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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두려움, 아름다운 용기

[김경집 칼럼] 

씩씩하고 굳센 기운을 용기라 부른다. 두려움 없이 의연하고 불의에 분연히 맞서 싸울 때 우리는 용기를 본다. 플라톤의 대화편 <라케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용기에 대해 흔히 갖는 생각의 허점들을 교묘하게(?) 파고든다.

라케스와 네케아스가 젊은이들에게 창술을 가르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그 토론에 소크라테스가 끼어들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왜 창술 교육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지 묻는다. 두 사람은 용기란 전쟁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과연 그것이 참된 용기인지 되묻는다. 상황과 처지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칼을 빼들고 ‘돌격 앞으로’의 행위가 과연 용기일까? 그 판단은 자칫 상황을 악화시키고 부대를 전멸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국가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참된 용기가 아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나는 용감한가?

<프로타고라스>에서도 소크라테스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프로타고라스도 밀리지 않는다. 용기 있는 사람이 대담한 사람이라는 주장과 대담한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주장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프로타고라스는 앎이 대담함을 증진시킨다는 것으로부터 앎이 용기를 증진시킨다는 결론이 당연히 도출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말한다. “용기 있는 사람들은 두려워 할 때는 추한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추한 대담함에 대담하게 굴지 않는다.”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부끄럽고 추한 일을 꺼려 멀리 하고, 그런 일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덤벼들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아름다운 용기가 필요한 일에 대담함을 보이는 사람이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무서워해야 할 것과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하는 지혜에서 참된 용기가 비롯되는 것이다. 플라톤도 이 대화를 통해 진정한 앎이 없이 대담한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니까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 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가장 비겁한 사람은 앎과 삶이 일치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자가 된다. 법과 정의와 민주주의를 가르치면서 정작 불의와 불법의 자행을 모른 척하고 독재와 반민주적 작태를 부추기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비겁한 사람들이다. 곡학아세를 일삼거나 자신의 이해관계를 먼저 셈하여 여론을 조작하는 자들이야말로 총칼로 짓밟는 자들보다 야비하고 비겁하다.

멀리 볼 것도 없다. 4대강 사업을 해야만 이 나라가 살아날 수 있을 것처럼 떠들어대고 밀어붙이며 토건족들 주머니를 채워주면서 그 부스러기를 탐한 알량한 학자들이나 환경영향평가나 다른 기초적 절차조차 무시하면서 그것을 외려 조장한 고위관료들이 정작 정권이 끝나고 그 사업이 얼마나 한심하고 무식한 짓이었는지 드러난 뒤에도 입 꾹 다물고 나몰라라 할 뿐 아니라 여전히 그 권세 탐하는 것보다 비겁한 일이 있을까?

살아있는 정권일 때는 감사를 해도 별 일 없다고 했다가 정권이 바뀌자 원숭이들처럼 온갖 비리로 점철된 공사였다고 뒷북치는 감사원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비겁한 자들이 지식만 채우고 그것을 권력 삼아 득세하는 사회는 불의하고 비겁한 세상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비겁과 두려움을 구별해야

영국의 국립묘지에는 이른바 귀족 자제의 무덤이 가장 많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귀족 자제들이 다투어 입대하여 장교로 임관해서 전장에 나가서는 용감하게 앞장서다 적의 저격으로 제일 먼저 죽는 경우와, 후퇴할 때도 끝까지 사수하면서 마지막에 퇴각하는 모범을 보이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은 배가 침몰할 때도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가장 나중에 배를 버리는 전통과도 무관하지 않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즉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를 스스로 지키는 이러한 전통이 그들의 귀족제도를 버텨낸 바탕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권력과 부와 명예와 쾌락을 소유한 자들이 자신뿐 아니라 자녀들까지 군에 보내지 않고 가능한 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며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권리는 극대화하려는 짓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노블레스 노(N0)-오블리주’뿐이다. 그런 자들이 용기를 말할 자격이나 있을까?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70~B.C.19)는 “때로 용기는 정복자의 마음까지 움직이게 한다.”고 했고, 공자는 “의를 보고 행하지 않음은 용기가 없음이다.(見義不爲無勇也)”라고 했다. 그러나 먼저 새겨야 할 말은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의 말이다.

“용기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대한 저항이자 극복이다.”

흔히 용기의 반대말을 비겁이라 여긴다. 비열하고 겁이 많은 것을 우리는 비겁이라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B.C.322)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중용을 논했다. 중용은 모자람도 치우침도 없는 상태이다. 용기는 비겁과 만용의 중용 상태이다. 중용의 관점에서 볼 때 비겁은 용기가 부족하고 결여된 상태이다. 그런 점에서 비겁은 용기의 반대말이 아니라 만용의 반대말이다. 비겁함은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고 그 내용이 비열한 것일 때 지칭한다. 그것은 단순한 두려움과는 다르다.

