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부서진 성작이 이렇게 눈부시게 빛날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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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 부서진 성작이 이렇게 눈부시게 빛날 수 있다니!
  • 헨리 나웬
  • 승인 2018.07.2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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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가기-부서지다

부서짐에 대하여 이야기할 순간이 왔다. 당신은 부서진 사람이며 나 역시 그렇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 혹은 간접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부서진 사람들이다.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부서짐은 너무나 잘 보이고 만질 수 있으며 너무나 구체적이고 확실해서 이 부서짐 이외에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써야 할 것이 별로 없다는 느낌을 쉽게 가진다.

우리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얘깃거리는 우리들의 부서짐에 대해서였다. 내가 글을 쓰는 까닭은 나의 외로움, 고립감, 두려움 그리고 전반적으로 내가 느끼고 있는 불안정감을 다루기 위한 한 가지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로 토론이 옮겨가자, 당신은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소설을 쓸만한 충분한 시간과 돈이 없다는데 대한 두려움 그리고 당신의 삶에 관한 여러 가지 일반적인 혼란스러움 등에 대하여 말했다. 첫 번 만남후 수년이 흐르면서 우리들은 서로의 고통과 아픔에 대하여 점점 더 열게 되었다. 실상, 내면의 갈등들을 나누면서 우리의 우정은 더욱 더 깊어갔다.

당신은 힘든 결별과 이혼을 겪고 살아야 했으며 나는 오랜 기간의 침울함 속에서 지내야 했다. 당신은 일을 하며 많은 실망을 겪었으며, 삶에서 진정한 당신의 길이 무엇인지 찾아 헤매었다. 반면 나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하는 수많은 요구들에 압도되어왔으며 그 결과 소진되고 절망하게 되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하느님의 아들딸도 부서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시 만날 때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 속에 자리잡고 있는 부서짐들을 더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은 전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쉽게 그들의 부서짐에 초점을 맞추곤 한다. 가장 많이 연주되는 음악곡들, 가장 유명한 그림들과 조각들 그리고 가장 잘 읽히는 책들은 이 부서짐에 대한 인간의 깨달음을 직접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깨달음은 우리의 실존으로부터 절대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아무도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부서짐을 가장 철저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분명히 선택되고 축복 받았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예언자들은 모두 부서진 삶을 살았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인 우리들 역시 이 부서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부서짐에 대하여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많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아마도 가장 단순한 시작은 이 부서짐이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어떤 것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우리의 고통과 아픔들은 단순히 우리의 삶을 귀찮게 괴롭히는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 고통들은 우리 자신의 고유함과 가장 내밀한 개성을 깨닫게 해주는 것들이다. 내가 부서지는 그 모습이 나 자신의 어떤 고유함을 말해 주고 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부서지는 모습은 당신자신에 대한 고유함을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기꺼이 당신 자신의 깊은 고통을 나에게 나눌 때 그것은 매우 특권 받은 느낌을 가지게 하며, 또 내가 나 자신의 약한 부분을 당신에게 드러낼 때에 그것은 당신에 대한 나의 신뢰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들의 부서짐은 항상 이처럼 매우 개인적이고 인격적이며 친밀하고 고유한 것으로 살아지고 체험된다. 나는 모든 인간존재가 각각 고유하게 고통을 겪는다고 깊게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비교도 할 수 없다. 우리는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으나 마지막 분석에서 보면 당신의 고통과 나의 고통은 너무나 개인적인 것이므로 그것을 비교하는 것은 거의 어떤 위로나 편안함을 가져다 줄 수 없다. 실제로 나는 나와 비슷한 고통이나 더 괴로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고 말해주려는 사람보다 나의 고통 속에서 내가 얼마나 외로울까하고 인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더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부서짐은 참으로 우리각각의 것일 따름이다. 그 어떤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니다. 우리의 부서짐은 우리의 선택받음과 축복 받음처럼 고유한 것이다. 우리들의 부서진 방식은 우리가 받아들여지고 축복 받는 그 방식처럼 우리의 개성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렇다, 두렵게 들릴지 몰라도, 사랑받는 존재들인 우리는 우리자신의 선택받음과 축복 받음이 각각 고유한 것이라고 주장해야 하는 것만큼 우리자신의 부서짐을 고유한 것이라고 주장해야 하는 초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한다는 느낌들

