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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당대의 인습적 질서와 맞서다신이 된 사람, 그가 ‘그곳’에 있다-1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복음」5,17)

예수의 입을 빌려 표현되는 이 말씀을 대부분 학자는 예수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 후의 (아마도 팔레스티나에서 형성된) 어떤 예수 집단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이것은 역사의 예수가 반율법주의자라는 이해와 연결되며, 나아가 그리스도교 신앙, 아니 서양인의 반유대주의적 심성과 맞물려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유대주의에 반하는 그리스도교적 세계의 패권주의를 추구했던 서구 신학자들의 자기 중심주의적 이해를 반영할 뿐이다.

사실 우리는 예수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예수가 반율법주의자라는 해석에 반대되는 이해를 「마태복음」이 보여주었다는 점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아니 실은「마태복음」의 율법 친화적 이해를 서양 신학자들의 그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 자체도 서구 중심주의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바울 서신들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반율법주의를, 서구 중심주의적 맥락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예수 운동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마태복음」의 율법 친화적 예수론도 그의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들의 인식론적 맥락의 저류에는 공히 실재했던 인물 ‘예수’가 있다. 필경 「마태복음」과 바울, 이 둘 사이의 서로 다른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이 양자 간의 표면상 차이의 이유겠지만, 주지해야 하는 것은 이 두 텍스트는 자신의 율법관을 예수와 관련해서 이해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표면상의 차이만을 가지고 두 성서 텍스트의 율법에 대해 상이한 태도를 해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모든 초기 예수운동 집단들의 공통된 지반인 예수를 살펴야 하고, 그로부터 의미가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는 과정을 보아야 한다. 여기서 오늘 우리의 관심은 예수의 율법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의 문제다. 그것은 예수에게서, 아니 예수와 동시대인들에게서 율법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묻는 것이며, 예수는 그것을 어떤 코드로 읽어냈느냐를 살피는 것이다.

율법, 당대의 의미체계 

by Maria Laughlin

여기서 우리가 미리 전제해야 하는 사실은, ‘율법’이라는 것이 일종의 그 시대의 의미체계의 문법이었다는 점이다. 요컨대 그것은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행위에 정결함과 부정함, 옳음과 그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적․무의식적 인식틀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의 일상은 율법에 의해 규범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기 1세기의 유대인이라면 누구도 이러한 인식틀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그가 의지하기 이전의 존재의 근원이며, 삶의 무의식적 뿌리였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세계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이러한 인식틀에 비판을 가했다는 것이다. 그 세계 ‘내부인’이면서 동시에 그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론적 구조 외부로 ‘탈주’하려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사고와 실천의 모순이 드러난다.

만약 어떤 위대한 사상가가 있다고 하자. 그는 자기가 속한 사회의 규범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전 생을 걸고 그 규범 체계와 투쟁하며 살았다. 그렇다고 그가 그 규범 체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일 수 있겠는가? 그는 그 규범세계 속에서 태어났고 성장했다. 그래서 그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그 규범은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 밴 사고와 행동의 체계였다. 혹 그이가 이 규범 세계의 외부인이었다면, 가령 그가 외국인이라면, 필시 그의 주장은 내부인들에게 여간해선 설득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 ……’ 이로써 (예수께서는) 모든 음식이 깨끗한 것임을 선언하셨다.”(「마가복음」7,18-19) 이것은「레위기」11장에 묘사된 바, 정결하게 하는 음식과 부정하게 하는 음식을 나누는 토라의 규범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이다.

위에서 말한 것은, 짐승과 새와 물속에서 우글거리는 모든 고기 떼와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것에 관한 규례다. 이것은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하고,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을 수 없는 동물을 구별하려고 만든 규례다.(「레위기」11,46-47.)

음식 규범은 율법의 가장 핵심 중의 하나다. 그러나 예수가 돼지나 뱀 등 금기음식을 먹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오히려 뱀이나 돼지 등을 혐오하는 동시대인들의 인습적 사고를 예수 또한 공유했음이 분명하다.(「마태복음」7,10;「마르코복음」5,13) 바로 이렇게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부정과 긍정의 태도의 공존, 이것은 예수가 비판하고자 했던 율법이 예수를 포함한 동시대 유대인들의 규범적 뿌리였다는 것을 뜻한다.

