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의 발바닥 민주주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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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의 발바닥 민주주의를 위하여
  • 유대칠
  • 승인 2018.07.23 12: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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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31]

살 수 없는 집은 집이 아니다. 이미 본질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려한 집이라도 살 수 없다면 집으로 가치가 없다. 주인이 종노릇을 해야 하는 곳이라면 주인은 주인이 아니다. 그냥 주인이란 별명을 가진 종일뿐이다. 주인은 당연히 주인이어야 한다. 당당히 그곳의 주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상식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을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그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 국민이 주인이란 말이다. 일부 귀족이 주인인 것도 아니고, 세습하는 왕족이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아니다. 너무나 흔하디흔한 일상의 우리들이 주인이란 말이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그런데 국민이 주인이 아닌 민주주의,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민주주의,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살 수 없는 집은 집이 아니고, 먹을 수 없는 음식은 음식이 아니듯이 말이다.

임방현의 한국식 민주주의

‘한국식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임방현은 서구 민주주의는 선구적 가치라고 한다.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이 모든 것들이 서구 민주주의의 모습이지만, 한국이란 상황에서 이 모든 것들은 남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한다. 토양이 다르다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국을 포함한 후진사회의 경우 민주주의 담당층의 결여를 운위케 한다.”

임방현은 청와대 대변인을 맡으면서 유신정권의 이데올로그가 됐다. 홍윤기에 의하면, ‘유신(維新)’이라는 용어는 대통령 특별보좌관이던 박종홍과 임방현이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서 가져온 표현이라고 한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역설하는 임방현의 1973년 책 서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확실히 10월 유신을 계기로 우리 사회 도처에는 조국의 좌표를 직시하고 정신의 국적(國籍)을 되찾아 근면성실하게 무실역행하는 기풍이 크게 진작되고 있음이 사실이다”(임방현의 ‘근대화와 지식인 : 한국적 민주주의의 이념과 실천’). 임방현의 ‘근대화 인텔리겐치아론’은 이렇게 유신의 합리화로 귀결됐다. (사진/글 출처=주간동아)

쉽게 이야기하자. 한국과 같은 후진사회는 민주주의를 담당해야하는 계층이 결여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서구와 같은 선진사회의 이상적이고 선구적인 민주주의를 따라할 수 없단 말이다. 그러면서 임방현이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 유명한 ‘자유를 제한하는 민주주의’, 바로 ‘한국식 민주주의’다.

제한된 자유란 무엇인가? 감옥 작은 공간에서의 자유를 말하는 것인가? 주인으로 존재해야하는 국민이 구속의 공간 속에서 자유를 누려야 한다면, 그것도 무서운 감시와 처벌 속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인가? 스스로의 국민, 이 민중을 후진한 존재로 여기는 이런 자학적인 사고 속에서 주체성은 무엇인가?

주체성이란 것이 과거 제국주의 시대, 잔인한 폭력의 주인으로 존재한 서구와 일본의 주체성, 그 주체성의 타자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차피 부족한 존재니 식민지배가 필요하다는 것과 비슷하게 어차피 결핍된 존재니 그대로의 민주주의가 아닌 자유 없는 민주주의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임방현이 누구인가? 딸 박근혜에게 윤창중이란 제법 유명한 대변인이 있었다면, 아버지 박정희에겐 임방현이란 대변인이 있었다. 청와대 대변인을 걸쳐 암울한 1980년대 전두환 독재 정권 아래에서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으로 임방현은 서울대 철학과 교수 출신으로 박정희 시대를 철학으로 미화한 박종홍과 함께 중국의 고전 <시경>과 <서경>에서 그 유명한 ‘유신’(維新)이란 표현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 표현을 제안한다.

박정희 시대 ‘유신’이 무엇인가? 국가 위기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듣기 좋은 명분 아래, 독재자인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강화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한다는 내용이다. 한국식 민주주의를 주장한 임방현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1989년 북한을 방문 구속기소된 문익환 목사가 첫 공판을 받기 위해 포승에 묶인 채 교도관들의 호송을 받으며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문익환의 발바닥 철학

박종홍과 임방현이 한국식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을 때, 또 다른 곳에선 ‘발바닥 철학’을 이야기하는 이가 있었다.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자기 가진 지식을 활용하여 그 기득권을 유지하고 부조리를 미화하는 동안에 누군가는 ‘발바닥 철학’을 이야기했다. 바로 ‘늦봄 문익환’이다.

문익환은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의 의미를 풀이한다. 자기 욕심을 비우고 자기 밖 세상을 보면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두를 볼 수 있다. 발바닥은 욕심이 없다. 남을 이기려는 욕심이 없다. 머리와 얼굴과 같이 치장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 앞에 드러나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불만이 없다.

우리가 너무나 편하게 걷는 한걸음 한걸음도 발바닥 없이는 불가능하다. 작은 상처라고 나면 걷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걷게 하기 위해 발바닥은 기꺼이 고통을 이겨낸다. 그것이 발바닥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아 그런지 아래에 있어서만 그런지 그 고마움이 무시되곤 한다.

우리 몸을 지탱하게 하는 그 토대이면서 스스로 드러나지 않는 이 발바닥, 그러면서도 은근히 무시 받는 이 발바닥을 보며 문익환은 민중을 떠올린다. 스스로 나서려는 욕심 없이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두를 위해 존재하고 살아가는 그 발바닥을 보면서 깨우친 지혜를 두고 ‘발바닥 철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만이 우월하고 대단하고 다른 이들은 후진적이라는 생각, 나만의 권리와 권력 그리고 소유를 위하여 다른 이들의 기본권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생각이 잘못 정치에 적용되면 한국식 민주주의, 즉 기본권이 무시당하는 민주주의, 거짓 민주주의가 된다. 발바닥의 아픔은 무시되고 오직 드러나 보이는 얼굴과 머리만을 귀하다 한다면, 발바닥이 썩어 죽어감에도 그 아픔에 공감하지 않고 가리고 핍박하고 후진하다며 복종만을 강요한다면, 그곳은 정말 건강한 공간일까? 문익환은 발바닥 아픈 것이 해결이 되어야 머리 아픈 것이 해결된다 했다. 땅에서의 행복이 하늘의 행복이 되고 땅에서의 눈물이 하늘에서도 눈물이 된다 그는 믿었다. 발바닥의 행복이 곧 머리의 행복이 되는 그런 사회가 정말 건강한 사회다.

요즘 ‘친위 쿠테타’ 이야기가 있다. 국민을 그저 통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며, 한국식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이들이라면, 어쩌면 그 잔인하고 반-민주주의적인 생각이 상상이라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것은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정말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 암수술을 하듯 구태의 모습을 제거하고 그 동안 그렇게 무시하고 착취한 발바닥의 아픔을 돌아보아야할 때다.

문익환이 떠오른다. 발바닥 철학. 문익환 스스로 말하기를 참된 철학은 학교를 가지 않은 이들도 글자 하나 모르는 이들도 알아야 한다 했다. 그 알아야 하는 철학, 그 철학의 시작은 어쩌면 바로 발바닥 철학,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만이 홀로 존재하려는 욕심 없이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두를 보며 존재해야 한다’는 바로 그 철학 말이다.

‘친위 쿠테타’니 ‘한국식 민주주의’니 이런 말에 오가는 사이, 문익환의 발바닥 철학을 생각해 본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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