지금 나는 우리들의 부서짐의 체험에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미 말했듯이 이것은 매우 개인적인 체험이며 당신과 내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보통 그것은 내적인 부서짐의 체험-마음의 부서짐에 관한 체험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신체적 정신적 장애들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엄청난 경제적 가난, 기본적인 삶의 필요가 결핍된 경우들이 많지만 내가 매일매일 깨닫고 있는 고통은 부서진 마음의 고통이다.

끊임없이 나는 남편들과 아내들, 부모와 자식들, 연인들, 친구들과 동료들 사이의 부서진 관계로부터 오는 끝없는 고통들을 보고 있다. 서구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보이는 아픔은 거부되고 무시되며 기만당하고 홀로 내버려진다는 느낌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는 심각한 장애들을 지닌 남성 여성들이 살고 있는데, 가장 큰 고통은 장애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따라오는 쓸모 없고 가치가 없으며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한다는 느낌들인 것이다.

걷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며 혼자 먹지 못하는 장애를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특별한 가치가 되지 못한다는 장애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우리 인간 존재들은 엄청난 인내를 갖고 어마어마한 결핍들을 참을 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자신들을 느끼게 될 때에는 삶의 끈을 놓는 것이 그렇게 빠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직감적으로 삶의 기쁨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오며 삶의 고통은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할 때에 오는 것임을 알고 있다.

성, 친밀함에 대한 욕구

우리의 부서짐은 특히 많은 경우 성(性)에 관해서 고통스럽게 체험되고 있다. 나의 갈등과 내 친구의 갈등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있어 성의 문제가 얼마나 중심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우리의 성은 친교를 원하는 우리들의 깊은 갈망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육체는 만져지고 포옹되며 안전하게 함께 있기를 바라는데 이는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갈망에 속하는 것이며 하나되고자 하는 우리들의 추구를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표징들이다. 바로 이러한 일치에 대한 갈망으로 인하여 우리는 수많은 갈등과 대립을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사회는 너무나 조각났으며, 가정 역시 육체적 정서적 분리로 인해 부서져 내렸고 진정한 우정도 드물고, 친밀함은 너무나 어정쩡한 상태이며 많은 경우 실용적인 가치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그리하여 참으로 안전하다고 느낄만한 자리가 거의 없는 것이다. 나 자신을 들여다 볼 때에도 육체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으며 보통은 얼마나 경계를 늦추지 않고 또한 집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한 감을 느낄 때가 얼마나 적은지 알아볼 수 있다.

 

사진출처=pixabay.com

안전한 자리는 없다 

토론토 교외의 우쭐대는 거대한 저택들, 더 효율적인 소비를 위해 세워진 추한 쇼핑센타들 그리고 매우 분리적인 방식으로 안락과 휴식을 약속하는 유혹의 전광판들-이 모든 것들 때문에 숲은 황폐되고 강은 고갈되며 사슴과 토끼와 새들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나는 나의 몸이 치유의 손길과 포용을 소리쳐 원하고 있음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

우리주변의 모든 것들이 우리의 감각을 지나치게 자극하고 지나치게 확장시킬 때, 우리의 깊은 갈망을 채우기 위해 주어지는 것들이 보통은 우리를 더 고립시키는 역할 밖에 하지 못할 때, 우리가 광적인 환상들과 무절제의 꿈들 그리고 혼란스러운 느낌과 생각들에 전염되고 포로가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자리가 조각나고 상업화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전 존재-육체, 정신 그리고 마음-가 안전하게 보호받는다고 느낄 수 있는 자리를 발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뉴욕이나 토론토의 길, 세계의 그 어느곳에 있든지 간에 우리의 중심과 체험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가 너무나 어려우며 우리자신의 깊은 내부에서도 세계의 고민과 고통을 발견하는 것이다.

