도와 해방의 일치를 가져온다. 그렇지만, 신앙의 체험은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먼저 신앙이 란 하느님의 빛 안에서 모든 것을 체험하는 방법이다. 신앙은 우리존재가 어디로부터 오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정의하고 있다. 우리 존재의 목표는 하느님이며, 그분의 사랑의 계획은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안에서 육화되어 통교되는 것이다.

신앙의 사람에게, 모든 실재는 원래 불경스럽거나 거룩한 것이 아니라 거룩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실재는 하느님을 드러내며 또한 거룩한 실재에 감염되어 있다. 이러한 까닭에 신앙의 체험은 삶에 일치를 가져온다. 모든 물체의 원천이며 운명이신 하느님의 돌봄을 받는 실재를 관상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신앙은 삶의 한 방법으로서 세상에 대하여 관상적인 관점을 지니게 되며 세상 모든 곳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한다.

그러나 살아있는 신앙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앙이 현실화 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사랑, 정의, 진리로 변형될 때에만 신앙은 현실화 된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그분을 “받아들이는”것이 아니라, 진리와 사랑, 정의의 하느님나라를 세우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투신하는 신앙만이 구원하는 신앙이며 따라서 참 신앙이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야고 2,20). “마귀들도 순수한 믿음이 있으나 행동이 없다”(야고 2,19).

가난한 이들의 고통과 일치하기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가난한 이들 속에 그리스도께서 성사적으로 더 짙게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도움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고유하고도 내재적인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다. 주님을 특별히 담고 있는 이들이며 하느님나라의 우선적인 상속자들이다. 또한 모든 국가와 모든 교회를 복음화하고 하나로 일치시키는 가능성을 지닌 이들이다”(푸에블라 문헌 1147).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에 대하여 사회분석적인 개념만 지녀서는 안된다. 그들의 고통과 그 고통의 원인들을 알고 일치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눈으로 고통받는 계층을 바라보고 그들 안에서 야훼의 고통받는 종의 얼굴을 발견한다. 주님과 일치하기 위하여 가난한 이들을 쓰고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당신자신을 일치하셨고 그곳에서 섬김을 받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비참한 상황은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내가 굶주렸을 때에 …”(마태 25,35).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을 때에, 사람들을 멸시하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며 착취와 억압, 죄악의 관계 속에서 태어난 가난에 대항하여 싸울 때에, 우리는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있는 것이다. 신앙은 그 자체로 해방에의 투신을 내포하고 그것을 요구한다. “너희는 먹을 것을 주었다”(마태 25,36). 우리가 해방의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1요한 3,17). 사랑은 말로나 혀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하는 것이다(1요한 3,18).

관상적이며 해방적인 관점?

이러한 영적체험은 신앙과 삶(혹은 신비주의와 정치)의 관계에 있어 일치를 가져온다. 그러나 어떻게 그 일치를 유지할 것인가? 분리를 조장하는 요소가 산재해 있는 현실 앞에서 어떻게 그 일치를 키워 나갈 것인가? 관상적이며 해방적인 관점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이 살아있는 신앙의 가장 의미있는 표현인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신앙과 삶, 양극의 관계에 있어 더욱 중점을 두 어야 할 것은 기도이다.

하느님은 기도 속에서 거룩한 분으로 드러난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존재의 가장 고귀하고 심오한 측면을 표현한다. 우리자신과 모든 창조, 역사의 위대함을 초월적으로 알아듣는다. 우리는 초월적인(영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고 최상의 신비와 대화를 나누고 외치게 된다. “아버지시여!.” 이렇게 하여 우리는 우주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그것을 바치며 변형시키는 것이다. 모든 사슬로부터 우리자신을 해방시키며 모든 역사적 절대화를 거부하고 절대존재 앞에 홀로 벌거벗고 서서 그분과 함께 역사를 만들어간다. 그곳에서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가장 높고 가장 고귀한 존재와 얼굴을 맞대면하는 것이다. 

거룩하시고 투신하시는 분

거룩하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투신하는 분이시다. 그분은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에 민감한 분이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 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 3,7-8). 그러므로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하느님은 “오너라” 하시고, 그 똑같은 기도에서 “가거라” 하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이 바로 해방에의 투신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이다. 당신께 대한 열정으로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기를 원하신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가 고통받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을 더욱 더 표현하기를 바라시고 있다.

