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처럼, 얼마나 더 낮아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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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처럼, 얼마나 더 낮아질 수 있을까?
  • 미건 맥켄나
  • 승인 2018.08.20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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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께서 비효율적이고 취약하다는 바로 그 사실 안에 참다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의 신비가 숨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부활의 의미는 그분께서 비효율적이고 취약하다는 사실로부터 분리된다면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이 볼 수 있는 세계에서 우리가 무력한 사람이 되는 위험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예수님의 추종자가 되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죽었다. 그분은 방금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루카 23,46).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고 시신이 내려졌다. 그분의 처형대와 고문의 자리, 그리고 시신이 그분을 죽이라고 외쳤던 냉소적이고 가혹한 사람들의 시선 앞에, 잔인하게 고통을 받은 그분에 대해 연민이 없었던 비인간적인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드러났다.

그분의 몸은 축 늘어지고, 눈은 감겼고, 머리는 앞으로 숙여있다. 팔 다리는 생명을 잃은 모습이다. 그분은 죽었다. 하지만 그분의 영은 아직도 그분의 육체 안에 머문다. 그분의 고통, 그분의 기도, 아버지께 대한 그분의 믿음, 그분의 복종을 붙잡는다. 그리고 그분을 바라보고 믿음과 헌신의 눈길로 쳐다보는 이들에게 그분은 아직도 신뢰를 보내는 것 같다. 그분은 숨을 거두기까지의 지난 몇 시간 만이 아니라, 생애 내내 무엇으로 고통을 겪었는가? 이분이 인간 예수님이다.

 

by George Desvallieres

그분의 몸은 희생제물로 바쳐졌다. 그분은 온전히 인간이었으므로 모든 인간존재가 죽는 것처럼 죽었다. 그렇지만, 그분은 이런 모습으로 고통을 겪고 이렇게 죽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쇠가 달린 채찍으로 갈기갈기 찢기고 맞고, 못이 살갗을 뚫고 뼈 사이로 들어가 나무 십자가에 박히며, 옷을 벗겨 알몸이 되어 군중의 증오 앞에 드러나는 모습으로.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십자가에 못박히고 지극히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분이다.

이것이 바로 빛나는 비움이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의 성도들에게 우리가 이 세계 앞에 모방하고 그렇게 되어야 할 그리스도는 바로 이 빛나는 비움이라고 쓰고 있다. 들어보자: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뜻을 같이 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이기심과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 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 2,1-8)

이 노래는 때때로 자기를 비우시는 하느님의 찬가라고 불린다. 이분은 고통의 인간이다. 몸은 부서지고 고문으로 파괴되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의 마음 속 어떤 것이 아직도 몸에 자국을 만든다. 그리하여 방 전체에, 집을 온통 채우기 시작하는 향기처럼 스며든다. 마침내 전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콜로 1,19-20)

이것이 소비되고, 내뿜어지고, 사랑 속에 사라져간 삶이요 생명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몸을 떠나고 있는 자비의 영이다. 유일한 우리의 응답은 기도, 끊임없는 기도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 지극한 겸손이여, 자비의 지성소여, 거룩함이 머무는 자리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가르멜 수도원에서 그의 이름은 거룩한 얼굴의 데레사였는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예수님 안의 하느님을 봅시다. 단지 아기 예수가 아니라 얼굴 대 얼굴을 맞대고 봅시다.” 데레사가 작은 것에 대해 말했을 때, 그것은 단지 신체적 아기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겸손한 것, 하인으로, 보이지 않게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데레사는 말했다: “사랑의 본질은 자신을 더 낮추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의 낮춤, 예수님 안의 하느님의 자비를 의미한다.

데레사는 자신을 “꽃잎이 없는 장미”로 묘사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낭만적이고 신심이 깊은 모습으로 여기지만 –사실은 꽃잎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떨어져 나간 꽃잎은 땅에 버려져서 쓰레기가 된다–바로 이런 모습이 데레사의 삶이고 그의 희생이었다. 데레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겸손한 모습으로 그분을 따르라고 말했던 또다른 형상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한 12,24. 26-28).

예수님이 하느님께 완전히 복종할 때 표현되는 모습이 바로 지극한 겸손이라는 거룩한 모습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존재에게도 복종하는 모습이고, 일생 정화되어가는 과정이다. “취약함과 만난” 존재, 슬픔의 사람의 거룩한 얼굴을 바라볼 때에만 고통이 태어난다는 것을 이 거룩한 모습은 선포한다.

고통은 전 세계에 흩어지는 골고타 동산의 씨앗이라고 어떤 사람은 말했다. 그리고 초세기에 요한 크리소스톰은 자기의 교회에 물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찬양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벌거벗음을 경멸하지 마십시오. 또한 바깥에서 그분이 춥고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라 하면서 이곳 교회 안에서 비단옷을 입고 있는 그분을 공경하지 마십시오.” 아를르의 케사리우스는 이렇게 선포했다:

“형제들이여, 그리스도는 지금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이 겪는 굶주림과 목마름에 머리를 숙이십니다. 그리고 내일 천국으로 돌아오실 때 그분은 오늘 이 지상에서 받은 것으로서 오실 것입니다.”

교회의 풍부한 전통은 그리스도의 고통과 겸손에 대해 성찰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보잘 것 없는 그들의 형제들과 자매들의”(마태 25,40)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통으로 알아보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수치를 당하며 멸시를 받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신심이 하고자 하는 것을 바로 보잘 것 없는 형제자매들에게 하라고 요구해왔다.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고 행동할 때에 지극한 겸손한 이 그리스도를 모방해야 한다. 이렇게 철저히 비운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고,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향하여 사랑의 원칙을 실천하는 것이며, 가난한 사람들, 죄수들, 피난민들, 저주받은 사람들과 낙오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다. 또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겸손이란 우리 자신에 관한 진리이다–그것은 사랑받고 있다는 진실이다. 그리고 우리 영혼 안에서 떠오르는 하느님은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이 맺는 관계인 생명, 그 생명을 항상 우리에게 주기 위하여 죽고 있는 하느님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지극한 겸손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피를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준다.

우리의 죄, 우리의 무감각, 그리고 세상 속에서 우리가 행하는 불의로 인해 고통받는 모든 이들의 몸으로서 우리 가운데 살고 계시는 이 하느님께 우리는 다만 울고, 깊이 절하며 사랑으로 돌아서는 것을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지극한 겸손의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면서 우리는 굽히는 것을, 겸손해지는 것을, 그러한 사랑에 대한 감사로 경배하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겸손한 마음으로 응답하며 섬기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출처] <자비가 넘치는 그리스도>, 미건 맥켄나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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