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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 죽음, 연인의 품으로제3부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선택되고 축복 받으며 부서지고 내어주는 사람들로서 우리들은 깊은 내적 기쁨과 평화를 갖고 살아가도록 요청 받고 있다. 이러한 삶은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짐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신시키려고 하는 세계 속에서 사랑받는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삶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의 다른 측면은 어떤가? 전문직을 세우고, 성공과 명성에 대한 희망 그리고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꿈들은 다 어떻게 되는가? 이런 모든 것들을 다 무시해 버려야 하는가? 이러한 갈망들은 영적 삶에 정반대인가?

세상을 떠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지도 모르며 당신에게 대도시의 빠른 속도를 떠나 제한 없이 영적인 삶을 추구해갈 수 있는 자리를 찾으라고 충고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방식이 당신의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의 자리가 라르슈같은 공동체나 수도원 혹은 외진 시골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도시와 그것이 주는 도전들이 당신과 친구들에게 그다지 나쁜 자리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겠다. 이곳에는 열기와 흥분, 움직임 그리고 보고 듣고 맛보고 즐길 것이 많다.

세상은 당신이 그것의 노예가 될 때에만 사악한 것이다. 세상은 에집트가 야곱의 자녀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줄 것이 많다. 다만 당신이 세계에 복종한다고 느끼지 않을 때 그럴 뿐이다. 당신이 당면한 가장 큰 투쟁은 세상을 떠나는 것도, 꿈과 갈망을 거부하거나 돈을 무시하고 특권 혹은 성공을 멸시하는 것보다도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사람처럼 당신의 영적인 진리를 고수하고 그것을 이 세계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나는 우리 세계가 주는 모든 좋은 것들이 당신이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 깊게 확신한다. 그러나 당신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진리를 그것들을 통해 확신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당신은 그것들을 즐길 수 있다. 당신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그 진리는 자연과 문화의 아름다움을 당신이 감사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과 문화의 아름다움은 바로 당신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사회로부터 받는 선물들을 당신이 받아들이고 삶을 기념하도록 허락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는 또한 당신을 괴롭히고 혼란을 가져오며 당신 안에 있는 성령의 작용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당신이 붙잡지 않도록 해 줄 것이다.

이 세계에 파견된 존재로서 당신을 생각해 보라… 만일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당신이 사랑받았던 존재라고 참으로 생각한다면 이렇게 파견된 존재로 생각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이렇게 생각하려면 참으로 신앙의 도약이 요청된다! 당신 스스로에게 또한 타인들에게 당신이 특별한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세상이 주는 엄청난 압력들에 굴복하고, 처음부터 결국에는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당신의 삶은 그저 생존을 위한 긴 투쟁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 세계에서 진정으로 살기를 참으로 원한다면 이 세계를 그러한 삶의 원천으로 볼 수가 없다. 이 세계와 그것이 보여주는 전략들은 오랫동안 당신을 살아 남게 해 줄지는 몰라도 참다운 삶을 살게 해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당신의 삶은 둘째치고 그 자체의 삶에도 원천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우리에겐 생존 이상의 삶이 있다

영적으로 보면 당신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하여 당신은 이 세계에 보내진 것이다. 당신의 가족과 친지들, 동료들과 경쟁자들 그리고 당신이 삶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생존 그 이상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보내진 존재로서 당신은 그들 사이에 현존하면서 그들에게 참다운 삶이 무엇인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당신 자신을 이 세계에 보내진 존재로 깨닫는 순간부터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 사람들과 사건들, 예술과 문학, 역사와 과학, 이 모든 것들은 불투명하기를 그치고 투명하게 되며, 당신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를 가르쳐주게 된다.

이 근본적인 변화에 대하여 당신에게 설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데, 보통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변화는 자기를 알기 위한 어떤 새로운 원칙으로 가르치거나 실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이 변화는 당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시험으로 삶을 사는 대신 하느님의 사랑받음이라는 진리에 끊임없이 “예”하고 대답하는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좀 더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삶은 본래의 우리 존재로 되어가기 위하여 하느님이 준 기회이다. 이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의 참다운 영적 본질을 확인하고 우리의 진리를 고수하며, 존재의 현실을 인식하고 통합하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랑받는 존재로 부르는 그분께 “예”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을 기다리는 연인이다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는 하느님이 사랑받기를 원하는 연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창조한 분이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를 존재케 한 사랑이 응답을 바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너는 나의 사랑받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삶이다. 우리의 내적인 진실에 “예”하고 말하는 기회이다.

이렇게 이해되는 영적인 삶은 모든 것을 철저하게 변화시킨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집을 떠나 직업을 찾고, 칭찬받고 거부되며, 걷거나 쉬고, 기도하고 놀고, 아프고 낫고 -그렇다. 살고 죽는 것- 이 모든 것이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거룩한 질문의 표현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정의 모든 단계 단계마다 “예”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선택이 놓여 있다.

당신이 이러한 영적 비젼을 조금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우리들의 일상 생활속에 너무나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수많은 구분들이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쁨과 고통이 우리들의 거룩한 자녀됨에 모두 “예”라고 말하는 기회들이 된다면, 이 기쁨과 고통은 다른 것이라기보다 더 같은 것이 된다. 상을 받는 체험과 특출함이 부족한 체험 두 가지 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이”라는 우리의 참다운 정체성을 주장하는 기회가 될 때 이 두 가지 체험들은 다른 것이라기보다 비슷한 것이 된다.