규범은 일상의 내면적 의식체계 

이제 우리는 율법이 예수를 포함한 동시대 유대인들의 삶의 규범적 뿌리였다는 전제 위에서, 예수가 율법을 비판한 동기가 무엇인지를 묻고자 한다. 왜 자신의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탈주하고자 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서 규범적 뿌리로서의 율법의 사회적 기능에 대하여 더 충분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규범체계라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무수한 반복을 통해 구조화된 ‘행동원리’이자 ‘세계관’이며 사회의 ‘조직원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무엇을 해야 마땅한지를 판단하기 위해 그것들 하나하나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레 주변 사람들로부터 직간접으로 터득해온 규범을 통해 판단기준을 갖는다.

그것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내면화한다. 또 사람들은 천하만물의 법칙, 즉 순리라는 것을 규범을 통해 터득한다. 나아가 사람들은 가족․친족․마을․부족․민족 같은 사회집단 속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해야 마땅한 도리(역할 기대)가 무엇인지를 바로 규범으로부터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규범은 그 사회의 ‘지혜로움’의 체계다. 이러한 규범에서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을 유대교 사회에서는 ‘현자(賢者)’ 또는 ‘라삐(=선생님)’라고 부른다. 규범은 그 사회의 전통(과거성)의 근거이자 미래적 전망의 원리며, 바로 그런 전통과 전망에 근거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힘으로서 지식체계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의의를 갖는 모든 지식체계가 곧 규범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규범은 사람들의 ‘일상적 삶 내부’에서 삶을 규제하는, 마치 무의식과 같은 의미의 지식체계인 것이다. 이로써 그 사회의 대중은 그 규범체계의 적극적인 수호자가 된다.

 

by Maria Laughlin

‘율법-회당-성전’ 체제와 ‘율법-산헤드린-성전(-로마)’ 체제

그런데 규범적 가치가 사회에 안착하는 데는 반드시 제도적 장치를 필요로 한다. 예수시대 규범의 제도적 장치는 다음의 두 가지 상이하게 작동하는 제도적 체제의 결합체로 설명할 할 수 있다. 바로 ‘율법-회당-성전’ 체제와 ‘율법-산헤드린-성전(-로마)’ 체제다.

이 두 체제는 규범적 가치를 권력화한 제도적 실체다. 다시 말하면, 규범적 가치가 (회당 또는 산헤드린과 연계된 가치체계인) ‘율법’이 되는 것은 곧 지혜로움의 체계가 권력적 지식, 즉 권력을 위해 봉사하며 권력에 의해 그 품위가 한층 격상되는 식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예수 시대 규범적 가치의 현존방식인 율법은 권력적 지식으로, 팔레스티나의 대중을 권력에 길들게 한다. 대중은 소수의 특권층에게 많은 것을 박탈당하면서도, 그들이 공유하는 규범체계로 말미암아 그 심각한 이질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특권층과의 동료의식에 사로잡힌다.(피학성, Masochism) 반면 대중의 억눌림은 ‘이방인’을 향해 투사된다.(가학성, Sadism) 억눌림이 심할수록 그 투사의 정도는 점점 폭발적으로 증폭된다. 그 폭력성은 집단적 광기의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이방인’은 실제로 억눌림에서 비롯된 증오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은 너무 강하거나, 보복의 손길에서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방인과 동일시되는 또 다른 대상이 필요하다. 물론 그자들은 보복할 능력이 결여된 ‘만만한 대상’이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문예이론가인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이들을 ‘희생양’이라 불렀다.

규범 바깥의 희생양들

예수 시대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 같은 종족이나, 세리․창녀․목동 등과 같은 직업집단, 혹은 이단적 소종파(가령 유대교의 박해받던 초기의 예수 집단) 등으로 규정하고는, 그들에게 분노를 쏟아부었다. 이리하여 권력적 지식(율법)이 된 규범체계는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자들뿐 아니라 그 사회의 거의 모든 대중을 권력의 공법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권력의 희생양에 대한 가학적이고 배제주의적인 방식은 구체적으로 어떠했을까? 우리는 여기서 규범적 가치의 체계가 ‘정결-부정의 체계’를 이룬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선과 악의 추상적인 이분법적 가치를 현실 생활에 적용한 것이다. 이때 현실의 경험은 결코 궁극적인 선-악의 단순 이원화된 가치와 대응할 수 없다. 그래서 선-악 가치의 중간에 무수한 과도적 단계들이 설정되고, 이 단계들 하나하나에 구체적인 경험 하나하나가 일대일 대응하게 된다.

