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는 대중신심 "판단하기 전에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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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는 대중신심 "판단하기 전에 사랑하라"
  • 한상봉
  • 승인 2018.09.17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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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27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토착신앙과 얼크러진 대중신심을 통해 위로를 찾았다. 자신들의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준 것은 그런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대중신심이 항상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종교는 한편으로 숙명론적이고 혼합적이며 가부장적이었기 때문이다.

불쌍한 그리스도

이들에게 하느님은 달래고 뇌물을 바쳐야 하는 대지주 같았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라틴아메리카 어디서나 십자가에 달린 사람으로 등장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을 상징했다. 교회의 가르침과 달리, 원주민들은 예수의 부활이 담고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현실에서 읽기 어려웠다. 오히려 자기 자신과 자신들의 아버지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그리스도 역시 ‘희망 없이’ 권력자들에게 매 맞고 고문당하고 피살된 사람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가난한 원주민들이 그리스도 신앙을 만나면서 위안과 도움을 청하는 대상으로 삼은 것은 군주처럼 여겨졌던 하느님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혼백이나 성인들이었다. 이 성인과 혼백들은 일상 속에서 원주민들에게 ‘아주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친구가 되어 주었다. 유난히 라틴아메리카와 필리핀 등 제3세계 교회에서 성인숭배와 그들을 기리는 축제가 환영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중적 혼합주의 신앙에 대한 재해석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원자’ 이전에 ‘그들처럼 힘없는 불쌍한 사람’이다. 이들은 성경을 새롭게 읽게 해 준 그리스도교 기초 공동체가 출현할 때까지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지니기 어려웠다.

그러나 교회는 이들의 혼합주의적 신앙을 비난하는 대신에, 이 신앙을 복음적인 방향으로 재해석하려고 노력했다. 이를테면 아르헨티나에서는 매주 2만5천 명의 신자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노동자 거주 지역 인근에 있는 ‘산 카예타노’ 성소를 방문한다. 카예타노 성인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부모들 같은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수호성인이다.

그들은 성소에 방문하면서 달걀국수와 고기, 통조림, 가루우유, 밀가루, 수프, 그리고 옷가지 등을 챙겨 오는데, 성소에서는 이 기부금품들을 모와 그 지역의 빈민촌과 농촌에 분배해 왔다. <민중의 외침>(분도출판사, 1984)에서 페니 러녹스는 “카예타노 성인은 당신을 돕고, 당신은 다른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빵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에 촛불 대신 음식물을 가져와야 한다.”는 분위기다.

이는 월간지 <빵과 노동>을 통해 교육사업을 전개하던 앙헬 살라베렘보르데 신부가 이끄는 사제단이 성소의 관리를 맡으면서 생겨난 변화다. 실제로 라틴아메리카 신자들은 정기적으로 성당에 나가지 않지만, 자기 고장에 있는 성소를 자주 방문한다. 그래서 각성된 사제들은 이러한 대중신심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천명한 교회의 복음적 가르침에 연결시키는 데 공력을 기울인다.

 

아르헨티나 루한의 성모

실제로 1976년 3월 24일 아르헨티나에서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이사벨 페론 대통령 정부를 무너뜨리고 1981년까지 독재정치를 행하는 동안 10만 명 이상의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루한(Lujan)의 성모 성지로 향하는 행진에 참가하며 갈등으로 찢긴 아르헨티나에 평화를 오기를 기원했다.

‘루한의 성모’는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17세기에 포르투갈 정착민들이 신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마리아 성화를 아르헨티나에 들여오기 시작했는데, 이 성화를 마차로 코르도바로 운반하던 중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 루한에서 말이 멈추어 섰다. 성화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 나서야 말이 다시 움직이자, 사람들은 이곳에 성전을 짓고 성화를 안치했다.

매년 10월이면 수백만 명의 순례객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루한까지 50마일을 걷는 순례행사를 벌이는데, 베르골료 추기경도 이 순례에 참여했다. 베르골료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고 나서, 아르헨티나는 루한의 성모 이미지가 새겨진 성작을 교황에게 헌정했다.