 

사진출처=pixabay.com

악마는 갈라놓고 성령은 합친다 

외로움과 집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들이 하느님이 누구이며 우리들은 누구의 자녀들인가를 더 온전하게 발견하기 위한 초대가 될 때에 이 두 가지 감정은 구분되기보다 일치하게 된다. 마침내 사는 것과 죽는 것 모두가 우리를 영적인 자아의 완전한 실현으로 더 가까이 이끌어갈 때에 이것들은 세상이 우리에게 믿도록 강요하듯이 하나의 거대한 반대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하나의 신비의 두 가지 측면들이 된다.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일치된 실제를 살아가는 삶을 뜻한다. 어둠의 세력은 갈라놓고 분리하며 반대입장에 서게 하는 힘들이다. 빛의 힘들은 합치게 한다. 문자 그대로, “악마적”이란 말의 뜻은 갈라놓는다는 뜻이다. 악마는 갈라놓고 성령은 합친다.

영적인 삶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파괴와 폭력을 일으키는 수많은 분리들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리들은 내적이면서 또한 외적인 측면의 분리들이다. 우리 자신의 가장 내밀한 감정들의 분리 그리고 가장 많이 퍼져있는 사회적 그룹들에서 나타나는 분리들이다. 내 안에 슬픔과 기쁨 사이의 분리나 인종, 종교 그리고 문화 등 내 주위의 분리는 모두 그 뿌리가 어둠의 사악한 세력 안에 있다.

하느님의 성령, 우리를 사랑받는 존재라고 부르는 성령은 일치시키고 전체를 이루어내는 영이다. 일치, 치유, 복구 그리고 화해의 순간들을 확인하는 것보다 하느님의 성령의 현존을 분별하는 더 분명한 방법은 없다. 성령이 일하시는 곳마다 분리는 사라지고 내적 외적 일치가 드러나게 된다.

죽음은 온전한 생명에 이르는 문

내가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 전체가 “위로부터” 살아질 때에, 다시 말하자면 세상에 파견된 사랑받는 자로서 살아갈 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죽음이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생명을 선택하는 고유한 기회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기쁨과 슬픔은 우리의 영적 충만함에 이르는 길이 된다.

나는 이러한 비젼이 소설가 줄리안 그린이 친구인 불란서의 철학자 쟈끄 마리땡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장 감동적으로 그려진 것을 발견했다. 그린은 이렇게 쓰고 있다:

“…많은 성인들의 신비스러운 체험에 대해 생각할 때에 기쁨과 고통이 어떤 매우 높은 차원에서는 똑같은 현상의 두 가지 측면들이 아닌가 스스로 자문하게 된다. 너무나 확실하게 어떤 비슷한 추리가 나에게 떠오른다. 즉, 극단적으로 차가운 것은 뜨겁다는 사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하느님께로 갈 수 있으며 이 고통은 기쁨이 되는데, 마지막에는 고통과 기쁨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가는가? 나는 우리가 왔던 그 “자리”, 하느님의 “자리”로 이끌어간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짧은 시간동안 이 세계에 보내졌는데 -주어진 시간동안의 기쁨과 고통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에 위대한 “예”를 말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예”를 우리마음속에 새겨서 우리를 이곳에 보낸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죽음은 그러므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이 이렇게 돌아가는 순간이 되는 것은, 삶 전체가 우리가 왔고 또 우리를 사랑받는 자라고 부르는 그 분께로 돌아가는 여정이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만큼 “지상이후의” 삶이나 “영원한 삶”에 대해서는 많은 혼란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영원한 생명을 깊게 믿지만, 그것을 단순히 육체적 죽음 이후의 삶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원한 삶은 이곳에 우리가 사는 많은 순간들 속에서 하느님의 성령의 생명을 체험했으며 그래서 죽음을 온전한 생명에 이르는 문으로 기대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영원한 삶은 우리 존재가 시간 속에서 마감될 때 갑작스레 발표되거나 나타나는 깜짝 놀랄 어떤 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살아왔고 존재해 왔던 것의 완전한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이것을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미래에 우리가 무엇이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미래가 나타날 때에 우리가 그분과 비슷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그 분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없는 죽음

이러한 비젼에 따르면, 죽음은 더 이상 마지막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죽음은 최종적인 “예”이며 우리가 가장 완전하게 하느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는 자리로 돌아가는 큰 사건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죽음을 완성의 순간이 아니라 가능한 한 저지해야 할 가장 큰 실패라고 생각하며 두려워한다. 우리 사회가 말하고 주장하는 것은 죽음이 우리의 의지와 갈망을 거역하고 우리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결국은 앗아갈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렇게 인식한다면 삶은 패배한 전투에 거의 다를 바 없고 희망 없는 투쟁이며 절망의 여정이 되어버린다.

나의 비젼과 당신의 비젼은 모두 근본적으로 다르다. 비록 내가 자주 세계로부터 오는 수많은 두려움과 경고에 굴복한다고 해도 지상에서 보내는 수년동안의 삶은 우리의 출생과 죽음의 테두리를 훨씬 더 멀리 넘어가는 더 큰 사건의 부분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나는 이 지상에서의 삶을 시간 속에 주어진 사명으로, 매우 고무적이고 신나는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를 사명에 파견한 그분이 내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으며 이 지상에서 배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나의 “보잘 것 없는 삶”이 내가 가진 전부이며 온 힘을 다하여 그것을 붙들라고 충고하는 이 세계의 시끄러운 소리들에 이끌릴 때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리들을 나의 삶의 뒷전으로 밀어내고 나를 사랑받는 이라고 말해주는 부드럽고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에 나는 두려울 것이 없으며 죽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행위이고, 이 행위가 영원한 사랑이신 하느님의 영원한 품안으로 나를 이끌 것이라고 믿는다.

[원출처] <사랑받는 사람의 삶 Life of the Beloved -세상 속에서 영적인 삶을­>, 헨리 나웬,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1999년 7월호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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