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가톨릭 신자 맞아?
상태바
당신 가톨릭 신자 맞아?
  • 한상봉
  • 승인 2018.08.20 13:0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상봉 칼럼]

벌써 삼십 년째 신학공부 언저리를 맴돌고 있지만, 교회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단체 활동을 해왔지만, 제도권 교회 안에 깊숙이 몸담은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었다. “나는 예수는 좋아하지만, 교회는 싫어한다.”는 말이 낯설지 않았던 세월이 참 오래 계속 되었다. 아마 교회가 예수님처럼 살지 못한다는 거듭된 경험 때문일 것이다.

당시 노동사목을 함께 했던 선배는 피정을 가면 늘 눈물을 흘렸다. 선배는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어머니이신 교회가 나를 박해한다고 느낄 때”라고 고백하곤 했다. 여성노동자로서 평생 노동자들과 핍박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했지만, 교회에선 늘 그녀를 “과격하다”고 했다. 이들이 하는 천주교사회운동에 교회는 ‘비공인’ 딱지를 붙여 두었다. 교회의 인준을 받지 않은 임의단체라는 것이다. 공식교회에서 배제된 사람들, 이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예수님의 향기가 맡고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by Martin Erspamer OSB

행복하다, 박해받는 사람들

이 선배에게 최근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선배는 “국가가 인정했으니까 이제 빨갱이 소리 안 들어도 되는 건가?” 물었다. 그리고 “이 훈장은 내가 받은 게 아니다. 그동안 고통당하고 고생한 사람들의 외침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께서 나태해지지 말라고 주는 선물이자 동시에 채찍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교회에서 비난받던 이가 오히려 나라에서 칭찬을 받았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라는 복음서 구절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순간이다. 이 구절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 잇달아 나오는 대목이다.

포도밭 소작인들이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주인이 보낸 종들을 매질하고 죽이고, 마침내 주인이 보낸 아들마저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물론 여기서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종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일꾼이며, 그들을 죽인 자들은 대사제와 수석사제, 바리사이와 같은 지배층 성전세력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소유인 포도밭을 저희가 차지하려고 이런 짓을 저질렀다. 

땅이 그들의 것이 아니듯, 교회도 교황과 고위성직자들과 몇몇 신학자 전문가들과 사제 관료들의 것이 아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격렬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부서지고, 그 돌에 맞는 자는 누구나 으스러질 것이다.”(마태 21,43-44)

정말, 무서운 일이다. 정작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될 사람은 교회 지도층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며,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일하다 박해받는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덧붙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22-23)고 말씀하셨다. 세상과 교회에서 모두가 안전하고 성공적인 출세를 바라지만, 예언자들은 행색은 남루해도 하느님 안에서 기뻐한다.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하였기 때문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가자, 군중 속으로

나는 오랫동안 ‘신자’라는 말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본질에 더 가까이 가게 해 주는 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생애의 처음처럼 본당생활을 하게 되면서, 사목위원으로 일하면서, 성찬봉사자로 일하게 되면서, 매일미사에 참여하면서, 기도하는 방법을 연습하면서, 급기야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하면서, ‘신자’란 ‘믿음의 사람’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생활’을 하는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신학보다 신앙이 앞서야 한다는 뜻이다. 뜻 맞는 동지들과 활동하는 것은 흐뭇하고 쉬운 길이지만, 뜻이 잘 맞지 않는 본당신자들과 어울리는 길은 쉽지 않았다.

본당에는 모호한 신앙을 가졌지만 선한 이들이 많다. 신학을 모르지만 따뜻한 심성을 지닌 이들이 많다. 거칠어도 순진한 사랑을 표현하는 이들도 있으며, 정치적 견해를 달리 하지만 우정을 나눌만한 이들도 있다. 물론 아주 고약한 신자들도 있다. 아마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만났던 군중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예수님의 말을 경청하고 지지하며 따랐던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 말씀마다 비난하고 행패를 부리던 사람이 왜 없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게도 비난을 퍼 붓지 않았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떼처럼” 측은했기 때문이다. 납득할 수 없는 그들의 고통이 예수님에게도 가시돋힌 말을 던졌을 것이다.

