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을 버리고 하느님을 영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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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견을 버리고 하느님을 영접하라
  • 서공석 신부
  • 승인 2018.08.0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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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공석 신부의 [우리 시대의 경전 묵상]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1-6)

 

그림=오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당신 고향 나자렛에서 복음 선포를 하지 못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에 대해 이미 알았습니다. 그분은 목수이고, 그분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압니다. 그들은 그들이 아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분이 병자에게 하시는 일을 보면서도, 그분을 새롭게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선입견에 머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 가진 선입견에 머물지 말고, 이웃 안에 새로움을 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웃이 밉게 보였을 때, 그것을 선입견으로 삼지 말고, 그 사람의 새로운 모습을 보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도 형제에 대한 한순간의 선입견에 머물지 말고, 형제 안에 새로운 모습을 보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죄를 용서하신 것도, 그들이 과거의 선입견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과거로부터 전해진 우리의 신앙언어로 말미암아서도 우리는 선입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말을 하느님은 하늘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지엄한 분이시고, 예수님은 그 지엄하신 분의 막강한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왕이신 하느님의 후계자, 곧 세자(世子)와 같은 분으로 보입니다. 그런 선입견에 우리가 머물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선입견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지고(至高)하고 지엄(至嚴)하신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높고 엄한 사람에 준해서 생긴 말입니다. 그 선입견은 하느님이 우리를 무섭게 심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 선입견은 하느님이 자비하시다, 사랑하신다는 말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런 경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허울 좋은 빈 말에 불과하고, 신앙생활은 신앙인이 선행을 많이 하여 공로를 쌓는 데 있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상품 할인권을 모아서 상품을 저렴하게 구매하듯이, 신앙생활도 전대사(全大赦)와 한대사(限大赦)를 부지런히 얻어 모아서, 지엄하신 하느님의 엄한 벌을 면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원리를 하느님에 대한 선입견으로 삼으면, 하느님은 은혜로운 아버지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터득한 처세(處世)의 원리를 선입견으로 하느님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과 다른 하느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분배정의(分配正義)를 선입견으로 삼으면, 정의로우신 하느님이라는 말은 자비와 사랑을 모르는 하느님이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사람들은 많이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을 하느님에 대한 선입견으로 삼으면, 하느님은 많이 바치는 사람을 돌봐주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왜곡됩니다. 옛날 소설「심청전」에서 효녀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자기 몸을 인당수에 던져, 마련한 공양미 삼백 석을 바쳐야 했습니다. 대가를 치러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것입니다. 심청의 효심에 우리는 감동하면서, 공양미를 바치게 하여 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준, 그 용왕(龍王)의 처사를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관행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당신을 그렇게 부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지만, 그 시대 모든 유대인은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라고 믿었었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던 제자들이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회상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나타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입니다. 제자들이 회상한 예수님은 당신이 가르친 하느님의 생명을 그대로 살고, 실천하신 분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을 이어 받아서 산다고 생각하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신앙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어떤 분인 지를 알아듣는다고 믿습니다. 과거의 인류역사나 종교들이 상상하던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새롭게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서, 하느님을 우리가 새롭게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신앙인들은 유대교에서 얻은 하느님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 그들이 알아들은 하느님의 새로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하느님은 자비롭고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 된 사람은 자비롭고 사랑하는 하느님의 생명을 이어받아 이웃에게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고향 사람들의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이미 알고 있던 바를 선입견으로 삼은 나머지, 그분 안에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움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병고와 실패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벌이라는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이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으셨다는 복음서들의 말은, 병은 하느님이 주신 벌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는 뜻입니다. 벌주는 일은 자비롭고 사랑이신 아버지 하느님이 하실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보아야 하는 새로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불행을 겪은 것은, 우리의 실패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벌이라는 우리의 선입견을 깨는 일이었습니다. 옳은 일이 옳은 일로만 통하지 않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행하신 예수님이 실패자로 생을 마감한 것은, 이 세상은 의인(義人)을 의인으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만이 인간에 대해 올바로 평가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재물과 부귀영화를 인생 성공의 척도(尺度)로 생각하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최종 척도는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분이라, 우리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고, 하느님이 자비하신 분이라, 우리도 자비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알아듣는 새로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실패가 고향 사람들의 선입견에서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선입견을 택하고 예수님의 새로움을 버렸습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불행해도, 고통스러워도 하느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의 선입견을 버리고,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우리도 불행한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있으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맘물림> 2018년 6월 통권 제42호, 신앙인아카데미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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