두려움과 비겁은 다르다. 정조(正祖, 1752~1800)는 두려움을 알아야 크게 실수하지 않는다고 했다. ‘두려움을 아는 것’이란 스스로 정한 약속을 파기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조절하여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아마도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오랜 동안의 세손 생활을 통해 대부분 긴장하며 살았음에도 불구하고(아니 어쩌면 너무 긴장하며 살았기 때문에) 늘 긴장하며 살 수는 없어서 스스로 정한 규율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다며 두려움을 알며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눈에서 벗어나지 않는 곳에 자기관리가 될 수 있는 문구를 걸어놓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려움은 삶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만약 인간이 두려움을 모른다면 제 명을 다 누릴 수 없을 것이다. 통증이 없다면 몸을 마구 다뤄 온갖 병에 노출되어 결국 몸을 망가뜨려 죽게 되는 것처럼, 두려움이 없다면 인간은 해서는 안 될 위험조차 인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다한 두려움은 어떠한 일도 자신 있게 할 수 없게 하거나 비겁하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두려움을 통제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인간의 두려움의 원천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끝날 수 있다는 이 근원적 두려움은 때론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을 악용하면 인간을 가장 비열하게 만들 수도 있다. 나치 독일은 그것을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악용했다.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1945)가 그 대표적 경우이다. 때로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우리의 친구이며 실제보다 과장하여 적을 선전하면서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도 함께 불어넣어주면 대중은 모두들 납득한다고 주장한 그는 두려움을 교묘하게 악용했다. 괴벨스는 두려움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며 국민을 공포정치로 몰았다. 그의 선전술은 교묘했다. 국민을 단순히 공포로 몰아넣기만 하면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았다. 로베스피에르의 실패를 너무나 잘 알았다.

1793년 국민공회를 장악한 자코뱅은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국민들에게 공포감을 갖게 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창출하는 정치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 임계점을 넘어가면 공포에 떨던 국민들은 그 공포를 더 이상 이겨내지 못할 때 외려 강하게 저항한다.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은 그 결과일 뿐이었다. 괴벨스는 두려움을 분노와 증오로 분출하게 만드는 법을 알았다. 상당수의 독일인들이 유대인 학살에 동의한 것은 바로 그러한 분노와 증오를 통해 자신들의 두려움을 포장하고 싶은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올바른 두려움을 아는 것이 용기의 시작이다

앞서 정조의 두려움에 대해 말할 때 이미 언급한 것처럼 두려움이 부정적인 의미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용기가 생명을 위험한 지경으로 몰고 갈 수 있듯이 두려움이 때로는 생명을 지켜줄 때도 있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말은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그의 말이 꼭 생명의 보존에만 그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불의의 편에 서서 일하면서도 양심의 불꽃을 완전히 꺼뜨리지 않은 사람이 있다 치자. 물론 때로는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자기가 하는 일이 불의가 아니라 정의로운 일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녔다면 가책을 느끼거나 향후 역사의 심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불의의 편에 서서 정의를 압살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모습이 앞으로 어떻게 평가받을지 두려워한다면 뻔뻔하게 그 일을 계속하지는 못 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두려움은 그의 인격을 최후의 순간에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밧줄일 수 있다.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유한한 삶에 대한 두려움은 욕망의 무한성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래서 짧은 삶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과 타인의 평가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유한성의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두려움은 긍정적이기도 하다.

종교와 교회가 보수적일 수 있는 것은 최소한 그 조건을 담보해야 한다. 즉, 그것이 건강하고 사회적 정의와 인격의 보루가 될 때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오히려 사회적 비난의 대상일 때는 지켜야 할 보수의 가치가 아니라 개혁되어야 할 악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늘 경계해야 한다.

가톨릭성직자들의 성추문(과연 외국의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이나 개신교 대형교회 목사들의 세습, 그리고 주지 임명권이 문제의 핵심인 조계종 총무원장 파동 등에 대해 과연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있는가? 용기가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또한 신자들은 그런 적폐와 부조리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고 저항하는가? 내 일 아니면 굳이 나설 일 없다고 여기거나 그래도 종교인들이 대중보다는 깨끗하지 않느냐고 태연하게 되묻고 있지 않은가?

용기에는 반드시 올바른 지식의 근거와 균형 잡힌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냥 허공에 주먹질하고 머리끈 동여맨다고 되는 게 아니다. 우리 종교는 저 종교보다는 그래도 낫다고 너스레 떠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모든 신자들은 교회의 구성원으로 권리와 의무를 함께 지닌다. 과연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가? 맹목적 순종인가?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무엇이 두려운가?

고든 리빙스턴은 <바보들은 꿋꿋하게 어리석음을 추구한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국가가 정책적으로 사람들을 고문하면서까지 인간의 권리를 유보하는 것은 최근의 현상입니다. 참혹한 국가적 재앙을 겪은 후 그 두려움 때문에 생긴 현상이지요. 두려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자들은, 겁을 먹은 유권자들의 두려움을 더욱 부추깁니다.”

두려움의 경건성을 박탈하고 타락한 두려움을 악용하는 자들에게 무릎 꿇지 않기 위해서라도 두려움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거짓되고 두려움 자체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자는 두려움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다. 또한 우리 안에 그 두려움을 엉뚱하게 각색하는 본성이 숨겨 있음도 직시해야 한다.

“사람들은 흑사병을 얘기할 때는 두려움과 전율을 느끼지만 알렉산더와 나폴레옹처럼 파괴하는 자를 얘기할 때는 열광적인 흠모를 드러낸다.”는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의 지적은 바로 그런 허점을 매섭게 꼬집은 말이다. 두려움을 어떻게 인식하고 조절하느냐에 따라 겸손하고 진지하게 살지 혹은 불의에 굴복하며 비겁하게 살지가 결정된다. 용기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한다.

“겨울의 한복판에서, 나는 마침내 내 안에 굴복하지 않는 여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말이다. 두려움의 실체를 알아야 굴복하지 않는 의지가 움튼다.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생각을 걷다> 저자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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