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애와 사랑을 위한 폭력
상태바
형제애와 사랑을 위한 폭력
  • 미건 맥켄나
  • 승인 2018.08.29 12: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안에 당신 자신을 감추고 모든 것을 철저하게 그분의 뜻에 따라 복종시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희망하지 마십시오."(십자가의 바오로)

30여년 전에 살해된 엘 살바도르의 대주교 오스카 로메로는 자주 폭력에 대하여 설교했다. 그의 작은 나라가 폭력으로 벌집처럼 되었고, 폭력이 교회나 가정의 경계를 넘어서며 더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것을 매일매일 겪으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강론에서 이렇게 썼다:

"어떤 위기도 일으키지 않는 교회, 뒤흔들지 않는 복음, 어떤 사람의 마음도 사로잡지 못하는 하느님의 말씀, 그것이 선포되는 사회의 실제 죄를 건드리지 않는 아버지의 말씀 –이런 복음은 도대체 어떤 복음인가?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는 신심 깊은 배려, 매우 친절한 배려 따위는 많은 사람들이 가르치고 싶어 하는 길이다. 위협받지 않기 위하여 가시 같은 문제들을 피하는 설교자들, 갈등과 어려움을 겪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는 설교자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빛을 밝히지 못한다."

복음이 죄악스러운 상황을 성찰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단지 진리만을 말한다. 그 진리란 어떤 사람을 살해하면 그것은 하느님을 살해하는 것이고, 마태오 복음은 이 사실을 직설적으로 선포하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0. 46).

 

by Georges DESVALLIERES (1861 - 1950) LA SAINTE FAMILLE Huile sur toile

그리고 다시 한 번 오스카 로메로의 가르침을 들어보자:

"우리는 폭력에 대하여 결코 가르친 적이 없다. 우리는 사랑의 폭력에 관해서만 가르쳤을 뿐이다. 그 사랑의 폭력 때문에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우리가 자신에게 가해야 할 폭력은 우리들 가운데 있는 이기심과 잔인한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하여 애쓰는 것이다. 우리가 가르치는 폭력은 칼의 폭력, 증오의 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폭력, 형제애의 폭력, 무기를 쳐서 일을 위한 낫을 만들려는 폭력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충실함으로, 회심으로, 악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으로, 참회와 회개로 이끌며, 악을 중지시키고 모든 관계에 있어 그리스도의 빛으로 살아가는 사랑받는 제자들의 공동체로 세상 한 가운데에서 살아가도록 초대하고 있다. 그것에 의해 우리의 삶을 철저하게 살펴보는 빛의 품질이 건강한지 아닌지는, 살아가며 만들어내는 결과에 따라, 그리고 삶을 통하여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변화를 보면서 알 수 있다.

이 빛은 우리로 하여금 살고 있는 사회의 실재를 보게 한다. 빛은 우리를 판결한다. 빛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리고 지상의 모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이들 앞에 서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악, 죄, 불의에 의해 화상을 입도록 한다.

빛은 말한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바라보라. 진지하게 바라보고 고백하라. 속죄하라. 그리고 돌아서라, 너의 형제자매들에게 사랑으로 돌아서라, 용서를 청하라, 그리고 그들을 사랑받는 제자의 공동체 안에 다시 환영하라. 그런 후에 정의를 행하고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하여 연대 속에 함께 회개의 삶을 살아가라.

히포의 어거스틴 성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면서,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 얼굴 앞에 섰을 때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의 심판아래 섰을 때,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하고 마음에 새길 것에 대하여 썼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그분은 당신을 본다,
램프를 켜라, 그분은 당신을 본다.
불을 꺼라, 그분은 당신을 본다.
당신을 영원히 주시하고 있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죄를 지을 것이면,
그분이 당신을 볼 수 없는 자리를 찾고
그때 하고 싶은 것을 하라.”

그리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 수도승은 이렇게 썼다:

“당신은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모든 것을 바라보고 계시는 판관의 눈 아래에서 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기억해야 하고, 그분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서 잃어버린 모든 것들에 대해 셈을 헤아려야 한다.”

우리들의 판관, 우리들의 하느님의 몸은 바로 우리의 형제자매 각자이다.

유대–그리스도교의 영성이 시작된 이후로,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촛불로 여겨져 왔다. 잠언서의 한 구절은 이를 말하고 있다: “인간의 영은 주님의 등불, 그것은 배 속 온갖 깊은 곳까지 살핀다”(잠언 20,27).

우리는 하나다. 육체와 영혼, 그리고 몸이 경험하는 것을 영혼은 가장 깊은 곳에서 알고 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 몸의 몸이 되었고, 우리 뼈의 뼈가 되어, 소멸의 짐을 스스로 지시고 우리의 인간적 조건을, 심지어 우리와 함께 죽으면서까지, 기꺼이 끌어안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느님의 사랑은 여전히 더 깊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우리의 손에 죽으시어 몸의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정의가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예수님의 부활은 전 지구를 정의로 뒤덮고 모든 인간존재의 몸을 부활의 외투로 덮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을 하고, 살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는 말씀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진리 앞에 놀라며 서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거룩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비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육화이다. 그리고 육화, 살이 되신 말씀이 우리를 관상과 마음의 새김으로 이끈다. 우리는 모든 인간존재를 온유한 시선으로, 연민, 친절,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볼 때의 사랑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당신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의 삶을 폭력으로부터 연민으로,
미움으로부터 희망으로,
죄로부터 빛으로 바꾸어 주소서.
우리의 삶이 당신의 수난, 당신의 용서
그리고 모든 존재에 대한
당신의 자비를 반영하게 하소서. 아멘.

[출처] <자비가 넘치는 그리스도>, 미건 맥켄나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1년 9월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