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중요한 건 선물이야, 탈렌트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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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 중요한 건 선물이야, 탈렌트가 아니라
  • 헨리 나웬
  • 승인 2018.08.08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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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가기-내어주다

우리는 선택되었고, 축복을 받으며 부서지는데 이는 우리자신을 내어주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들만이 선택되고 축복 받으며 부서진 존재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줌으로써 우리는 자신들만을 위하여 선택되고 축복 받으며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하여 사는 가운데에서 삶의 궁극적인 중요성을 발견하는 것임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사진출처=pixabay.com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 때 느껴지는 즐거움을 알고 있다. 당신은 나에게 많은 것을 해 주었고, 나는 당신이 나에게 해 준 것에 대하여 늘 감사를 느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감사하는 또 한가지 이유는 나에게 많은 것을 해 주면서 당신이 너무나 행복해 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주저하거나 마지못해 주는 선물보다 기꺼이 주는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일이다. 당신은 아기가 웃는 것을 보는 엄마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본적이 있는가? 아기의 웃음은 자신의 아기가 행복한 것을 보고 감사하는 엄마에게 선물이 된다!

이는 얼마나 놀라운 신비인가! 우리의 가장 큰 성취감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자신을 줄 때 느껴진다. 비록 사람들이 받기 위하여 주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자주 있지만, 나는 인정받고 보상을 받으며 칭찬 받기를 원하는 우리의 모든 욕구 그 너머에 주고 싶어하는 단순하고도 순수한 갈망이 있다고 믿는다.

단순히 줄 수 있다는 기쁨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께 드릴 선물을 찾느라고 네델란드의 가게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냈던 때를 기억한다. 우리의 인간성은 주는 가운데에서 온전하게 피어난다. 웃음, 악수, 키스, 포옹, 사랑의 말, 선물, 삶의 일부… 삶의 전부 등 줄 수 있는 것들을 줄 때에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나는 이 사실을 당신과 로빈이 결혼하던 날 가장 강렬하게 깨달았다.

첫 번째 결혼이 실패한데 대한 슬픔이 끝나고 마침내 당신은 삶이 줌으로써 온전하게 완성된다는 진실을 또다시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결혼식이 있던 전날 오후에 당신은 나를 공항에서 만나 당신의 어머니, 여동생과 남편 그리고 조카들과 함께 저녁을 들게 해 주었고 하루밤을 호텔에서 묵도록 데려다 주었다. 그날은 햇빛이 눈부신 5월의 주말이었고 결혼식을 하루 앞둔 당신은 약간 흥분해 있었지만, 평화스럽고 또한 기쁨에 넘쳐 있었다. 당신은 로빈과의 삶에 대한 기대로 가득했다.

로빈이 당신에게 스스로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주었고 결혼생활이 잘 될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의심을 없애주었다고 당신은 말했다. 또한 당신이 사회가 요구하는 전통적인 틀에 맞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의 탈렌트를 활용할 가장 최상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로빈은 격려해주고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로빈이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했으며 당신이 돈을 벌거나 성취하는 것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또한 당신 역시 로빈한테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변호사인 로빈이 가난하고 집없는 사람들에게 깊히 투신하고 있으며, 우리세계에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로빈의 큰 탈렌트와 생기 그리고 유머에 대해서도 감탄했다. 그러나 로빈이 스스로 마련할 수 없었던 집, 안전과 어떤 결실의 자리를 당신이 주고 있었다는 사실도 당신은 알고 있었다. 로빈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너무나 보기에 아름다웠고, 그같은 사랑을 가까이 볼 수 있도록 초대된 나는 너무나 많은 혜택을 받고 있음을 느꼈다.

로빈과의 결혼이 당신에게는 두 번째 결혼이었으므로, 또한 이혼의 긴 외로움을 겪고 난 후이기 때문에, 어떤 좋은 일도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로빈과의 결혼이 매일매일 새롭게 이루어져야 하며 특히 둘 사이에 거리감을 느끼는 날에는 새로운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당신은 알았다.

