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하느님으로부터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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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하느님으로부터 탄생한다
  • 미건 맥켄나
  • 승인 2018.09.04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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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용서하고 싶다, 나는 영혼을 사로잡고 싶고 모든 국가들을 사면하고 싶다. 나의 평화는 온 우주로 확장되어야 한다. … 나는 지혜이며 참된 복이다. 나는 사랑이고 자비이다! 나는 평화이다 나는 다스릴 것이다! 나의 다스림은 평화와 사랑의 다스림일 것이며 그것을 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으로 시작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끝도 그럴 것이며 이것이 내 사랑의 위대한 작업이다."

이 그리스도는 생명보다 더 큰 것 같다. 그리스도는 삶과 십자가 상의 죽음으로 우리를 용서하는 분이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콜로사이들에게 말한다:

"여러분은 한 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다만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습니다."(콜로 1,21-23)

요안 비안네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낭떠러지 끝에서 아이를 팔에 안고 있는 어머니와 같다. 어머니는 항상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애쓰지만, 아이는 그 위험 속에 들어가려고 기를 쓴다.”

 

사진출처=pixabay.com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용서는 복음 전체의 핵심이다. 우리는 용서받았다. 우리는 자유다. 우리는 사랑받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는 친구들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친밀함과 지식에 다시 돌아가도록 초대받았다. 우리는 전체 하나로 만들어졌고 다시 거룩해진다.

우리는 항상 용서받는다. 하느님은 주시는 분, 참으시는 분, 잊으시는 분, 정의까지도 관대하게 봐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것을 모든 존재를 용서한다면 말이다.

주님의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가운데에 묻힌 구절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빚진 이를 우리가 용서하는 것처럼 우리의 빚을 용서하시고 라는 구절이다. 얼핏 보면 무척 단순한 구절이다. 영어로 번역되면서 실종된 단어가 바로 두 번의 빚이라는 말이다.

처음 빚(우리의 빚을 용서하시고)은 엄청난 양이고 셀 수조차 없다. 우리는 인간답지 못한 것, 그리스도인의 표지답게 살지 못한 것,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답지 못한 것, 모든 악, 불의, 살해, 그리고 다른 인간존재와 자연의 파괴에 대하여, 하느님께 반대한 것, 하느님께 복종하고 하느님만을 경배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우리 자신이 신들처럼 되어버린 것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용서받고, 탕감 받고, 원 상태로 복구된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 “빚”–“우리에게 빚진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가 다가온다. 그리고 이 빚은 기껏 해봐야 동전 정도의 양이다. 아무리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죄, 불의, 악이라고 주장하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그리스도 거룩하신 용서 앞에 홀로 서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의 지체 안에 한 몸으로 묶여서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인간존재의 자취와 나란히 서 있다. 우리는 완전히 용서받았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 용서를 생명줄이요 자유에 승선하는 것이라고 깨닫는다면, 그 똑같은 생명줄을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감사하며 나누어야 한다. 그런 나눔은 실제로 빚이 상환되고 시정되었을 때에 일어나는 순간 혹은 순간들의 결집에 그치지 않고, 세상 속에서 거룩한 용서 하느님과 함께 존재하고 구원받는 생활방식, 태도, 존재방식으로 자리잡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용서의 모습 앞에 서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으로 있으며 겁내지 않고 혹은 돌아서거나 도망가지 않으며, 숨거나 다른 이들을 비난하지 않고, 혹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 것은 이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힘 덕분이다.

