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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된 분의 뒷이야기, 거기엔 한 사람이 있다신이 된 사람, 그가 ‘그곳’에 있다-3

유월절 그날

명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예루살렘 성문으로 통하는 도로에는 성전을 향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중단 없이 이어지고 있다. 대규모의 제물과 헌납물을 가져오는 대부호의 긴 행렬, 명절 기간 동안 소비할 물품을 실어오는 대상(隊商) 일행, 낙타나 말이 끄는 수레에 고향 마을에서 모운 제물을 가득 싣고 순례길에 오른 ‘바리사이’, 그리 크지 않은 봇짐을 지고 혹은 빈손으로 상경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혹은 꽤 많은 무리를 이루며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사람들은 성안의 여관이나 민가에 여장을 풀었고, 약간의 여비밖에 없는 사람은 성밖 농가에 묵었다. 그나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은 집단으로 성밖 공터에 노숙하였다.

날이 밝자마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성전 안으로 몰려든다. 벌써 상인들은 제사용 제물과 화폐를 늘어놓고, 더 많은 사람이 당도하기 전에 제의 용품을 사두려는 순례객들과 흥정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지방에서 차출된 사제들은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니며 제사 준비에 여념이 없고, 성전 경비병들은 요소요소에 배치되거나 대열을 지어 순찰하고 있다. 명절 때는 의례 비상경계령이 내리기 때문에 전 병력이 경비업무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by Maria Laughlin

구경나온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요셉은 고향인 아리마태아에서 순례차 방문한 사촌 조카를 데리고 성전을 안내하며 거닐고 있다. 그는 평신도여서 성소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산헤드린 의회 의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경비대 사무실이나 성가대 막사, 창고 등 다른 부속 건물들을 구경시켜줄 수는 있었다. 그들은 성전 뜰로 나왔다. 많은 인파가 들끓었고,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집회가 열렸다. 이런 일은 명절 땐 흔한 일로서, 성전 들은 각처에서 온 사람들 간에 토론과 논쟁이 벌어지는 장이 된다. 대개는 하느님 나라 도래에 관한 이야기가 논쟁의 화두가 된다. 어려서 안티오키아에 유학 가서 십수 년 만에 귀향한 조카는 이런 장면을 신기하게 여기며 유심히 본다.

그런데 갑자기 상인들이 있는 곳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서 사람들이 와르르 몰려갔다. 무슨 난동이 있나 싶었다. 얼른 상황을 알아보고 온 종은 예수라는 자와 그 일행들이 상인들의 좌판을 들어 엎어 댄다고 보고한다.(「마르코복음」11,15)

“갈릴래아에서 기적을 베풀고 다닌다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인지 분신인지 하는 그 예수라는 사람 말이냐?” 종은 전에 자신이 말해준 것을 떠올리며, 상기된 표정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요셉은, 생기가 돋아나고 의기양양해 하는 심정을 애써 감추려는 종의 태도를 간파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흥미가, 아니 가슴이 슬금슬금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예수에 대한 소문

사실 그는 일생 동안 하느님 나라 도래를 열망하며 살아왔다.(「마르코복음」11,43) 그랬기에 그는 율법을 실천하는 데 누구보다 충실했으며,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아낌없이 베풀 줄 아는 ‘선하고 의로운’(「루카복음」23,50) 사람이었다. 그는 하느님 나라를 이룰 메시아가 도래할 시발지가 예루살렘이라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믿음에 따라 자신의 거주지를 아리마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만약 메시아가 나타난다면 그이를 섬기는 데 온 재산을 다 바치리라는 결심으로.

소문대로라면 예수라는 분은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경비병들이 몰려와서 집회를 해산하려 했으나, 엄두를 못 내고 그냥 집회장 주변에 도열해 있기만 했다. 이런 장면을 보고는 망설이던 많은 사람들이 시위대에 끼어든다. 자신의 익명성이 보장될 수 있었던 탓이겠다. 하지만 요셉은 이 무리의 대열에 끼는 것조차도 불가능하다. 그는 단지 멀찍이 서서 그냥 바라만 보아야 했다. 누구라도 그의 보라색 옷을 본다면 대번에 자신의 신분을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산헤드린의 동료의원인 요나단이 해준 말에 따르면, 이 인파들 가운데는 로마의 비밀경찰이나 대사제의 밀정들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포악하기로 소문난 총독 빌라도와, 교활함에 있어 둘째라면 서러워 할 대사제 가야파, 그리고 비쩍 마른 몸에 잔인한 눈썰미를 가진 그의 장인 안나스의 눈에 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고향에 있는 사돈에 팔촌까지 결단이 나 버리고 말 것이다.