나는 또한 당신과 로빈이 서로에게 약속한 바를 살아나갈 때 가족과 친지들의 사랑이 당신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가를 깊게 깨달았다. 결혼식에 초대된 나는 당신이 로빈에게 충실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았으며 나 역시 그것이 즐거운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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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어지기 위하여 쪼개져야 하는 것처럼

고도로 경쟁적이고 탐욕스러운 세계 속에서 우리는 주는 기쁨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마치 행복이란 가지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가진 것 때문에 참으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참다운 기쁨, 행복 그리고 내적인 평화는 우리 자신을 다른 이들에게 줌으로써 얻어지다. 행복한 삶이란 다른 이들을 위한 삶이다. 하지만 이 진리는 보통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부서짐과 대면할 때에 발견된다.

지난 수년간 우리들의 우정이 자라온 과정에 대해 조금 더 성찰하면서, 나는 우리들의 부서짐과 서로에게 내어주는 우리의 능력사이에 어떤 신비스러운 고리를 발견한다. 우리들은 둘 다 극한적인 내적 고통의 시기를 겪었다. 이 고통의 기간동안에 우리는 우리의 삶들이 정지되었으며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고 자주 느꼈다. 그러나 이제, 수년이 흐른 후 그 고통의 기간은 우리들로 하여금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게 해 준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우리들의 부서짐은 서로의 삶을 더 깊게 나누고 각자에게 희망을 주는 더 깊은 길로 우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빵이 나누어지기 위하여 쪼개져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에게 고통을 주어야 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더 주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깨어진 유리가 빛날 수는 있지만, 바보만이 유리를 빛나게 하기 위해 그것을 깨뜨릴 것이다. 죽어야 하는 존재에게 부서짐은 실존의 현실이지만,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축복이라고 여길 때, 우리는 우리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줄 수 있는지 새롭게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부서짐 속에서 서로를 주려는 우리의 갈망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식탁, 음식, 물, 말들, 이야기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삶을 서로에게 주려는 갈망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주고 있는 행위가 아닐까? 나는 “함께 빵을 쪼개며”라는 표현을 무척 좋아하는데 이때에 쪼개고 내어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하나로 일치되기 때문이다.

함께 먹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나 연약한 존재가 된다. 식탁에서 우리는 어떤 종류의 무기도 소지할 수가 없다.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마시는 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일치와 평화 속에서 함께 살도록 초대한다. 갈등이 있을 때에 이 사실은 매우 분명하게 보여진다. 갈등의 때에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참으로 위협적인 사건이 될 수 있으며 그 때의 식사는 그날의 가장 두려운 순간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식사 때의 고통스러운 침묵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이 침묵의 순간은 친밀하게 먹고 마시는 순간과 전적인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식탁에 둘러 앉아있는 사람들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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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먹거리가 되려는 우리의 더 깊은 갈망

다른 한편으로 참다운 평화와 기쁨 속에서 함께 나누는 식사는 인생에 있어 가장 훌륭한 순간들이 된다.

함께 하는 식사가 서로에게 먹거리가 되려는 우리의 더 깊은 갈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그건 정말로 유익하고 우리를 살찌우는 대화였다. 매우 신선한 순간이었어.” 나는 우리의 가장 깊고도 인간적인 갈망이 신체적, 감성적 그리고 영적인 성장의 원천으로 서로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마의 가슴에 안겨있는 아기의 모습은 인간적 사랑을 가장 감동 깊게 보여주는 모습들 중의 하나이지 않는가?

“맛보는 것”은 친밀함의 체험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이 아닐까? 연인들은 가장 황홀한 순간 속에서 그들의 사랑을 함께 먹고 마시려는 갈망으로 경험하지 않는가? 사랑받는 존재들로서 우리들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세계를 위하여 빵이 되는데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자신을 서로 나누려는 가장 깊은 갈망을 가장 친밀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우리의 가장 깊은 성취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내어줌에 있다면, 주는 것보다 가지는 것에 대하여 더 많이 말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이러한 내어줌의 비젼을 어떻게 매일매일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삶 속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과 죽음 속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탈렌트와 선물 사이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내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끊임없이 잊어버리고 있다. 서로에게 내어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게 될 때에 즉시 떠오르는 것은 우리들의 고유한 탈렌트들이다. 즉, 특별한 일들을 특별하게 잘 하는 능력들이다. 당신과 나는 이것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를 했었다. “우리의 고유한 탈렌트는 무엇인가?” 우리는 묻곤 했다. 그러나 이렇게 탈렌트에 집중하여 말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탈렌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기 보다 어떤 존재인가라는 것임을 잊어버리는 성향을 갖게 된다.