형제자매들을 섬기고 해방을 위한 그들 투쟁에 연대하는 행동은 하느님의 마음에 가 닿는 기도 한 가운데에서 샘솟는 것이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가난한 이들 속에서, 그리고 모든 억압에 시달리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주님의 성사적 현존을 알아보도록 도와준다. 신앙에 뿌리박은 기도가 없다면, 우리의 시야는 흐려지고 피상적 이 된다. 또한 가난하고 멸시받는 이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과의 통교가 이루어지는 신학적 신비의 심층으로 꿰뚫고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원천의 기도

다른 한편으로, 해방활동의 실천은 다른 극인 기도에로 우리를 몰아간다. 기도는 투쟁에 있어 우리에게 힘을 주는 원천이며 해방의 과정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신원을 지탱시켜 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참 해방, 하느님나라에의 예측, 그리고 역사 속에서 예수의 구원사업의 구체화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신앙과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해방노력이 하느님나라를 이 지상에서 역사적으로 건설하는 노력이 되도록 해 준다. 사회활동은 구체적이며 역사에 미치는 영향의 강도가 크다.

그러나 사회활동의 의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신앙은 사회활동의 초월적 의미와 구속적인 중요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형제자매에 관한 해방활동은 주님께 대한 진정한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이며, 그분의 구속해방 사업에 참여하고 성령께 대한 참전례를 거행하는 것이다.

관상이란 기도하는 거룩한 방이나 교회의 지성소에서만 할 수 있거나 정화되고 발전되어가는 것이 아니다. 관상은 살아있는 신앙에 의하여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행동 한가운데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문제, 그들의 정의, 인권, 존엄성문제에 가장 투신하고 있는 주교, 신부, 수도자, 평신도들은 또한 기도에도 가장 깊이 몰두하여 있는데, 이것이 남아메리카교회의 귀중한 특징이다. 교회는 하느님과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사랑과 희생의 운동안에 함께 일치시키는 것이다.

주요 특징과 도전들

해방활동의 맥락 속에서 드러나는 관상의 가장 의미 깊은 몇가지 흔적을 알아보기로 하자.

1) 행동으로 구체화되는 기도

해방하는 기도는 투신의 삶이 가져오는 모든 결실 즉, 투쟁, 공동행동, 실수, 성공 등을 한데 모은다. 이미 행해진 모든 과정에 대하여 감사하고, 개인적이 아닌 장기적이고 공동체적인 노력의 측면에서 고통받는 이들, 고통을 주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묻는다. 기도 속에서 해방과정의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난다. 부족함과 죄의 고백이 공동체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아무도 관념적인 말 뒤에 숨지 않으며 오히려 가장 내밀한 문제까지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드러낸다. 마음의 해방을 반영하는 기도가 된다. 공언한 것과 실천된 것 사이의 불일치 앞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연대와 투신의 부족함을 절감한다.

2) 기도, 해방하는 공동체의 표현

투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기도가 비록 영속적이며 확고한 가치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기도는 본질적으로 신앙과 복음의 빛에 따라 조명되고 비판되는 체험과 실천의 나눔이다. 그리고 체험이 란 영혼과 하느님의 빛나는 사적인 관계에 한정되지 않으며, 경청과 통교를 통하여 자신을 열어놓는 것이다.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의 문제에 대하여 조언하기도 한다. 당면한 문제들을 함께 다루기도 한다. 하느님과 영혼과의 사적인 만남, 환상 뒤에 숨어버리는 거룩한 “수줍음” 이란 있을 수 없다. 누구나 자신의 영혼을 책처럼 열어 놓는다. 공동체 가운데에서 이미 해방의 과정이란 다 드러난 사실이기 때문이다.

