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성(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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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성(性)
  • 윤영석 부제
  • 승인 2016.05.1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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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남성성....교회의 자리에서 여성성

“섹스”와 “젠더”, 인간의 성이 핫이슈다. 구체적인 사안은 다르지만 모두 인간의 성이 중심에 있다. 미국에서는 작년 동성결혼 합법화 이후로 화장실 논쟁이 번질 기세다. “트렌스여성의 여성용 화장실 사용을 금지하자.”부터 “남녀로 구분되는 성 정체성에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전용 화장실을 만들자.” 등등이다. 한국의 상황을 보자. 지난 총선에 어떤 당은 동성애 금지법을 정책으로 내놨다. 또 퀴어 퍼레이드가 있을 때마다 반대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드세다. 급기야 최근엔 김조광수 감독의 강연이 중단되는 일도 있었다.

인간의 성, 특히 동성애는 오늘 그리스도교의 최대 사안이다. 동성애에 대한 이해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다. 또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관심사가 역사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4세기,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관심은 그리스도론을 발달시켰다. 11세기 무렵에는 성령론(e.g. 필리오케)이 대두되었다. 중세에는 성사, 특히 성체에 대한 이해가 다양해지고 깊어지면서 20세기엔 교회론이 부각됐다. 동방정교회의 칼리스토스 웨어 주교는 21세기에 들어서 신학의 주요 관심사는 인간론으로 전환됐다고 말한다. 이런 역사적 흐름으로 볼 때 인간의 성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필연적이다. 그에 따른 수많은 논쟁과 대립 또한 피할 수 없다.

벌써 보수와 진보 진영에서 수많은 해석과 의견들이 나왔다. 인간의 성에 대한 주장이 저마다 다르나, 다음과 같이 정리해본다. 보수는 성서 구절들을 중심으로 인간의 성과 성적 지향을 정의한다. 반면, 진보는 성서보다는 심리학을 비롯해 현대과학과 인권적인 부분에 그 무게를 둔다. 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한쪽의 주장에 100% 동의하기란 힘들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성이 그만큼 복잡한 문제이며 인간이 신비스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상봉

제대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성

그렇다면 제3의 길은 뭘까? 전례를 통해 인간의 성을 바라볼 수 있을까? 매주 우리가 초대받고 참여하는 전례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이 시작되는 현실이다. 전례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신비의 시공간이다. 파스카 신비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나는 ‘제대에 선 사제가 지닌 상징성’에 집중해 인간의 성을 다시 이해하려 한다. 사라 코클리(Sarah Coakley)가 2008년에 게재한 <In Persona Christi>: Gender, Priesthood, and the Nuptial Metaphor가 나의 이런 이해를 심화시켰다.

제대에 선 사제는 그리스도와 회중 앞에 두 가지 상징을 드러낸다. 코클리는 <In Persona Christi>에서 “사제는 그리스도의 자리에서(“in persona Christi”) 회중 앞에 서 있고, 교회의 자리(“in persona Ecclasie”)에서 그리스도 앞에 서 있다.”고 상기시킨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남성성을 교회는 여성성을 상징한다.

가톨릭교회가 여성 서품을 반대하는(혹은 여성의 서품을 결정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예수의 남성성이다. 그리스도의 자리에 선 사제는 반드시 이 남성성을 지녀야 한다는 게 교회의 전통이다. 나는 여성 서품을 찬성하기 위해 예수의 남성성을 중성화 시킬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그 까닭은 예수의 남성성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자리에 선 사제의 역할은 무시한 채 그리스도의 자리에 선 사제가 지닌 상징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여성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영향을 끼친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나 베네딕트 16세, 후고 라너(Hugh Rahner, 칼 라너의 형) 모두 교회의 여성성을 중요시한다. 이들은 교회의 여성성을 성서에서 찾곤 한다. 예를 들어, 발타자르는 고린토 후서 11장 2절을 인용한다. “...내가 순결한 처녀인 여러분을 오직 한 남편 그리스도에게 바치려고 정혼을 시켰기 때문입니다.”(공동번역) 교회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 이런 해석 안에서 발타자르는 사제직을 남성에게 제한시킨다. (Hans Urs von Balthasar, Mary the Church at the Source, p. 111)

