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쿠데타는 현재진행형, 그날 새벽 총소리는 민주주의 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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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쿠데타는 현재진행형, 그날 새벽 총소리는 민주주의 조종
  • 장기풍
  • 승인 2016.05.17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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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시작, 오늘은 군사 쿠데타 발생일

55년 전 5월 16일 화요일. 서울시내 중심가에서 다소 벗어난 동네에서 살던 나는 새벽 잠귀가 밝으신 외할머님이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는 매일 새벽 운동 삼아 주전자 들고 남산기슭 약수터에서 물 길어다 놓고 아침식사 후 등교하는 것이 일과였다. 그런데 이날 할머니는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니 오늘은 약수터에 가지마라고 말리신다. 당시 노인들은 전쟁을 겪은 지 몇 년 되지 않던 때라 총소리에 민감하셨던 것 같다.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할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큰길로 뛰쳐나갔다. 벌써 신문배달 소년이 호외를 뿌리고 다녔다. 호외에는 ‘오늘未明 軍部서 反共革命’이란 제목으로 혁명공약이 게재되어 있었다. 한 장 집어 들고 집에 오니 KBS 라디오에서는 행진곡과 함께 박종세 아나운서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녹음방송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입법·사법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 혁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1위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 동포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돼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중장 장도영.”

이날부터 며칠간은 휴교조치로 학교에 가지 않았다. 당시 나는 나이에 비해 시국에 관심이 많았던 같다. 그때는 방송국이 KBS 하나뿐이었고 신문은 4면으로 발행되었는데 서울에서는 동아일보가 야당지로 가장 인기를 모았다. 나는 매일 학교에 다녀와서는 동아일보 1면 정치면부터 경제, 사회, 문화면을 모조리 읽었다. 그러다보니 같은 또래들보다 박식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특히 당시 신문은 한문이 많이 섞여 있어 자연스럽게 한문공부도 되었다.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신정식 그리고 박정희

쿠데타에 성공한 군인들은 처음에는 민심을 잡기 위해 자유당 시절부터 악명 높던 정치깡패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신정식 그리고 4.19 혁명당시 발포책임자인 곽영주와 최인규 등을 잡아 속전속결로 재판하여 5개월 만에 사형을 집행하는가 하면 깡패들을 잡아 거리에서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조리돌림’을 시킨 후 국토건설대로 보내 강제노동을 시켰다. 군사정권의 초법적인인 이런 행동은 요즘 같으면 인권유린이라는 측면에서 상상할 수 없겠지만 당시에는 많은 국민들로부터 후련하다는 반응을 받았다. 훗날 전두환의 삼청교육대도 이를 모방한 것 같다.

이들의 집권 프로그램은 군사작전 수행하듯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후일 전부 밝혀졌지만 이들은 쿠데타 성공 1개월도 안되어 중앙정보부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초기에 간판으로 내세웠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많은 장교들을 반혁명분자로 체포하고 숙청했다. 특히 이들은 김종필의 주동으로 새나라 자동차, 빠찡꼬, 증권파동, 워커힐 등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을 일으켜 막대한 정치자금을 조성하여 정치활동금지법으로 모든 정치인들의 손발을 묶어 놓은 가운데 자신들은 미래의 집권도구가 될 민주공화당을 비밀리에 사전 조직했다. 그들은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로 복귀하겠다고 약속한 혁명공약 6항이 마음에 걸렸던지 최고회의 의장이며 대통령 권한대행인 박정희는 여러 차례 군에 복귀하겠다고 약속하고는 그때마다 군인들까지 동원된 ‘관제민의‘를 구실로 번의에 번의를 거듭한 후 못이기는 척 권좌에 복귀하곤 했다.