에이즈, 외로움 속에 살기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울부짖음

에이즈 전염병은 아마도 이같은 현대의 부서짐을 말해주는 증후들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에이즈에서 사랑과 죽음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서로에게 매달려 있다. 친밀함과 일치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무릅쓰고 있다. 에이즈를 보면 우리 사회의 거대하고도 텅 빈 공간을 통하여 울려나오는 울부짖음처럼 느껴진다. 지속되는 외로움 속에 살기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울부짖음이다.

에이즈 환자들은 죽어가고 친구들이 사랑과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모아 그들을 돕는 자발적인 관대함을 보면서 나는 이 공포의 질병이 경쟁, 투기 그리고 점점 더 커져가는 고립에 물든 세계를 향해 회심을 외쳐대는 분명한 가르침이 아닐까 자주 생각한다. 그렇다. 에이즈 위기는 우리 인간의 부서짐에 대해 전적으로 새로운 시각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부서짐과 친구가 되라

우리는 이 부서짐에 대하여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나는 두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하나는 그 부서짐과 친구가 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부서짐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당신 자신의 삶 속에서 직접 실천해 보기를 바란다. 나는 이 방법들을 실천해 보았고 지금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으며, 어떤 때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성공을 거두기도 하지만, 이런 방법들이 우리자신의 부서짐을 다루는 방법들로서 올바른 방향을 지적해준다고 확신한다.

우리의 부서짐에 대한 첫 번째 응답은 정면으로 그것을 직시하고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전혀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보통 고통과 아픔에 대한 우리의 가장 즉흥적인 반응은 그것을 피하거나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혹은 고통을 무시하고 선수를 치거나 부정하는 것이다. 고통은-그것이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혹은 정서적이든지 간에-항상 우리 삶 속에 초대받지 않은 침입으로 체험되며 있지 말아야 할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 고통 속에서 어떤 긍정적인 것을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 고통은 무슨 값을 치루고서라도 피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부서짐에 대한 우리의 즉각적인 태도가 이런 것일 때 고통과 친구가 되라는 제안은 처음에는 무슨 자학적인 증상으로 보여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내 자신의 삶 속에서 고통을 겪으며 깨달은 교훈은, 치유되고자 한다면 고통으로부터 한 발걸음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고통으로 향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선택받음과 축복 받음처럼 부서짐이 우리존재의 친밀한 일부가 되려면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두려움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부서짐을 끌어안을 용기를 발견해야 하며, 우리의 가장 공포스러운 적을 친구로 만들고 친밀한 동반자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고통을 알고자 하지 않으므로 치유가 무척 어려운 것이다.

이같은 사실이 모든 고통에 관해서 다 사실이지만, 부서진 마음으로부터 오는 고통에 관해서는 더욱 더 사실이다. 거부, 분리, 무관심, 학대 그리고 정서적인 억압으로부터 오는 고통과 불안감은 우리가 그것들을 대면하지 못하고 도망하려고만 할 때에 오히려 우리를 마비시키는데 기여할 뿐이다. 고통 중에 있을 때 어떤 안내자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를 고통에 가까이 이끌어주는, 그리고 고통을 피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고통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확신시켜주는 안내자가 있어야 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고통에 직면하기