진정한 질문은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가?”이다. 물론 우리가 이웃을 위하여 무엇인가 고쳐주고, 친구에게 도움이 되는 충고를 하며, 동료에게 지혜로운 의견을 제시하거나 환자를 치유하고 본당인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선물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을 통하여 빛나고 있는 우리의 삶 그 자체라는 선물인 것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나는 점점 더 내가 이웃에게 줄 가장 큰 선물은 삶에서 느끼는 즐거움, 나의 내적 평화와 침묵 그리고 고독, 나 자신의 편안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내가 스스로에게 “나를 가장 많이 도와준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나는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나와 기꺼이 나누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그러므로 탈렌트와 선물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의 탈렌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물들이다. 우리는 아주 적은 탈렌트 밖에 가지고 있지 않지만, 많은 선물들을 갖고 있다. 우리의 선물들은 우리자신의 인간성을 표현하는 수많은 방식들이다. 이 선물들은 우리자신의 부분들이다: 그것은 우정, 친절함, 인내, 기쁨, 평화, 용서, 부드러움, 사랑, 희망, 신뢰 그리고 기타 많은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이 이웃에게 나누어야 할 참다운 선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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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치유하는 선물

어떻든지간에 나는 이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특히 이러한 선물들이 지니고 있는 엄청난 치유의 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면서 그것을 깨닫게 되었었다. 그러나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들의 공동체에 살게 되면서 나는 이 단순한 진리를 다시 발견하였다. 있다면 이들 중의 아주 소수가, 소위 자랑할 수 있는 탈렌트를 갖고 있다. 돈을 벌거나 개방시장에서 경쟁하고 또 상을 탈 수 있는 그래서 우리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은 이 공동체에 거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선물은 얼마나 눈이 부신가?

깨어진 가족 관계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는 빌은 내가 거의 경험할 수 없었던 우정의 선물을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들로 인해 내가 참을 수 없고 불안하게 될 때에도 그는 항상 충실하게 남아있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을 계속해서 지지해 준다.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린다는 사람들을 환영하는 특별한 선물을 지니고 있다. 우리 공동체에 머물렀던 많은 사람들은 린다가 그들에게 집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고 회상한다.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말할 수도 걸을 수도 먹을 수도 없는 아담, 끊임없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담은 그를 보살피고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안겨주는 놀라운 선물을 갖고 있다. 라르슈 공동체에 더 오래 살면 살수록 나는 장애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들 안의 참다운 선물들이 자주 탈렌트 밑에 숨겨져 묻혀있음을 더 깊히 깨닫게 된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너무나 분명히 드러나는 부서짐은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선물들을 자유롭게 주저함 없이 내놓도록 해주었다.

이전보다 더 확실하게 나는 우리들이 서로에게 삶을 내어주도록 초대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렇게 내어줌으로써 우리가 참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있다.

죽음이 마지막 선물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삶뿐만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도 서로에게 자신들을 내어 주도록 초대받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로서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가장 큰 선물로 만들도록 불리웠다. 내어주기 위하여 우리가 부서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마지막 부서짐, 죽음은 자신을 마지막 선물로 내어주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사실이 될 수 있는가?

죽음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할 가장 큰 적인데 말이다. 죽어가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생각해 보거나 말해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확신할 수 있는 몇가지 안되는 사실들 중의 하나는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하도록 얼마나 끈질기게 우리들을 방해하는지 나는 끊임없이 놀라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딸로서 우리들은 죽어가는 것이 사랑받는 존재가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체험에 이르는 길임을 인정해야 한다. 선택받고 축복 받으며 내어주기 위하여 부서진 존재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것은 순수한 선물이 되는 길이다.