이때부터 박정희의 집권 로드맵은 거칠 것이 없었다. 이들은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를 실시해 4.19혁명 이후 내각책임제이던 권력구조를 자신들의 집권에 대비한 강력한 대통령중심제로 바꾸어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함석헌, 장준하, 윤보선 등 재야와 야당세력 그리고 많은 학생들과 국민들이 정치군인들의 야욕을 눈치 채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정치군인들은 대부분 만주군과 일본군 출신

박정희의 가장 큰 고비는 1963년 10월15일 제 5대 대통령선거였다. 지금까지도 막걸리, 고무신 선거로 기억되는 온갖 부정과 관권이 총동원된 타락선거였지만 박정희는 윤보선에게 겨우 15만 표 차이로 당선된 것이다. 대통령선거에서 15만 표라는 근소한 차이는 지금까지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때도 야당들이 후보단일화 협상을 벌이기는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천추의 한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만일 그때 박정희가 패배했다면 틀림없이 또 다른 친위쿠데타가 일어났으리라는 것이 많은 이들의 판단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쿠데타 세력 즉 정치군인들의 성향이다.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맹세 혈서 쓰고 입대한 ‘다카키 마사오’로 상징되는 박정희와 주변의 정치군인들은 대부분 만주군과 일본군 출신들이다. 창군 당시 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범석, 김홍일, 최용덕, 안춘생, 김신, 유해준, 박영준, 이준식 장군 등 몇 안 되는 광복군 출신들은 박정희 정권 아래 점차 세력이 소멸되어 갔으며 빈자리들은 대부분 만주군 출신으로 채워졌다.

군부 내 특정세력이 사라질 때마다 ‘하와이 토벌작전’이니 ‘알라스카 토벌작전’이니 하는 말들이 떠돌았다. 이 때문에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군부는 물론 경찰과 고위관료 대부분은 일제시대 복무했던 친일파들이 차지했다. 따라서 그 당시 시행된 대부분의 정책들은 일제시대 것을 다시 시행하거나 그들이 선진국으로 여기는 일본의 정책을 모방한 것이다.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은 쿠데타 성공 직후인 그해 11월 일본을 방문해 동경의 한 요정에서 기시 노부스케(1896-1987)를 만났다. 기시 노부스케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1936년 만주국 산업부 차관이 되어 산업계를 지배하다 1940년 귀국하여 1941년 상공대신에 취임했다. 2차대전 후 A급 전범으로 분류되었으나 미국과 협상 끝에 기소되지 않고 석방된 후 두 차례나 총리를 역임하고 1960년 미일안보조약 비준을 강행하면서 군중시위가 격화되자 사퇴한 인물이다.

그는 1987년 사망할 때까지 자민당의 대부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그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도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4년부터 72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냈다. 이들 형제는 지금도 일본 극우세력들이 떠받들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면서 박정희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당시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혁명구상을 이렇게 밝혔다. “마치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청년지사와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품고 그분들을 모범으로 삼으려 합니다.” 박정희가 흠모한 메이지 청년지사들이란 사이고 다카모리, 이토 히로부미 등 ‘정한론’을 내세워 조선침략을 주장했던 인물들이다.

10월유신은 쇼와유신의 한국판

쿠데타 10년 만에 박정희가 선포한 10월유신은 ‘유신’이라는 단어 뿐 아니라 이념까지도 메이지 유신과 1930년대 일본 군부세력이 추구한 일왕중심의 국가개조론인 이른바 ‘쇼와 유신’에 뿌리를 둔 것이다. 즉 국가가 혼란할 때는 군부가 정치에 개입해야 하며, 정당 간 경쟁이나 대중들이 다양한 주장을 펴는 것은 사회혼란을 일으키므로 강력한 반공정책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러한 일본의 유신이념은 ‘10월 유신’의 모체가 되었다. 박정희가 구호로 내세운 ‘총력안보’ 개념은 일제가 대동아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세운 ‘총후국방’ 즉 전시총동원체제 개념과 똑 같다.

많은 국민들이 박정희의 최대 업적이라고 믿고 있는 새마을운동도 일제시대 국민총력운동과 농촌진흥운동을 결합시킨 것이며 매달 25일 의무적으로 열렸던 반상회는 일제시대 애국반상회와 다르지 않다. 또한 박정희 정권 때 시행된 주민등록제도도 일제 때 ‘조선기류령’을 본 딴 것이다. 이밖에도 당시 학생들이 매일 암송해야 했던 ‘국민교육헌장‘도 메이지 천황시절 일본이 제정한 ’교육칙어’와 마찬가지로 국가주의적 교육에서 나온 발상이다.