 

by Maria Laughlin

궁금한 예수라는 사나이

요셉은 집에 돌아와서까지 곰곰이 그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이가 메시아임이 분명하다면 물론 당장 나서서 그를 위해 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불확실하다는 데에 있다. 그냥 믿고 행하기에는 지불해야 할 대가가 너무 막중했다. 그동안 쌓아온 부, 명성, 지위 그리고 유복한 가족들,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날아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성 밖에서 아무한테나 고개를 조아리며 구걸하는 아내, 아부하기 좋아하는 성전수비대장인 뚱뚱이 사제 같은 비열한 귀족들 집에 노예로 팔려가는 자식들 ……, 상상만 해도 몸서리치는 일이다.

그런데 그 예수란 이가, 메시아든 아니든, 분명한 것은 그가 ‘의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아까 집회 장소에서 그분이 말했다던 성전에 대한 비판은 구구절절 옳은 얘기 아닌가. 정말이지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인 성전을 장사치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지 않은가?(「마르코복음」11,17) 그분을 낳은 어머니는 어떤 이일까? 그의 아내나 자식을 있을까? 저런 말을 하고 다닐 때 그의 가족의 심정은 어떨까?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과 주위에 모여든 무명의 군중은 한데 어우러져 집회를 열고 있었지만, 평소에 모든 것을 하느님 나라를 위해 다 바치리라고 자부했던 요셉은 집회의 ‘변두리’에, 그것도 은밀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예수가 체포되었다는 숨가쁜 소식 

이튿날 오후 산헤드린 의회가 소집되었다. 예수에 대한 대책을 숙의하는 자리다. 물론 말이 좋아 의회지, 실은 안나스와 가야파의 의지를 공식적 의지로 보증해주는 ‘박수부대’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누구도 이들과는 다른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는 없었다.

회의 결론은 “명절 때에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못되니 그의 체포는 일단 유보하자”는 것.(「마르코복음」14,1-2) 요셉은 찹찹한 심정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그랬지만, 안나스와 가야파의 독선이 몹시 불쾌했다. 그리고 한마디 항거도 못한 채 앉아만 있는 의원들의 기회주의적 태도가 못마땅했다. 하지만 자신도 그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 그를 너무나 비참하게 만들었다. ‘메시아의 모임’에도 산헤드린의 모임에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이곳이든 저곳이든 단지 ‘변두리 사람’일 뿐이다.

그날 밤, 낮의 그 회의 결의의 갑작스런 번복이 있었고, 가야바의 사병들이 예수를 체포했다. 그자의 집 뜰에서 심문이 있다는 소식, 이튿날 아침 빌라도의 관저에서 재판이 있다는 소식, 그리고 그분이 사형판결을 받았다는 소식 등이 숨 가쁘게 계속 전해졌다.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요셉에게 이러한 상황 전개는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만 가지 생각이 교차했고, 잠시도 한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정원 이곳저곳을 오락가락 하면서 초조하게 움직여댔지만, 실제로 그는 어느 곳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by Maria Laughlin

요셉은 기적을 기다렸다

그분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렸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서둘러 그 ‘현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참 소란스러웠다. 십자가를 향해 퍼붓는 야유 소리가 무성했고(15,29), 무엇이 그리 통쾌한지 사람들 표정엔 잔인한 생기로 가득했다. 밀정들의 감시의 눈이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실망해서인지 어느 누구도 이자들을 반박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께 상인들의 좌판을 들러 엎을 때, 환호하던 자들은 모두 어디 있는가, 서로 자기가 예수라도 된 듯이 의기양양하게 이 일을 주도했던 그분의 제자들은 또 어디에.