당신과 내가 죽음에 대하여 그다지 많은 얘기를 나눈 것 같지는 않다. 죽음은 먼 훗날의 일이고 비현실적인 것 같다… 우리보다는 남에게 더 해당되는 것 같다. 폭력, 전쟁, 기아 그리고 무관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비극의 현실을 매일같이 언론이 우리앞에 들이대도, 가족이나 친구들이 떠났다는 소식을 정기적으로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사회에서 친구나 가족이 죽어도 우리는 슬퍼할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한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만든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절대로 우리의 죽음과 마주치지 못하게 되고 마침내 죽음이 앞에 닥쳤을 때 우리는 가능한 한 죽음을 부정하고 당황하게 된다. 그리하여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심지어 분노까지 터뜨린다.

그러나 사랑받는 존재로서 나는 삶이란 내어주는 마지막 행위인 죽음을 준비하는 것임을 믿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 살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죽도록 초대받고 있다. 어떻게 이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우리가 사랑하고 또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지난 수개월동안 세상을 떠나간 나의 친한 친구 세 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데이비드 오슬러, 머레이 맥도널, 그리고 폴린 바니에이다. 나는 그들을 그리워한다. 그들의 죽음은 나에게 고통스러운 상실이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이 더 이상 가족이나 친지들과 집에 있지 못한다는 사실에 나는 쓰라린 고통을 느낀다. 나는 더 이상 그들에게 전화를 걸지도 못하고, 방문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거나 얼굴을 보지 못한다. 나의 슬픔은 엄청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죽음이 상실 그 이상임을 깊게 믿고 있다. 그들의 죽음 역시 선물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또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은 새롭고 더 철저한 친교, 새로운 친밀함, 서로에게 속하는 새로운 소속감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참으로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면, 죽음은 사랑의 결속을 더 깊게 더 강하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다. 예수가 떠난 후에야 제자들은 예수가 말했던 것을 더 진실 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랑으로 죽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다 사실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죽은 후에야 비로서 우리의 영은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데이비드, 머레이 그리고 폴린은 모두 아름다운 사람들이었으나, 그들 역시 수많은 요구와 상처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 받았다. 이제 세상을 떠난 후, 그들의 영을 붙잡고 있었던 이러한 요구와 상처들은 그들 자신을 온통 우리에게 내어주는 것을 더 이상 방해할 수 없다. 이제 그들은 우리에게 그들의 영을 보내줄 수 있으며, 우리는 그들과 새로운 일치 안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준비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분노와 회한 속에서 죽는 사람들, 죽음을 완강하게 거부했던 사람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죽음은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심지어 죄책감을 준다. 그런 죽음들은 절대로 선물이 되지 못한다. 그런 죽음은 보내 줄 것이 거의 없다. 어둠의 세력에 의해 영이 소멸되는 것이다.

그렇다, 좋은 죽음은 반드시 있다. 우리 자신들은 우리가 죽어가는 방식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삶에 왜곡되게 집착하여 죽음이 실패에 불과하도록 만들거나 자유롭게 삶을 놓아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의 원천이 되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선택이며 매일같이 우리는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죽음이 우리의 마지막 실패가 되어서는 안된다. 삶의 투쟁에서 마지막 패배,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죽음이 받아들여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깊은 인간적 갈망이 참으로 이웃에게 우리자신을 주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마지막 선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자유로운 선물이 될 때 죽음이 얼마나 풍요로운 가를 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데이비드는 죽기 전 수주일, 수개월동안 부인과 아이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했다. 그는 그들의 관계에 있었던 고통을 인정할 수 있었으며 사랑 역시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라고 말할 수 있었다. 죽기 직전; 더 이상 말할 수 없었을 때 그는 팔을 뻗쳐 부인인 앤과 아이들, 수잔 크리스 그리고 헤더를 포옹했다. 그리고 나서 삶을 놓았고 죽었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죽음을 선물로 변화시켰다. 몰론 그의 죽음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깊은 슬픔이었으나, 그들에게 점점 더 새로운 영적 에너지의 원천이 되어가고 있다.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던 메레이의 경우, 마지막 5년 동안은 죽음에 대한 준비의 기간이었다. 그는 부인인 페기와 아홉 아이들에게 그리고 가족들에게 점점 더 밀착되었으며 그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을 끌어안았다. 또한 그가 투쟁했던 모든 것들과 화해하는 용기를 자신 속에서 발견하였다. 나에게는 엄청난 열림, 정신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나의 삶에 대한 성실한 관심 그리고 나의 저술에 대한 관대한 후원으로 우리 사이에 깊은 우정의 고리를 만들어 놓았다.