전통적으로 교회에게 부여된 여성성은 성모 마리아에서 찾는다. 후고 라너는 “교부학에서 성모 마리아는 교회의 원형(archetype)이자 모델”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이며 교회의 어머니(Mother Church)인 성모의 자궁에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라너는 “교회를 성모 안에서, 성모를 교회 안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Hugh Rahner, Our Lady and the Church, p. xviii) 발타자르 역시 “교회의 기원은 사도들의 소명에 있지 않고 성부를 향한 성자의 순명이 성육신을 향한 성모의 순명과 하나가 된 나자렛의 어느 방에 있다,”고 동의하는 주장을 펼쳤다. (Hans Urs von Balthasar, Priestly Spirituality, p. 58)

제대, 젠더 유동성(gender fluidity)이 일어나는 곳?

이렇듯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논할 때면 남성인 그리스도와 여성인 교회로 이해하는 젠더 이분법(gender binary)이 확실히 드러난다. 사라 코클리는 제대에 선 사제의 역할이 젠더 이분법을 벗어나는 점을 지적한다. 전례 가운데 성체성사를 드리는 사제는 그리스도의 자리(“in persona Christi”)에도 있지만 교회의 자리(“in persona Ecclasie”)에도 있기 때문이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남성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자리에서 여성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성찬기도를 보면 그 이해가 쉽겠다. 모든 성찬기도는 성부에게 드리는 긴 기도다. 이 기도 가운데 사제는 교회로서 성부께 기도를 드리며, 이 같은 기도 가운데 성찬 제정 부분에서(“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교회에게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를 보여준다. 제대에 선 사제는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남성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자리에서 여성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게 코클리가 말하는 “사제가 선 제대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젠더의 유동성(gender fluidity)”이다. 사제의 젠더가 이분법적 틀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제대의 자리 틀에서 물처럼 흐른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자웅동체의 이미지를 보여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본다면 성 바울로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 3,27-28) 제대에 선 사제에게 보이는 젠더의 유동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초월성(transcendence)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불순한(?) 상상

제대에서 시작한 인간의 성에 대한 이해는 젠더 이분법에 갇힌 우리에게 많은 혼란을 일으킬지 모르겠다. 대략 이런 것들이 있겠다. 사제가 남성성 뿐 아니라 여성성 또한 지녀야 한다면 굳이 여성 서품을 반대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생물학적으로 남성의 신체를 가진 사제가 여성성을 가진 교회의 자리에 설 수 있다면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신체를 가진 사제가 남성성을 가진 그리스도의 자리에 설 수 있지 않나.

성사로서의 결혼, 혼배성사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지 않을까. 발타자르 또한 혼배성사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이해한다. “교회 안의 젠더 관계는 자연적인 섹슈얼리티의 관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초자연적이고 순결한 관계에서 해석돼야 한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큰 신비이며 바로 여기서 자연적인 남녀 관계의 존엄성이 유래한다.” (Hans Urs von Balthasar, Priestly Spirituality, p. 60) 비록 발타자르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젠더 이분법 안에서 혼인 관계로 이해하지만, 제대에 선 사제에게 일어나는 신비, 젠더 유동성을 고려할 때 이야기가 달라진다.

성적 지향이 동성인 여성 사제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리스도의 자리에 선 이 “여성” 사제는 남성성을 부여 받는다. 젠더 이분법적으로 본다면, 또 혼인은 남녀만의 것으로 본다면,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이 사제와 여성성을 지닌 교회의 관계는 결코 이뤄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여성은 사제가 될 수도 없고 당연히 동성 간의 혼인 가능성 또한 없어진다. 하지만 사제가 그리스도의 자리 뿐 아니라 교회의 자리에 서 있음을 안다면, 젠더 유동성을 볼 수 있다면 동성 간의 혼인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서두에 언급한 미국에서 최근 일어나는 트렌스젠더의 화장실 사용 이슈로 불순한 상상을 마무리하려 한다. 트렌스젠더를 위한 화장실과 제대의 자리, 이 두 장소의 공통점은 둘 다 젠더 이분법을 벗어나 젠더 유동성이 일어나는 자리라는 점이다. 트렌스젠더를 위한 화장실을 만들려는 신학적 근거는 인간의 성이 초월한 제대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그리고 예수가 남성과 여성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은 이 거룩한 초월성에 있지 않을까? 


윤영석 바울로
미국성공회 뉴왁교구 성직부제 & NewYork-Presbyterian Hospital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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