특히 매일 오후 5시 국기하강식이나 국민의례 때마다 울려 퍼지던 ‘국기에 대한 맹세’는 일제 때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시작되는 ‘황국신민서사’와 쌍둥이처럼 닮은꼴이다. 일제시대를 모방한 박정희의 이러한 시책들은 모두 획일적인 국가관에 따른 국민들의 일치단결을 강요하는 것들이다. 일본도 당시 천황을 중심으로 모든 신민들의 일치단결을 유도하기 위해 시행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절대 왕정국가의 시책들을 민주국가라는 한국에 적용한 것이다.

박정희의 뿌리 깊은 이러한 군국주의 이념은 통치전반에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경험했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장발 단속한다며 경찰관이 이발기구로 강제로 머리를 깎는가 하면 여자들의 치마길이를 자로 재어 기준보다 짧으면 그야말로 백주에 개망신을 주었다. 이보다도 학생이나 재야인사들에 대한 영장 없는 체포와 구금, 고문, 용공조작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옥살이하거나 목숨을 잃었다. 또한 수많은 대중가요들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이른바 건전가요가 아니면 방송이나 음반제작도 불가능했다. 아침이슬, 세노야, 친구, 작은 연못, 늙은 군인의 노래, 꽃 피우는 아이, 그건 너, 한잔의 추억, 불꺼진 창, 겨울이야기, 고래사냥, 왜 불러, 불꽃, 동백아가씨,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 지금도 애창되고 있는 수백곡이 건전하지 못하다거나 창법에 문제가 있다는 등 막연한 이유로 금지되었다. 마음껏 목청 높여 부를 수 있던 노래는 박정희가 만든 새마을노래와 애국가 밖에 없다는 자조적인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긴급조치 이후 2159일, 대한민국의 감옥화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 징용자와 위안부 조달 등으로 악용되던 불심검문 제도는 박정희 시대 상시적으로 실시되어 주민등록증을 휴대하지 않았거나 금지출판물이 발견되면 여지없이 연행되어 혹독한 취조를 당했다. 1972년 유신헌법 이후 박정희는 아홉 차례나 긴급조치를 발표하여 대한민국 현대사를 ‘민주주의 암흑기’로 몰아넣었다. 따라서 박정희가 죽고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가 해제될 때까지 2159일 동안 대한민국은 ‘전국의 감옥화’ ‘전 국민의 죄수화’라는 유행어를 낳은 암흑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를 발령한 후 가장 먼저 고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을 구속했다. 이분들은 유신체제 선포 직후부터 유신헌법 개정 100만인 청원운동을 벌였다. 박정희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1974년 1월8일 긴급조치 1.2호를 발동했다.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얼마동안 옥살이한 후 석방된 장준하 씨는 1975년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타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당했다. 이러한 박정희의 강압정치는 민주시민들의 줄기찬 저항에 부딪쳤다. 박정희는 그때마다 긴급조치를 발동해 시위자들을 검거했다.

1974년 4월3일 발동한 긴급조치 4호는 유신반대 운동을 벌이던 민청학련을 이적단체로 몰아 김지하 등 235명을 비상군법회의에 송치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 배후에 북한의 지령을 받는 인민혁명당이 있다며 여러 사람을 체포해 군법회의에 넘겨 이 가운데 8명이 사형언도를 받고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는데 18시간만인 다음날 새벽 처형당했다. 이 사건으로 4월9일은 세계적으로도 대표적인 ‘사법 살인의 날’로 꼽힌다.