나는 그가 없다는 사실을 거의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비록 그의 죽음이 너무나 충격이었지만, 그것은 점차 사랑의 축제가 되었다. 그가 떠난 후 일년만에 온 가족이 다시 모였을 때,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머레이가 얼마나 많은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희망을 주었는지를 회상하였다.

폴린 바니에는 93살때에 세상을 떠났다. 카나다의 전 제독의 부인으로서 폴린은 이 세계의 가장 강력한 사람들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남편이 죽은 후 폴린은 아들인 쟝 바니에의 약하고 무력한 이들의 공동체에 합류했으며 이후 많은 사람들의 할머니, 어머니, 친구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집에 살았던 때에 그는 나에게 보살핌과 지혜를 마음껏 나누어주었다. 라르슈에 오게 되면서 나는 늘 이 사랑하는 “어머니”를 연상하곤 한다. 폴린이 보고 싶지만, 나는 그의 삶의 열매들이 나의 삶에서 더욱 더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며 그와 가까웠던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도 그렇게 보여질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유머와 기도로 가득찬 그의 영이 언제나 우리를 인도할 것이라고 믿는다.

더 크게 열매 맺는 죽음

사랑받는 이들의 죽음은 수많은 삶들 속에서 열매를 맺는다. 당신과 나는 우리의 짧은 삶이 육체적, 시공적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선택을 해야 하며 우리를 기억할 사람들에게 기쁨, 평화 그리고 생명을 가져다 줄 영을 우리가 갖고 있다고 굳게 믿어야 하는 것이다.

앗씨시의 프란치스꼬는 1226년에 죽었지만 아직도 얼마나 살아있는가! 그의 죽음은 참다운 선물이었으며 오늘날, 거의 8세기가 지난 후에도 끊임없이 프란치스꼬회 안팎에서 수많은 형제자매들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엄청난 에너지와 생명력으로! 그는 죽었으나, 결코 죽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전 세계에서 새로운 열매를 계속 맺고 있다. 그의 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내려오고 있다. 그 어떤 때보다 나는 죽음이 참으로 우리 삶의 마지막 선물로서 선택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

당신과 나에게는 살 날이 많이 남지 않았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20, 30, 40 혹은 50년의 세월은 매우 빨리 지나갈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할 때 놀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삶을 살려는 우리의 가장 큰 갈망이 우리가 죽는 방식을 통하여 성취될 수 있다는 기쁜 기대감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자유롭게 기꺼이 우리의 생명을(삶을) 내려놓는 죽음일 때에 우리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발견할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내놓음으로써 더 많아진다

우리는 삶뿐만 아니라 죽음 속에서도 선택되고 축복 받으며 내어주기 위하여 부서진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로서 우리들은 서로를 위한 빵, 세상을 위한 빵이 되도록 요청받고 있다. 이러한 비젼은 빵을 늘리는 엘리사 이야기에 새로운 차원을 주고 있다. 엘리사는 20개의 보리빵과 아직 껍질을 벗기지 않은 새 알곡을 갖고 온 하인에게 말했다: “그것을 군중들에게 주어 먹게 하시오.” 하인이 “어떻게 백 명의 사람들에게 이것으로 요기가 되겠소?”하고 항의했을 때, 엘리사는 고집을 피운다: “군중들에게 주시오.” 그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들은 다 먹고도 빵이 남았다.

