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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상처로밖에 소통할 길 없었던 시간이여<변산>(2018, 이준익 감독)

[진수미 문화칼럼]

바캉스 철이다. 뚜렷한 계획이 없어도 먼지 쌓인 지도책을 한번쯤 꺼내보는 시간. 더불어 지명을 제목으로 한 영화들도 떠올려 본다. ‘비밀스런 햇빛’이라는 뜻을 가진 <밀양>(2007, 이창동), ‘집을 부순다’라는 의미로 해석 가능한 <파주>(2009, 박찬옥)가 있었다. 그리고 사라진 춘화와 카페의 고즈넉한 동거를 그렸던 <경주>(2013, 장률)와, 동음이의어로 한국 미스터리 스릴러의 새 장을 열었던 <곡성(哭聲)>(2016, 나홍진)이 있었다. 7월의 폭염 속에서 우리는 이 리스트에 이준익의 <변산>을 추가하게 되었다.

 

고향에 얽힌 기억, 꼬여가는 관계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라는 구절은 <변산>의 킬링 파트이자 서사의 발단 그 자체이다. 이 구절의 원작자 학수(박정민 분)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서 번번이 탈락해 고배를 마시는 언더그라운드와 오버그라운드 중간쯤 걸쳐 있는 래퍼로, 고시원에 기거하면서 주차와 편의점 알바를 전전하고 있다. 고향 변산에 아버지를 두고 왔지만, 그는 스웩(swag)을 생명으로 하는 래퍼들에게 서울 출신이자 고아라고 자신을 소개해 왔다.

학수의 아버지(장항선 분)는 변산이 낳은 걸출한(?) 주먹이었다. 평소 가족을 돌보지 않았고 어머니 장례식에도 수배중이라는 이유로 나타나지 않았던 그에 대한 원망과 분노는 학수가 군 제대 후 고향집으로 돌아가지 않게 한 강력한 동기였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에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고향을 찾게 되는데, 금의환향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그로서는 어정쩡한 유명세가 버겁다.

고향과 관련된 기억에는 감옥을 들락거렸던 무책임한 아버지, 자신의 랩 가사를 훔쳐서 시인으로 등단한 선배 원준(김준한 분) 등 학수가 피해자였던 사건이 앞머리에 배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억 저 밑바닥에 자리하던, 좌충우돌 짝사랑의 추억, 자기보다 몸집이 작았던 용대(고준 분)를 괴롭혔던 가해자로서의 기억까지 고향은 되살려 놓는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라는 구절이 이야기하듯 고향 친구들의 면면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용대는 키 크고 몸집이 좋은, 변산을 대표하는 양아치로 성장(?)했고, 원준은 지역 신문기자로 도의원 출마를 준비 중이다. 짝사랑의 그녀 미경(신현빈 분)은 변산에서 피아노 교습소를 운영하면서 원준과 사랑을 키워나가고 있다. 학수를 짝사랑했던 선미(김고은 분)는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되었다. 미경이 학수에게 호감을 표현하자, 안달이 난 원준은 용대를 동원해 학수를 손보려고 하지만 이 와중에 용대까지 미경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관계는 꼬여만 간다.

 

변산(邊山), 주변부 인생과 그 자리에 솟은 산

여기에서 던져봐야 하는 질문이 있다. 왜 변산인가? 수많은 지방 소도시 중 학수 고향이 변산으로 설정된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먼저, 일몰이 아름다운 서해안에 위치한 지역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학수의 가사와 ‘노을 마니아’로 설정된 선미의 서사에 기본을 제공하는 내용이다.

다음으로 변산이 가진, ‘가장자리(邊)의 산(山)’이라는 의미 때문이다. 이준익 감독은 <라디오스타>(2006), <즐거운 인생>(2007) 같은 필모그래프에서 변두리로 밀려난 인생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보내왔다. <변산> 역시 이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서울의 중심부로 입성하지 못한 학수의 어정쩡한 삶과 낙후된 지방 소도시의 일상을 통해 주변부 정서를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다. <변산>은 폭력을 연출할 때조차 뭔가 촌스럽고 엉성해서 무섭기보다 귀엽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 다음으로, 가장자리 산의 봉우리가 학수의 아버지를 표상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노환으로 쓰러졌어도 그는 여전히 ‘꼬봉’ 삼촌을 거느릴 정도로 카리스마를 갖춘 인물이며, 심리적 성장을 위해 학수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기도 하다.

아버지로 인해 힘들었던 어머니의 삶은 학수에게 커다란 트라우마였다. 그는 ‘쇼미더머니’에서 주제가 어머니로 제시되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무대를 포기했던 일까지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옮겨지는 것은 자식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의 궤적이나, 이것이 인생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학수의 변산 행은 아버지를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미움이 힘이 되는 순간도 있다

늙고 병환에 지친 아버지는 아들과 화해하고 싶지만, 학수는 사과하는 아버지가 낯설고 싫다. 그래서 “우리 그냥 캐릭터대로 합시다!”라고 외친다. 원망의 대상으로 고착된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아마 그것은 때로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에너지가 미움,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기대어 분출되는 시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해체되면 그간 유지해온 삶의 균형 또한 잃어버리기에 우리는 방어적으로 변화를 거부한다.