특히 학생들의 유신체제 저항이 거세어져 대학의 휴교가 일상화되었다. 1975년 4월 서울대학생 김상진이 할복자살하는 등 저항이 날로 심해지자 박정희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는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의견 표시는 물론 개헌청원 등 일체를 금지하고 위반자는 일반법원이 아닌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하도록 되어 있다. 유신철폐와 민주회복을 외치던 수많은 대학생과 시민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많은 학생들이 의문사를 당했다. 결국 박정희는 1979년 10월26일 저녁 청와대 인근 안가에서 젊은 가수와 여대생을 옆에 앉히고 양주 파티를 벌이다 자신의 심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헌정사에 더 할 수 없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유신체제라는 암흑시대가 종식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보다 더 무서운 놈이 나올 것...전두환

나는 10월27일 새벽 “박정희 대통령 각하 유고”라는 TV 긴급뉴스 자막을 보고 종일 할 말을 잊은 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박정희 사후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함께 정국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인간적인 연민이 겹친 복잡한 심정이었다. 평범한 직장생활의 소시민인 나로서는 그저 마음만 혼란할 뿐이었다. 그날 저녁 대화가 통하던 친구와 마음 놓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안양 어느 술집에서 늦게까지 통음하다 비상계엄으로 당겨진 통금시간에 걸려 그날을 꼬박 술로 지새웠던 기억이 새롭다. 그 무렵 나와 친하던 성당 어른 말씀이 생각난다. 대령으로 예편했던 그분은 젊은 혈기로 시국담에 열을 올리던 나에게 자중하라며 곧 군이 다시 나올 것이며 그때는 박정희보다 더 무서운 놈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여담으로 세계 여러 나라 쿠데타 역사를 보면 대부분 소장 또는 중령이 주동한다고 했다.

그분 분석이 재미있었다. 소령이나 준장은 갓 진급되어 영향력이 없고 중장이나 대령은 장군되고 대장되는 진급에 정신이 팔려 쿠데타 같은 일을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의 말대로 얼마 후 육군소장 전두환이 전광석화처럼 권력을 움켜잡았다. 하긴 박정희도 소장이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새로운 공포시대는 곧바로 5.18 광주 민주항쟁을 불러왔으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시대의 별로 길지 않은 민주화 과정을 거친 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서 다시 권위주의 시대가 머리를 들려하고 있다. 결국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완전한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지 55년이 흘러 10대 소년이던 나도 당시 외할머니보다도 늙은 노인이 되었다. 그날 5월 16일 새벽 총소리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조종이었다. 올해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68주년이다. 따지고 보면 별로 늙지도 않은 나의 생애보다도 짧은 기간이다. 긴 역사의 눈으로 본다면 대한민국은 아직도 혼란스러운 건국 초창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나의 70평생 어려서는 동족상잔의 전쟁과 그로인한 비참과 가난도 경험했고 4.19혁명, 5.16쿠데타, 5.18광주학살 등 모진 역사를 체험했다.

나는 지금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모두 11명의 대통령을 경험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밧줄에 묶여 종로거리에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을 보았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술자리에서 자신의 심복에게 총 맞아 죽는 것도 보았다. 또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수의입고 법정에서 사형과 무기징역 선고받는 것도 지켜보았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보복에 시달리다 못해 바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진 악몽과 같은 비극도 멀리서 지켜보았다. 아직 대한민국이 건국 초창기를 벗어나지 못한 혼란이라고 하기에는 우리 민족이 치룬 대가가 너무나 가혹하다.

한국현대사, 친일파 후손과 독립운동가 후손의 대립

나는 이러한 근본적인 원인을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에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탓이다. 첫째는 한반도 분단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이념보다는 민족이 더불어 살아야한다는 국민적 의지가 중요했는데 부질없는 이념대립으로 미,소 강대국들에 놀아나 결국 민족이 둘로 갈라져 6.25전쟁을 불러일으켰다. 6.25전쟁으로 남북한과 외국군까지 3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같은 피해는 인류역사상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인명피해였다. 나는 과연 3백만 명 인명손실보다 소중한 이념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우리민족은 양대 강대국 사이에서 보다 현명했어야 했다. 또 어쩔 수 없이 갈라졌다 해도 훗날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양측이 평화공존의 길을 택했어야 했다. 그러나 김일성과 이승만은 자신들의 권력유지와 독점을 위해 상대방에 대한 증오감을 조장하고 무력통일 방법을 채택했다. 김일성은 상전인 스탈린을 찾아가 적화통일을 위한 전쟁을 승인해달라고 졸랐고 이승만은 이승만대로 아무런 대비도 없는 상태에서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노라고 큰소리치다가 막상 전쟁이 터지자 가장 먼저 뺑소니쳤다. 각기 종주국의 비호아래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두 독재자들이 결국 우리민족을 오랫동안 갈라놓은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또한 해방 후 일제잔재와 일본에 빌붙어 동족을 괴롭히던 친일파를 철저히 뿌리 뽑아야 했다. 북한은 이 문제에 있어서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초대 이승만의 비호아래 친일파들이 대거 정부요직에 등용되고 이들이 사회지배층으로 군림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던 악질경관들이 독립된 대한민국 경찰 고위간부로 올라앉아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하여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했다.