요셉은 기적을 기다렸다. 당장이라도 벼락소리가 나고 하늘에서 천군천사가 내려와서 형틀에 매달린 ‘저주받은 메시아’를 구출하고(「마태복음」26,53) 로마군과 그들의 간교한 앞잡이들을 궤멸시키는 장면이 떠올려졌다. 이렇게 시작된 대심판은 마침내 하느님 나라 도래로 귀결되리라……,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간간히 신음소리를 내던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가 갑자기 절규하듯이 고함을 지른다.(「마르코복음」15,37) 요셉의 숨이 순간적으로 멈춘다. 심장도 박동을 그친 듯. ‘아, 드디어 그 일이 벌어지나 보다.’

이 정적이 얼마나 되었을까? 사람들 한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가 죽었다.”

요셉은 고개를 쳐들고 십자가를 바라봤다. 그분은 죽은 듯이 축 늘어져 있다. 심음소리도 이젠 그쳐 있었다. 집행관이 그분의 옆구리에 창을 찌르는 것(「요한복음」19,34)을 확인하는 순간, 요셉은 서둘러 빌라도의 관저로 달려갔다.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그 자신도 몰랐다. 그냥 몸이 가는 데로 갈 뿐. 길을 가는 중에 문뜩 자기 무덤용으로 준비해둔 동굴이 생각났다. “그래, 그분을 거기에 안장하게 해달라고 부탁해야지.”

빌라도에게 요셉은...

빌라도는 이 인품 좋은 호인의 갑작스런 방문에 의아해 하면서도 평소 호감을 가졌던 터라 그를 기꺼이 맞이했다. 빌라도는 재작년 마차경주에 산헤드린 의원들을 초대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별나게 말수가 적었다. 저녁 만찬 자리에서도 다른 의원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첨을 해댔지만, 그는 끝내 잠잠히 있었다. 몇 마디 물으면 짧게, 그러나 성의 있게 대답하곤 했다. 의원들을 내사했던 정보담당 부관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강직하고 말수가 적으며, 자기들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빌라도 자신은 귀족이 아니라 평민 출신 신흥자산가로, 황제에게 아첨과 뇌물을 통해 부상한 자였다. 그 주위에는 자신처럼 상승욕구를 충족하려고 별의별 짓거리를 다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요셉 같이 권력에 초연한 사람에 대해 깊은 열등감과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요셉의 부탁은 퍽 당돌했다. 감히 국사범의 시신을 달라니. 십자가에 처형되는 사람을 위해 눈물만 흘려도 즉시 그자를 십자가형에 처하는 것이 관행인데.

십자가 처형이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가장 처참한 고통을 맛보게 하는 잔혹한 처형방식이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피를 너무 흘러서 탈진 상태에서 서서히 죽어간다. 새들이 날아와 자신의 눈을 파먹고 가슴과 배의 살점을 뜯어먹고, 무더운 기온에 몸이 조금씩 썩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죽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잔혹한 처형방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은 시체까지도 들에 내던져서 개들과 새떼의 먹이가 되게 했다.

그런데 이런 처형관행과 그 방식의 이유를 모를 리 없는 산헤드린 의원이 자신을 찾아와서 그를 자기 무덤에 안장하게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요구에도 빌라도는 총독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딴청을 부린다. 그는 백부장을 불러서 예수가 벌써 죽었는지를 확인하라고 명한다.(「마르코복음」15,44) 실은 벌써 죽었다는 것 자체가 약간은 의외였다. 아무리 빨리 죽어도 하루는 끄는 것이 상례고 어떤 경우는 3일 정도 지나서야 죽는데, 처형 개시부터 불과 여섯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시각에 그가 죽었다니 말이다. 백부장이 확인하러 가는 동안 빌라도는 요셉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점점 이 사람의 진지함에 끌렸다. 백부장이 예수의 죽음 보고를 하는 때에 그는 이미 허가 결정을 내렸다.

빈 무덤

요셉은 시신을 정성껏 손질했다. 머리에 쓰인 가시관을 빼내고 그 상처들을 닦아냈다. 채찍에 긁힌 등허리의 흉터들도 닦았고, 못에 박힌 손과 발, 그리고 창에 찔린 옆구리의 흉터도 조심스럽게 다듬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무덤으로 만든 동굴에 그분을 안장하고는 종을 시켜 사오게 한 삼베로 수의 삼아 시신을 덮었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그분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이 의로운 사람을 받아 주소서.”