3) 삶의 기념으로서의 전례

교회의 공식전례는 우리 신앙의 보편성을 표현하며 주축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러나 공동체들이 삶과 신앙, 신비와 정치를 일치시키는 만큼, 정해진 전례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삶의 기념이 끊임없이 통합될 수 있다. 거룩하고도 고귀한 것을 이미 자신들 안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창조성을 발휘하여 인간적 존엄성과 거룩함이 표현되는 전례를 만들어 간다. 의미 있는 공동체적 상징이 사용되고 가난한 사람들 자신을 표현하는 참으로 종교적인 음악과 춤이 창작되기도 한다.

4) 비판적 기도

해방하는 기도는 공동체의 실천과 자세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공동체는 서로 당황하거나 상처를 입히지 않으며 냉철하게 비판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객관적인 판단 기준일 뿐 이다. 즉 하느님의 나라, 해방, 사람들의 발전에 대한 관심이다. 이러한 실제를 근거로 사회사목 종사자들의 실천은 비판과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성실함과 충실함 때문에 참 도움이 주어지고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진다.

5) 정치적 성화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열심한 성인들을 이렇게 정의한다. 즉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수 있으며 하느님과 교회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그러나 교회에는 정치적이고 투사다운 성인들이 거의 없다. 해방의 과정을 볼 때에 새로운 유형의 성화가 형성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개인의 욕망과의 싸움은 인간의 영원한 과제이므로, 이 과제에 덧붙여 공동체를 파괴시키려는 온갖 파괴와 악의 힘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도 중요하다.

이 시점에서 보다 현실적이며 어려운 덕목들이 드러나고 있다. 즉 가난한 계층에 대한 연대, 공동체결정에의 참여, 공동결정된 해결방안에 대한 충실성, 파괴의 주역들에 대한 증오의 극복, 찰나적인 현실을 넘어서서 아직 볼 수 없고 또 결코 즐길 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회를 위해서 일하는 힘 등이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그리스도인 생활이 복음적 청빈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중시한다면, 자기 것을 끊임없이 포기할 때에만 실천가능 할 것이다.

6) 예언적 용기와 역사적 인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과 기도에 힘입어 세상의 악과 대면할 용기를 갖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용기로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과 그들의 유린된 인간존엄성 회복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 그들은 박해와 감옥, 해고, 고문 심지어 신체적 죽음까지도 무릅쓰며 자신들을 내어 놓고 있다. 이러한 복음적용기와 더불어 그들은 사람들의 더딘 인간화 과정에 대하여도 역사적인 인내를 지니고 있다.

억압과 착취는 여전하며 진보는커녕 후퇴하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민중을 신뢰하고 그들의 용기와 투쟁에의 참여에서 희망을 갖는다. 열정으로 투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성령과 싸움의 종말론적인 승리,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싸울 권리를 믿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오직 하느님만이 주님이신, 역사에 대한 관상적인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7) 먹힘의 자세

모든 해방은 대가를 지불한다. 죽음과 부활은 복음적인 차원의 즐거움과 평온함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희생, 위협 심지어 순교조차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삶의 일부일 뿐이다. 십자가는 승리에 다가가기 위한 필연적 발걸음이다. 부활은 정의가 승리하는 순간으로, 사람들이 투쟁하여 삶을 살만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순간으로서 이해되고 살아져야만 한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를 통하여 움직이고 있는 영원한 해방의 과정을 밀고 있는 힘이다. 역사 속에서 현존하시는 성령의 힘은 기념되고 살아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해방의 맥락 속에서 드러나는 관상의 특징을 더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근래에 와서 가장 고통받는 이들의 해방에 투신하고 있는 공동체들에게 기도는 점점 실재화 되어가고 있다. 기도와 행동, 신앙과 해방, 하느님께 대한 열정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열정의 일치는 항상 열매를 맺는다. 지상의 도시에 깊게 투신하면서 동시에 천상의 도시에 깊게 침잠하는 것은 우리가 지상의 도시를 보다 인간답게, 복음의 가치관에 맞게 창조하는데 얼마나 참여하는 가에 따라 좌우된다.

천국은 지상의 원수가 아니다. 천국은 항상 이 지상에서부터 시작된다. 천국과 지상은 모두 하느님의 해방하시는 활동,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생명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설명은 학문적인 신학이 아니다. 이것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요 신비이다.


레오나르도 보프

(출전: <영성과 사회적 관계>, 참사람되어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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