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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도 이제, 제발 착해지자!

[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32]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에게 도덕적 결단을 기대하기 어렵다.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종교도 다르지 않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종교에게 도덕적 결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돈과 권력이면 그만이라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에게 참된 뉘우침을 기대하기 힘들 듯 부끄러움을 모르는 종교에게 참된 뉘우침을 기대하긴 어렵다. 보이는 곳에선 미안하다 이야기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선 세상이 모두 그러한데 왜 나만 탓하는가 화를 내기도 할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도 종교도 말이다.

부끄러움이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참으로 뉘우친다는 것은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하여 아파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하여 육체가 아프지 않더라도 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아파한다는 말이다. 그 참된 뉘우침으로 인해 참된 참회가 가능하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용서해 달라”는 소리가 참된 뉘우침은 아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아파하는 양심의 울림이 있어야 한다. 그 아픔의 울림이 ‘부끄러움’이다.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하던 ‘윤동주’는 착한 아들이고 착한 친구이며 도저히 나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시 곳곳엔 부끄러움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의 고통이 가득한 공간에서 그저 조용히 공부만 하는 자신의 삶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갈 시간이 왔을 때,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길을 담담히 걸어갔다. 종교도 이와 같아야 한다. 거대한 건물을 세우고, 수많은 이들을 모이고 화려한 옷차림으로 사람들 앞에서 성스러움을 보이려 한다고 해도 우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영화 <동주> 포스터

양심이 없다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돈과 관련된 미리가 이야기되고, 노동권을 무시하여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받고, 자신들이 사회를 위해 세웠다는 대학에서 부당한 돈이 오가고, 그러면서 여전히 이러한 악독한 악행들에 대한 통렬(痛烈)한 반성, 즉 아픔어린 반성은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이다. 즉, 양심이 없다는 말이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다.”(<가톨릭교회교리서> 1795항)

<가톨릭교회교리서>가 이야기하는 양심, 그것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내 안의 신성한 공간이다. 양심이란 공간, 그 지성소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된다. 하느님은 무슨 이야기를 하실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우선 목적을 향하여 달려라. 얻을 것만 얻으면 그만이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회악을 저지른다 해도 그만이다. 말 듣지 않으면 사회적 약자라 해도 그냥 감금해 버려라. 약사라서 더 쉽다. 돈을 더 벌기 위해 임금은 적게 주고 더 많은 돈을 벌어라! 나는 돈 좋아하고 권력 좋아하는 신이다. 양심이란 지성소에서 하느님은 절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느님의 소리는 선을 행하라는 것이고 부끄러움을 알라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도덕적 양심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고 적절한 때에 명령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777항)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말. 그 상식을 하느님은 양심이란 공간에서 우리에게 매 순간 말씀하신다. 그 하느님의 말씀과 내 삶이 멀어지면 그 멀어짐 만큼이나 양심의 가책이 드는 것이 아닐까?

사제의 죄

양심이란 공간에서 하느님을 마주하자. 하느님의 소리, 그 양심의 소리에 따라서 살아보자. 제발 착하게 살아보자. 사회적 약자에게 말로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실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돈을 챙긴 사제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징역 1년을 받았지만 집행유예를 받았다.

그 사제는 법이 정한 죄인이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참된 정의를 위해 싸운 그런 죄인이 아니다. 사회적 양자를 상대로 불법 감금시설을 운영하고 그 가난한 이들 위해 마련된 식자재 대금을 부풀려 그것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다. 아주 부끄럽고 추악한 죄인이다. 양심의 가책으로 평생을 고통 받아야 할 죄인이다. 그런데 그 죄를 가톨릭교회의 ‘신부’가 지었다. 그 부끄러운 죄를 말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제법 규모 있는 성당의 주임사제로 있다. 너무나 당당히 말이다.  

기도만 하고 있을 일은 아니다

오랜 시간 우리 사회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권력자들로 인하여 너무나 많은 이들이 아파해왔다. 일제강점기의 친일파와 해방 이후 독재자들에 이르기까지 우린 너무나 오래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로 인하여 너무나 많이 아파해왔다. 그들을 향하여 어쩌면 힘없는 민중들은 계엄의 위험 속에서도 촛불을 들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세상은 아주아주 조금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여전히 부끄러움 모르는 이들은 정치인이라며 군림하려 한다. 그런데 아직 종교는 제대로 된 촛불 하나 들지 못하고 있다. 너무나 부끄러운 일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당당히 살아간다. 신부로, 목사로, 수도자로 말이다. 사회가 걱정하는 성당, 교회, 절이 되어가고 있다.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아닌 이 사회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어둠이 되고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종교인 앞에서 그저 기도만으로 이 세상이 달라질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기도만으로 하느님에게 청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의문했다. 맞는 말이다. 이제 신자들과 불자들도 그냥 기도만 하고 있을 일은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촛불을 들어야할 때다. 그 촛불을 들지 않는 것도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신앙의 모습일지 모른다. 더는 부끄럽게 살지 말자. 우리 안 하느님의 명령, 그 하느님의 소리에 집중해보자. 더는 이렇게 부끄러워서는 안 된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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