이처럼 성소는 민중들에게 근심과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 루한의 성모 성지에서는 24시간 고해성사가 베풀어지는데, 어떤 두 살짜리 아기의 어머니는 독재정권 시절 우익 준군사조직에 의해 남편이 납치된 이후 자살하려다가 이곳에서 고해성사를 하고 사제들의 위로로 목숨을 구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중의 숙명론적인 태도를 ‘그리스도교적 희망으로’ 뒤바꾸는 일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친근한 성인, 가까운 성모

최근까지도 그들에게 하느님은 독재자들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은 손쉽게 주변에서 공경할 수 있는 혼백들과 성인이나 성모 마리아에게 의존해 왔다. 그들은 복권판매에서 빵굽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활동에서 도움을 주는 성인을 따로 두고 있다.

성 파트리시오는 뱀에 물린 상처를 치료하고, 성 안토니오는 남자친구를 유혹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믿었다. 고속도로 주변에는 죽은 자들의 혼백들에게 바치는 축소판 교회들과 십자가가 즐비하다. 이런 것들이 신통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신앙의 문제는 현실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신심 안에 담겨 있는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어야 교회는 대중과 깊은 연대감을 맺을 수 있다. 그래서 최근 라틴아메리카 교회는 원주민들의 언어와 상징을 이용해 기도문을 다시 쓰기 시작했고, 춤이나 연극을 통해 복음을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영화 ‘반도네온의 영혼’의 삽입곡이었던 아르헨티나 탱고 음악인 캄발라체(Cambalache)의 가사처럼 “우리 모두 연옥에서 같이 만날 텐데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리, 대충 살자”라는 식의 대중의식에는 주의를 당부한다.

“정의로운 자와 배신자
무식한 자와 유식한 자, 그리고 도둑놈
관대한 사람과 사기꾼
그 무엇이든 요즘은 모두 똑같아
아무것도 더 나은 게 없어
우매한 인간이나 위대한 스승도 모두 똑같아”
-프란체스카 암브로게티 등 《교황 프란치스코》에서 캄발라체 가사 재인용

물론 이 음악이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려는 내용이지만, 이중적인 도덕적 잣대를 사용하는데 교황은 반대한다. 교황은 늘 구체적인 사례를 들곤 하는데, “가톨릭신자라고 하면서 탈세를 하거나, 배우자를 속이거나,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거나, 나프탈렌을 매달아 여름철 내내 옷장 한쪽 구성에 처박아 놓은 오버코트처럼 무보님을 양로원에 보내놓고 들여다보지 않거나, 저울이나 택시미터기를 임의로 조작해 속이는 일” 등을 파렴치한 것으로 간주했다.

판단하기보다는 사랑하라 

Virgin and Child (Giovanni Salvi da Sassoferrato)

제3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는 <푸에블라 문헌>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대중신심의 긍정적인 면을 공식적으로 드러냈다. 고통 받는 자들을 위로하고 해방하시는 분으로 고백되는 마리아 신심뿐 아니라, 수호성인 공경, 죽은 이들에 대한 추모, 개인의 존엄성과 형제애, 죄와 보속에 대한 자각, 합리적 이해에 매이지 않고 신앙을 표현하는 능력, 성지에 터 잡은 신앙, 사목자에 대한 자녀다운 존경, 신앙을 공동체 안에서 경축하는 능력, 교황에 대한 따뜻한 애정, 고난을 감수하면서 신앙을 고백하는 용기, 기도에 대한 감각,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포용력 등이다.

한편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대중신심은 “판단하기보다는 사랑하고자 하는 착한 목자의 눈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당부하면서, “신경(信經, Creed) 구절은 제대로 외우지 못하더라도 묵주기도에 매달리며 병든 아이를 간호하는 어머니들의 강인한 믿음”,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간구하는 누추한 집 안에 켜진 촛불” 등에서 퍼져 나가는 큰 희망을 떠올렸다.

“또한 십자고상을 바라보는 깊은 사랑의 눈길을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거룩한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행위들을 거룩한 것에 대한 순전히 인간적인 추구의 표현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우리의 마음 안에 부어진 성령의 활동으로 힘을 얻는, 하느님을 향한 삶의 표현입니다.” -《복음의 기쁨》 125항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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