하느님의 선함 앞에서 어떻게 견딜 것인가? 아무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아무리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라 할지라도 용서가 필요 없거나,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개인적으로나 더 큰 공동체 차원에서나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가 용서하도록 그리고 그 용서를 받아들이도록 상호적으로 도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다시 환영받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언제나 우리 각자가 홀로 그리고 다른 이들과 함께 취해야 할 자세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교종 요한 23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병자성사를 받으면서 했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나의 사도직의 비밀은 여러분이 내 침상 맞은편에서 보는 십자가이다. 십자가 고상이 거기에 있어 나는 아침에 처음 일어나서 보고 잠들기 전에도 본다. 또 긴 밤 시간 동안 십자가에 말을 할 수도 있다. 십자가를 보라. 그리고 내가 십자가를 보는 것처럼 보라. 십자가 위 예수님의 열린 팔이 나의 교종직 수행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분의 팔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두를 위하여, 모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도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그분의 용서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
생각하건대, 내가 어떤 이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들에게 용서를 청한다. 그리고 만일 나의 태도나 행동 때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은 사람을 알고 있다면, 그들에게 나를 불쌍히 여겨주고 용서해 달라고 전해주기 바란다. 이 마지막 시간에 나는 편안하다. 그리고 나의 주님께서 자비롭게 나를 거부하지 않으시리라고 확신한다.
비록 자격이 없지만, 나는 그분을 섬기고자 했고, 진리, 정의, 애덕 그리고 복음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에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지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살아계시고 교회는 자기의 과제를 계속 수행하고 있다. 영혼, 영혼들이여."

이 기도는 용서를 위한 기도다. 일생동안 실천하고 매일매일 훈련하며 필요에 의식적으로 깨어 있으면서 주고받고 했던 삶의 기도이다.

이러한 용서는 다른 이들을 위한 선물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함께 그리스도 안에 묶어주고 붙잡아 주는 선물이다. 요한 23세보다 100년 전에 살았던 대 그레고리오 교종의 말을 들어보자:

"기도의 힘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는 말하자면 미끄러운 길을 걸어갈 때에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것처럼 서로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풍부한 사랑의 배치에 의하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더 무겁게 기댈수록, 우리는 더 단단하게 형제 자매애 안에 함께 연결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수는 개인차원과 공동차원의 용서가 리듬 있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청하고 받는 것, 요청을 받고 주는 것, 그리하여 요청을 받지 않고서 주며 요청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주는 것으로 성장하는 것,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알지 못할 때조차도 충실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각성하면서 그렇게 성장한다. 또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있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많은 시간은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묻는 기본적인 실천에 쓰여야 하는데, 그 결과 우리가 얼마나 정의, 사랑 혹은 자비를 수행하는 데 있어 실패하며, 얼마나 적게 실천하는 가를 깨닫게 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가 얼마나 더 큰 실재인가를, 항상 우리의 죄보다 혹은 세상의 어떤 죄악보다 더 위대한가를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아빌라의 십자가 성 요한은 우리가 두려울 때나 용서 청하기를 주저할 때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을 하고 있다: “아이의 눈물 이외에 아버지 하느님을 설득할 그 어떤 다른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슬픔과 자기 비난처럼, 하느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받아들이도록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자비이고,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 이것 역시, 용서받고 자유로워지는 과정의 한 부분이고, 그렇게 하여 우리는 우리가 손해를 끼친 세상을 회복시키고 복구하기 위하여 돌아서는 것이다.

세상에는 공포가 퍼져있다 –살인과 지구, 공기, 물, 인간존재에 대한 무시. 가난을 넘어서는 비참함이 있다–인간생명에 대한 고문과 멸시. 불의가 있다. 인종차별주의, 국가주의, 폭력, 탐욕, 호전성에 기반한 “이념들”의 유희. 다시 말하자면, 모든 인간의 마음과 삶 그리고 모든 구조, 기업, 공동체 그리고 국제기관 속의 죄, 악, 불의.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용서는 이 모든 것들을 보고 알고 직면한다. 그리고 그분의 시선 속에, 그분의 인성 안에 그것들을 빨아들이고 변화시킨다. 죄인인 우리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킨다. 이것이 하느님의 일이요, 하느님의 다스림이며 하느님의 평화이다. 바오로는 코린토 서한에서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17-20)

일어서서 용서로 화해하자. 붙잡고 받아들이자. 주고 주위에 나누자. 서로 화해하자 다시 한번 서로와 손을 잡고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자.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다. 이제 하느님은 우리를 통하여 호소하신다.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 용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용서는 하느님으로부터 탄생한다.

[출처] <자비가 넘치는 그리스도>, 미건 맥켄나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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