그러나 세상 만물이 변이 생성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은 세상을 성숙한 자세로 받아들이는 데 토대가 된다. 학수의 아버지 역시 변화할 권리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 또, 누군가의 변화를 고집스레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미성숙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방증이기도 하다. 병실에서 그의 언행을 지켜본 선미는 학수에게 그가 그의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처음에 그는 발끈하지만 혈육인 아버지에게 함부로 굴고 그 존재를 외면하려 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이 온다.

영화의 결미 부분에서 학수는 선미에게 헌정하는 듯한 랩을 선보이는데, 이때 앞에서 언급했던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의 대구(對句)를 완성한다. 고등학교 랩 가사집에 적어 넣었던 가사가 마무리되는 이 순간은 <변산>의 서사가 완성되는 동시에 그가 청소년기에 아버지에게 받았던 상처를 극복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내 마음 가난해서 보여줄 건 상처밖에 없었네”

극복은 자신의 마음 역시 가난했음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고향이 가난한 폐항인 것은 그를 둘러싼 환경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악조건 속에서도 건강하게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변산>에서는 선미가 그러한 인물이다. 그녀는 가난 속에서도 가족을 위하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며 사는 어른이 되었다. 학수 아버지와 같은 병실에서, 쓰러진 부친을 병구완하는 선미는 학수가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게 하는 거울 같은 존재다.

이들은 서로를 반사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선미는 학수의 영향으로 노을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첫사랑 학수를 추억하면서 쓴 <노을 마니아>로 ‘미래의 작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는다. 엔딩크레디트가 암시하는 이들의 미래는 학수 또한 선미의 진심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전개를 예측케 한다.

급기야 학수는 자신을 꾸짖는 아버지에게 주먹까지 휘두른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었던 상처를 똑같이 되갚고자 하는 위악적인 행동이다. 이는 상처투성이 마음을 부여잡고 사는 이들의 전형적인 행동 패턴이다. 내면이 황폐해졌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타인의 마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신이 상처 받았던 것을 그대로 되갚겠다는 것. 이것은 상처로밖에 소통할 길이 없는 자들의 대화라 할 만하다. 말하자면 학수 눈에 비친 고향이 가난한 폐항이었던 것처럼 그 역시 다른 이들의 마음의 오고 감을 자발적으로 끊어버린 폐항이었던 것이다.

16비트에 실려 전해지는 내면의 소리

이처럼 <변산>의 이야기는 한 청춘이 방황을 마무리하고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구조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성장담은 상투형에 가까울 정도로 익숙하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 <변산>이 마련한 변주 요소는 학수의 랩으로 이루어진 내레이션이다.

애미넴이 주연을 맡았던 <8마일>(커티스 핸슨, 2002)이 본격적인 힙합 음악영화라면 <변산>은 회상으로 처리되어야 할 장면들을 학수의 랩 내레이션을 통해 기능적으로 활용하는 수준이라는 점에서 음악영화로 분류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뉴욕 할렘가의 흑인과 푸에르토리코 청소년에 의해 만들어진 힙합 문화가 가진 활력과 역동성은 <변산>에 특유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가족사를 제외한, 학수의 흑역사는 회상 신으로 시각화된다는 점에서 랩 내레이션이 지닌 역할은 독특하다. 그것은 학수의 가장 내밀한 감정과 연계되어 있으며, 그의 억눌린 분노,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나아가 그의 내적 성장을 보여주는 장치라는 점에서 영화적으로는 시각을 능가하는 청각의 역량을 과시하는 대목이다.

 

사투리 코미디 3부작

다른 한편, 이것은 영화 <변산>의 취약점이기도 하다. 16비트에 실린 학수의 내면이 강렬한 만큼 나머지 인물들의 내면은 상대적으로 전달력이 약하다. 선미 역을 맡은 김고은은 능청스러운 연기로 이를 돌파해나가지만 나머지 인물은 그렇지 못하다. 평면적이거나 일관되지 못한 행보를 보여주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미경이 용대를 대하는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 원준이 극의 후반부터 사라져서 이야기의 한토막이 끊어지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었다.

하지만 이준익은 서사의 치밀함과 차가운 균질성으로 승부하는 감독이 아니었다. <사도>(2014), <동주>(2015) 같은 예외적 작품이 있었지만 그는 대개 거칠지만 사람 냄새 나는 투박한 감성으로 대중성을 견인해 왔다. 이런 점에서 <변산>은 사투리의 구수한 감성과 유머를 기반으로 한 <황산벌(2003), <평양성>(2010)과 같은 계보에 놓이는 이준익 표 코미디라 하겠다.

삶의 차원에서 본다면, 영화 <변산>은 미완의 이야기다. 상처로밖에 소통할 길이 없었던 시간과 작별을 고하는 데서 이야기가 멈추기 때문이다. 엔딩크레디트에서 뮤지컬을 방불케 하는 결혼식 피로연이 연출되지만 결혼 그 자체가 인생 서사의 완성이 될 수 없음을 우리 모두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학수의 나머지 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후에 쌓아나갈 자신만의 이야기일 것이다. 상처를 토로하는 데서 나아가 어떻게 자신을 풍요롭게 성장시킬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매개로 타인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이것은 모든 청춘들의 공통 과제이다.

* 이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18 8-9월호(통권 14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진수미 카타리나
글쟁이. 더불어 잘사는 세상 연구자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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