한국의 잔 다르크라 불리던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는 해방 뒤 귀국한 여성 중 가장 오랫동안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분인데 6.25 때 이승만이 먼저 도망친 다음 한강철교를 폭파하는 바람에 피난가지 못하고 남아 있다 부역자로 몰려 종로경찰서에 잡혀가 고문을 당하는데 두들겨 맞으며 고문하는 자의 얼굴이 낯이 익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20여년 전 몰래 압록강을 넘나들다 체포되었을 때 자신을 고문했던 놈이었다고 했다. 생각해보라 만주벌판 매서운 추위 속에 노숙하며 독립운동하던 사람이 해방된 조국에서 자기를 고문했던 일정경찰에게 다시 고문당하는 심정이 어떻겠는가.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해방된 조국에서 일본 고등계 형사로 악명 높던 노덕술에게 모진고문을 당했다. 그는 풀려난 후 사흘을 대성통곡했고 남북협상 길에 북으로 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고향에 남은 그분의 가족은 월북자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전쟁이 터지자 친동생 셋과 사촌 다섯이 학살당했다. 간신히 살아난 동생은 4.19혁명 뒤 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해 힘쓰다가 5.16 후 징역을 살았다.

독립운동가들과 후손은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사회 밑바닥 하층민으로 전락했다. 반대로 친일파와 후손들은 같은 시대를 거치면서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독립운동가 한기악의 손자이며 대한민국 헌법초안자인 유진오의 외손인 성공회대학 역사학 교수 한홍구 씨는 지금 한국사회의 보수와 진보의 뿌리 깊은 반목과 대립도 따지고 보면 친일파 후손들과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해방직후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업보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식 자본주의와 경제민주화

끝으로 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도입의 치명적인 부작용이 대한민국 사회의 양극화와 계층간 반목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해방된 한국은 무척 가난했다. 따라서 생산과 소비구조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종주국인 미국식 자본주의를 무분별하게 도입해 날이 갈수록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오늘날 말하는 이른바 금수저와 흙수저의 대물림 현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원인은 대부분 친일지주들과 상공인들이 해방 후에도 계속 경제권을 장악한 결과이다.

해방 후 정부수립 당시 경제이념은 자본주의 경제가 아니라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경제체제이다.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제 84조는 이를 명확하게 규정했다.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라고 되어 있다. 그 뿐 아니라 제헌헌법 제18조는 “근로자의 단결,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보장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라고 규정하여 근로자의 이익균점권을 명확히 했다. 이러한 제헌헌법의 사회민주주의 정신은 5.16 쿠데타 이후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몇 차례 개헌을 통해 자본주의 요소가 크게 강화되었지만 사회민주주의 경제의 기본골자는 그대로 남아 있다.

많은 국민들은 ‘경제민주화‘라는 용어를 마치 정당의 선거용 구호처럼 인식하고 있다. 박근혜도 이를 앞세워 대선 때 재미 보았으나 당선된 후에는 일언반구도 없다. 더불어민주당으로 변신한 김종인도 마치 경제민주화를 자신의 독창적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대한민국 헌법에 엄연히 규정된 개념이다. 지금까지 집권자들이 헌법을 준수했어야 하는데 이를 단순히 상징적 조항으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 그동안 보수정권들은 사회민주주의 이상을 부르짖는 진보세력들을 아예 용공시하여 친북좌파로 몰아붙였다. 일방적인 언론에 젖어 온 많은 국민들의 뇌리에도 그렇게 각인되어 있다.