가령, 음식 가운데 매우 정결한 것, 약간 정결한 것, 아주 조금 정결한 것, 아주 조금 부정한 것, 약간 부정한 것, 매우 부정한 것 등이 구체적으로 정-부정의 형태로 규정된다든가, 혹은 우리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물건을 옮기는 것 하나하나도 ‘손’ 있는 날, ‘손’ 없는 날, ‘길’한 날 등, 정결례적으로 규정되는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또 음식과 장소 혹은 시기가 결합되어, 어떤 때/곳에서 허용되는 것과 불허되는 것 등이 규정되기도 한다.

이렇게 구체적인 실천이 추상적 가치와 정교하게 조합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 경험 혹은 실천을 선과 악으로 가치판단 하는 것은 사실 친족집단 혹은 동족집단의 생태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가령 팔레스티나처럼 무더운 초지에서 반유목 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에게 돼지 사육은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며 유익하지도 않다는 환경적 요인은 점차 돼지를 부정한 음식의 반열에 오르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부정의 체계가 권력담론이 되면서, 생태 환경에서 비롯된 가치의 우열적 차등화가 인간의 우열을 가늠하는 척도로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율법은 배제된/될 희생양에 대한 사회적 보복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근거가 된다. 결국 율법은 복수의 대상인 희생양을 찾아 헤매는 사냥꾼이 되어버렸다.

예수와 규범의 해체

예수는 유대 사회의 이러한 규범적 가치를 내면화하면서 자랐다. 요컨대 그는 ‘또 한 명’의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동시에 성장하면서 그런 가치를 ‘해체’하는 열렬한 투사가 된다.

‘안식일’이라는 인간의 정결성을 가늠하는 유대교적 규준은 예수에 의해 인간의 정결성을 회복시키는 규준으로 돌변한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마르코복음」2,27)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며, 창녀와 거렁뱅이와 세리를 제자로 삼는다.

율법학자들이 희생양으로 배제한 자들을 예수는 이웃으로 동료로 회복시킨다. 또한 이웃 족속이자 동족이기도 한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유대인의 율법적 적대감을 비난한다. 진정한 이웃이기를 거절한 사제와 율법학자에 비해서, 이윤에만 몰두한다는 세상의 선입관을 한 몸에 짊어진 직업을 가진, 더구나 ‘더러운’ 사마리아 출신인 장사꾼이 도리어 강도당해 패대기쳐진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었다면서.(「루카복음」10,25-37)

우리는 예수가 율법과 투쟁을 벌이는 현장에서 언제나 배제된 희생양을 복권시키는 장면을 발견한다. 예수는 심판을 외친다. 약자들을 향한 사회의 빗나간 분노, 그것을 비난하면서 말이다. 바로 예수의 율법 해체는 막연한 규범의 해체가 아니라, ‘권력적 지식이 되어버린 규범’의 해체였다.

그것은 ‘율법-회당-성전’이라는 권력화된 의미의 코드화를 향한 비판이었다. 반면 예수는 정복당한 자들의 이야기를 복권시킨다. 질병 들린 자, 악령 들린 자, 억압받는 자, 갇힌 자에게, 그들이 그 질곡에서 해방되었음을 선포한다. 그 순간 그이들은 병에서, 악령에서, 온갖 질곡에서 해방을 체험한다. 기적이 일어났다.

이와 같이 예수는 자신의 존재로부터 반항한다. 비록 그의 언어는, 그의 일상은, 그의 삶 전체는 자신의 존재로부터 충분히 탈주하지 못했음에도, 끊임없이 그를 인습의 끈 속에 구속하려는, 그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지배해온 전능자 같은 악마의 마수에서 헐떡거려야 함에도, 그의 밖을 향한 탈주의 여정은 점차 격렬해지고, 근원적인 곳에로 접근해 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질곡에서 해탈을 체험한다. “다 이루었다!”는 말과 함께.

* 이 글은 나의 책『예수의 독설』의 ‘보론 I: 예수의 권력 비판’에 수록된「율법과 예수」,「변두리에서 중심으로 가는 길」을 발췌, 수정하여 만든 것으로, 대전시립박물관이 주최한 강좌 “신과 함께―종교철학을 통해 보는 인간사”의 제5강 ‘인간으로 온 신, 이에수스’(2018.05.25.)의 강의원고다.

[출처] <맘울림> 2018년 6월 통권 제42호, 신앙인아카데미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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