예수가 죽은 지 이틀이 되던 날은 안식일이었다. 삼 일째 되는 날 새벽, 예수의 제자였던 세 여자가 시신에 향료를 바르려 왔다가 시신이 없어진 것을 발견한다. 그녀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동굴 입구의 커다란 돌이 굴러서 열려져 있었고, 흰옷 입은 청년이 나타나 그분이 부활하셨으며 갈릴래아로 먼저 가 있다고 전해줬다는 것이다.(「마르코복음」16,1-8)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흰옷 입은 청년은 누구며 동굴 입구는 어떻게 열려졌다는 것일까? 죽은 자가 되살아난다는 것이 도대체 사실이라는 것인가? 만일 예수가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가사상태에 빠졌다가 되살아난 것이라 할 때, 누군가의 치료가 없었다면, 그리고 동굴 문을 열어주고 피신시켜주는 협조가 없었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예수의 부활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그분의 제자들은 다시 모였고 모종의 활동을 개시했다.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였던 민중은 되살아난 메시아 소식을 가지고 각자 자기 고향으로 되돌아갔으며, 일부는 아예 예루살렘에 남아서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운동에 가담한다. 되살아난 메시아의 이야기는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해방을 향한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예수를 체포하고 처형함으로써 당장의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던 집권층에게 그의 부활 소식과 이에 따른 일련의 분위기는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들은 이것을 시체 도난 사건으로 공식 인정했고, 필시 이 사건의 범인 색출 수사에 들어갔을 것이며 책임자 처벌을 단행하였을 것이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이 사건의 주요한 용의자였다. 당국이 그를 범인으로 실형에 처했든 아니든 간에, 적어도 그가 책임자 처벌 대상에 포함되었음은 분명하리라.

아리마태아 요셉! 우리는 이 인물에 관하여 더는 캐낼 수 없다. 다만 그에 관해 이러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가능하다. 그는 예수운동의 ‘변두리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의 마지막 고뇌에 찬 결단은 쓰러진 예수운동 재건의 기폭제가 된다. 예수의 권력비판의 목소리는 ‘또 다른 예수들’을 통해서 부활했다. 이제 그는 예수운동의 변두리 사람이 아니라 ‘중심부 사람’이 된 것이다.

그 신이 나의 ‘동굴’을 떠나 ‘그곳’으로 갔다

부활 이야기를 통해 예수는 신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부활 이야기 이면엔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우리가 주목한 이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다. 그는 자신의 동굴 속에 죽은 예수를 안치했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그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게 알려졌다. 그이는 어디에 있을까.

「마르코복음」을 쓴 사람들은 그이가 갈릴래아에 먼저 갔다고 말한다. 아리마태아 요셉의 동굴에서 갈릴래아로 갔다고.

아리마테아 사람 요셉 이야기가, 그 사람처럼 자신만의 영원한 안식처인 동굴 속으로 예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하나의 교훈이라면, 그런 교훈을 따라 예수를 나의 동굴로 맞아들인 우리에게 그분은 신이 되어 나와 함께 있다.

그 일로 아리마타아 요셉이 처형을 당했을 만큼, 그이가 내게서 신이 되었다는 건 나에게 치명적인 위험을 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위험을 감수한 나의 선택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나만의 동굴 안에 계속 있지 않는다. 아니 그이는 갈릴래아로 간다. 사람의 공간이다. 특히 고통당하는 이들의 공간이다. 아픈 이들의 공간, 정신이 엇나간 이들의 공간, 매매춘 하는 이들의 공간, 온갖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의 공간, 그런 곳으로 어느새 그이는 가버렸다. 그리고 그분은 그곳으로 오라고 우리를 부른다.

신이 된 사람의 이야기는 이렇다. 그렇게 그는 신이 되었고, 우리는 그렇게 신을 따라야 한다.

[출처] <맘울림> 2018년 6월 통권 제42호, 신앙인아카데미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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