많은 국민들은 박정희를 마치 우리나라를 잘살게 만든 위대한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다. 상당부분 언론에 의해 과장된 신화다. 그동안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다시피 한 국민들은 4.19 혁명 이후 갑자기 밀려들어 온 자유와 민주의 물결을 미처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동안 잠복해 있던 국민들의 수많은 욕구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매일 시위가 계속되고 갑자기 집권한 민주당도 신구파로 나뉘어 정국이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5.16은 그러한 혼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새로운 민주정부가 본격적인 시책을 펼치려 할 때 발생한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독창적인 것 아니다
전태일, 노동자의 소신공양

박정희의 신화처럼 알려진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민주당 정부의 국토개발 사업을 수정 없이 그대로 시행한 것이며, 박정희가 고작 3억 불의 식민통치 배상금으로 경제개발 기금을 마련했던 한일협정도 민주당 정부에서 일본과 배상금을 놓고 협상하던 것을 쿠데타 후 박정희가 성급하게 체결한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이 ’굴욕외교‘라며 연일 반대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 때문에 우리나라가 잘살게 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하긴 70년 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은 북한에 비해 국민소득이 떨어졌다. 봄철이 되면 신문지상에 ’춘궁기’니 ‘절량농가’니 하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그러다 갑자기 경제가 급성장하여 도시든 시골이든 웬만하면 자동차 한 두 대쯤 있고 외국으로 휴가를 떠나는 세상이 되었으니 도대체 이게 누구의 덕분이냐고 생각하다 “역시 박통 덕분이야”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모양이다.

물론 박정희가 군대식으로 일사분란하게 지휘한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일등공신은 높다 못해 극성스럽기까지 한 한국부모들의 교육열과 공돌이, 공순이로 천대받으며 기계처럼 쉬지 않고 땀 흘린 노동자들이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의 한 봉제노동자가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죽어가면서 외친 소리는 “노동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이 헛되게 하지 말라”였다.

전태일. 그는 가난으로 정규교육도 못 받고 서울에 올라와 청계천에서 재봉사로 일했다. 공기도 통하지 않고 옷감에서 나오는 먼지를 마시면서 어린 여공들이 하루 16시간까지 쉴 새 없이 노동했던 청계천 평화시장은 지옥 그 자체였다. 의식이 깨어있던 전태일은 혼자서 근로기준법을 공부했다. 그는 정부와 기업주가 최소한 법만 지킨다면 노동자들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69년 7월부터 노동청, 서울시청 등을 수없이 방문해 열악한 노동과 위생환경을 최소한 법에 맞도록 개선해 달라고 요구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탄원서도 보냈다. 그때마다 정부는 번번이 거절하면서 그를 위험인물로 대했다. 그는 동료들과 ‘바보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노동조건 개선운동을 펼쳤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켜지지도 않아 쓸모없는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했다.

그의 죽음은 노동운동의 불씨가 되어 전국적으로 노동조합 결성과 노동환경이 크게 개선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가 33세 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인류구원을 가져 왔듯이 전태일도 22년 짧은 생애를 오로지 이 땅의 노동자 권익을 위해 자신의 몸을 소신공양한 것이다. 박정희 시대 억압받고 착취당했던 수많은 노동자들과 민주제단에 몸 바친 숱한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의 목숨과 피흘림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루어진 것이다. 결코 박정희 한 사람의 업적이 아니다.

5.16군사쿠데타는 현재진형형

5.16은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재진형형이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의 어두운 유산은 민족분단의 고착화, 독재에 대한 향수, 경제와 군사주권 포기, 금전 만능사상, 출새 지상주의, 학력사회, 지역감정, 빈부격차 심화, 출산율저하, 청년실업 등 지금까지도 사회 구석구석에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따지고 보면 최근 가습기 살균제 소동이나 세월호 참사도 박정희식 인간성이 배제된 경제만능주의와 비밀행정주의의 산물이다.

이제 5.16 쿠데타 55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비전으로 민족화해와 평화통일 그리고 인간성회복과 상식이 통하는 건전한 새 시대를 열어나가야 할 것이다. 36년 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쳤던 것처럼 지금 국민들은 대통령과 위정자들을 향해 “헌법을 지키라”고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 최소한 헌법만 지켜도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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