이 이야기는 바로 영적인 삶을 사실대로 그리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효율성, 지배 그리고 성공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작고 보잘 것 없는 하인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선택하였고, 축복받는 존재들로서 세상에 보내셨으며 우리를 고통에 넘기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우리 역시 우리의 작은 삶들이 늘어날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과장되고 자기확대처럼 들리지 몰라도 실제로 자신의 결실에 대한 신뢰는 겸손한 영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자신에게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는 것에 감사를 외쳤던 것은 한나의 겸손한 영이었다: “나의 영은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 분은 당신의 비천한 여종을 돌보셨다.- 그리고 나에게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 이 날로부터 모든 세대가 나를 축복받은 자로 부를 것이다.”

우리의 작은 삶의 결실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인정하고 그 삶을 살아가게 되면 우리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선다. 가장 위대한 신앙행위 중의 하나는 우리가 이 지상에서 사는 짧은 기간 동안을 매우 비옥한 땅에 작은 씨앗 하나를 심는 것과 같다고 믿는 것이다. 이 작은 씨앗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오직 죽는 것만 보고 느끼지만, 우리자신이 추수하지 않더라도 그 수확은 매우 풍요로운 것이다.

내놓음으로써 더 많아진다는 것을 참으로 믿을 수 있을 때에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많이 달라지겠는가! 우리의 모든 작은 믿음의 행위들, 모든 사랑의 행위, 모든 용서의 말들, 모든 작은 기쁨과 평화들이 그것을 받을 사람들이 있는 한 끝없이 배가 될 것이며… 심지어 -남는 것도 있으리라고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다른 삶이 되겠는가!

로빈에 대한 당신의 사랑, 친구들에 대한 당신의 친절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당신의 너그러움이 작은 겨자씨들이며, 언젠가 많은 새들이 그들의 보금자리를 지을 수 있는 튼튼한 나무가 되리라고 깊은 확신을 가지는 당신을 상상해 보라! 당신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당신의 웃음과 악수, 당신의 포옹과 키스가 사랑과 평화의 세계공동체를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믿는 당신을 상상해 보라!

당신이 행하는 모든 작은 사랑의 움직임이 고요한 연못에 던져지는 작은 돌이 일으키는 물결처럼 끊임없이 새롭고도 더 넓은 원들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는 당신을 생각해 보라! 생각해 보라, 상상해 보라… 당신이 절망하고 분노하고 후회하며 복수심에 괴로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미워하고 파괴하며 죽을 수 있는가? 당신의 짧은 지상 삶의 의미에 대하여 실망할 수 있겠는가?

 사랑의 영은 원하는 대로 날아

우리 작은 사람들이 선택되고 축복 받으며 줌으로써 더욱 늘어날 빵이 되도록 부서진 존재들임을 참으로 깨닫는다면, 당신과 나는 기쁨으로 춤을 출 것이다. 당신과 나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우리의 존재 전체를 이웃을 위한 선물로 만들려는 갈망의 정점으로서 죽음을 생각하며 그것을 향해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런 마음가짐과 생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영적 삶의 여정에서 아직도 우리가 초보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가 받은 부르심의 온전한 진실을 아직껏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리의 모든 작은 깨달음에 대하여 감사하자. 그리고 늘, 언제나 보아야 할 것이 더 많이 있음을 믿자.

수년 후에 우리들은 땅에 묻히거나 화장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있겠지만,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곳에 살 것이며 아마도 우리들에 대하여 거의 아무 것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그리고 당신도 그러리라고 믿으며 바라건대, 이 세상에서의 짧고도 쉽사리 잊혀지는 우리의 삶의 여정이 모든 시대와 모든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계속 생명을 주기를 희망한다. 우리의 죽어갈 육체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랑의 영은 원하는 대로 날아갈 것이며,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 그 영의 오고 감을 들을 수 있다하더라도 마음대로 불어갈 것이다.

[원출처] <사랑받는 사람의 삶 Life of the Beloved -세상 속에서 영적인 삶을­>, 헨리 나웬,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1999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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