본당생활을 하고서야,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비를 내리시고 햇볕을 쪼이신다는 예수님 말씀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다만,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처럼 당대에 권력을 가진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혹독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자신의 종교권력과 지식으로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봉사하라고 준 힘을 자신의 안전과 영광을 위해서만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무능한 지도자와 탐욕스런 관료들은 넘쳐 나지만, 이들 때문에 겸손한 주님의 종은 아주 오래 성전 밖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회당을 중심으로 활동하시다 쫓겨나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군중들을 만나신 분이다. 허나, 복음에 허기진 백성들은 회당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그래서 말한다. 가자! 어디든, 다시 군중 속으로.

 

사진출처=pixabay.com

누가 믿음의 사람인가

루이제 린저는 <미리암>이란 소설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그가 던진 낚시 바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참 아름다운 구속(拘束)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한 번도 제대로 교회에서 탈출한 적이 없었다. 나를 먹인 것도 교회였고, 나를 키운 것도 교회였다.

도로시 데이는 “교회는 언제나 나에게 스캔들이었다.”고 말했지만, 이 부패한 교회를 떠나지는 않았다. 교회는 그에게 “예수가 매달려 있는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도로시 데이는 그 ‘교회’라는 십자가를 지기로 작심했다. 그 십자가 아래 여전히 슬퍼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십자가에서만 그리스도를 더 또렷이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

그때가 언제던가. 내가 노동사목에서 신앙생활분과 간사를 맡고 있을 때였다. 민주노조 운동이 한창이던 어느 해 뜨겁던 여름, 한 떼의 노동자들이 명동성당 들머리에 농성 천막을 쳤다. 당시 성당 들머리는 하소연 할 곳이 없는 이들이 찾아드는 마지막 보루였다. 이제는 그마저 사라져 버렸지만, 성당 들머리는 민주주의와 목소리 없는 자들의 베이스캠프였다.

며칠 뒤에 성당 사목위원들이 몰려나와 천막을 부수고 노동자들은 성당에서 쫓겨났다. 경건한 신앙생활과 미사전례 거행에 방해된다는 거였다. 그들은 조계사에 천막을 다시 쳤고, 이튿날 조간신문에 ‘스님들이 그 노동자들과 함께 환하게 웃으며 수박을 나눠 먹는’ 사진이 실렸다. 가난한 이들이 행복한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명동성당이 아니라 절간에서 베풀어졌다.

이 사진을 보고서, 나는 A4용지 한 장 분량으로 ‘손님과 불청객’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명동성당에 불청객처럼 쫓겨난 노동자들이 조계사에서는 손님처럼 환대받는 이유를 묻고, 명당성당 측의 비복음적이고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는 글이었다. 과연 예수님이라면 저들을 손님으로 맞이할 것인가, 불청객으로 내쫓을 것인가 물었다. 우리에게 신앙이 있기라도 한가? 물었다. 함께 일하던 선배가 이 글을 각 본당에 팩스로 넣으면서 일이 커졌다. 단박에 명동성당 수석보좌 하던 신부님이 전화를 했다. 다짜고짜 나무라는데, 그 첫 마디가 “당신 신자 맞아?”였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당신 신부 맞아?”, “이게 교회 맞아?” 하고 말이다.

이 신부님은 무조건 교회 측을 옹호하고, 사제들에게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을 ‘신자’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신자(信者)를 <천주교용어자료집>에서는 “하느님과 가톨릭 교리를 믿는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신부님이 믿는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서 찾아낸 하느님인지 모르겠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의 하느님은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자비로이 가난한 이들을 품어 안아 주시는 분인데 말이다. 예수님도 노동자였고, 그분의 친구들도 제자들도 가난한 백성들이었는데, 과연 이 신부님도 ‘신자’가 맞는지 묻고 싶다. 믿음이 있는지 묻고 싶다.   

* 이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18 8-9월호(통권 14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아녜스 2018-08-27 09:24:18
글쓴이는 제가 보기에 가톨릭 신자이며 그리스도인 맞습니다....^^
전화한 명동성당 수석보좌 신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제이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인이며 가톨릭 신자여야 하지 않을까요? 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