어느날 내가 당신의 집에 갔을 때 당신은 결혼 생활이 끝났다는 것을 바로 그 때 실감하고 있었다. 당신의 고통은 무척 컸었다. 당신은 인생의 꿈이 증발하는 것을 보았다. 당신은 더 이상 의미 있는 미래를 생각할 수 없었다. 고통은 당신의 얼굴에 깊히 새겨져 있었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나는 그 때 뉴욕에 있었고 우연히 당신을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고통을 극복하게 되리라는 그 어떤 제안도, 아직도 생각해야 할 좋은 일들이 있다는 것 혹은 상황이 보이는 것처럼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 등이 하나도 소용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으로, 어떤 식으로든지 당신이 고통에서 도망가지 않도록 격려하고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었다. 이제 수년이 지난 후, 그 순간에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으나 내가 당신에게 상기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이 그것뿐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고통에 관한 나 자신의 경험은 그것을 직면하고 견디어내는 것이 치유에 이르는 길이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그러나 이런 작업을 나 혼자서는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내가 고통으로부터 돌아서지 않도록, 죽음 너머에 생명이, 두려움 너머에 사랑이, 고통 너머에는 평화가 있음을 확신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적어도 고통을 피하고 누르며 도망가려고 시도하는 것이 적절한 관심에 의해 치유될 수 있는 수족 하나를 마치 짤라버리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심오한 진리는 우리가 너무나 갈망하는 즐거움과 평화에 고통이 장애물이 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평화를 얻기 위한 방법이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진리이다. 영적인 삶,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딸로서의 삶에 있어 위대한 비밀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 즐거움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고통이든, 건강이든 질병이든 모든 것은 우리의 인간성이 완전하게 실현 되어가는 여정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광으로 이끌어 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고통을 겪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몰랐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다운 배려는 우리가 서로 자신들이 지닌 부서짐을 기쁨에 이르는 문으로 만들도록 도와주려는 기꺼움이다.

부서짐을 저주로 생각한다면...

우리들의 부서짐에 대한 두 번째 응답(방법)은 그 부서짐을 축복아래 두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우리의 부서짐을 축복아래 두는 것”은 고통, 부서짐과 친구가 되는 전제 조건이다. 부서짐은 자주 우리가 직면하기 두려워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부서짐을 저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서짐을 저주아래 두면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고통을 자신들에 관한 부정적인 느낌을 확인하는 것으로 체험한다는 뜻이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난 늘 내가 쓸모없고 가치없다고 의심해 왔어. 그런데 이제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내가 쓸모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확실해지는 것이지.”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을 우리는 늘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자기거부라는 유혹에 이미 굴복했다면 일어나는 모든 형태의 불행은 이 유혹을 더 깊게 할뿐이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을 죽음으로 잃었을 때, 일자리가 없어졌을 때, 시험에 떨어졌을 때, 별거나 이혼을 겪을 때, 전쟁이 터졌을 때, 지진이 우리의 집을 무너뜨리고 우리에게 해를 가했을 때 “왜?”라는 질문이 자동적으로 터져나온다. “왜 하필 나에게?”,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이곳에?”라는 질문들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인 의도에서건 우리는 다스릴 수 없는 사건들과 우리자신을 쉽사리 떼어놓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저주하거나 다른 이들이 우리들을 저주하도록 허용할 때에, 체험하는 모든 부서짐들을 이 저주에 대한 표현이며 확인으로서 설명하고자 하는 유혹이 대단히 크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난 항상 내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해 왔어. 이제 난 더 확실해진거야. 삶의 이런 사실들이 그걸 증명해 주고 있어.”

부서짐을 축복아래 두기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받은 위대한 영적 부르심은 저주의 그늘로부터 그들 자신들의 부서짐을 분리시키고 축복의 빛 아래 부서짐을 두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주변의 어둠의 세력은 강력하며 우리의 세계는 자기를 수용하는 사람들보다 자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자신을 하느님의 사랑받는 이들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주의 깊게 계속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가 가치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두려움에 대한 확인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더욱 깊게 하고 자신들을 정화시키는 기회로서 생각할 때에 우리는 부서짐을 살아 낼 수 있다.

축복아래 살아지는 신체적 정신적 혹은 정서적 고통은 저주라고 생각되는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고통과 철저하게 다른 방식으로 체험된다. 우리의 무가치에 대한 징표로 여겨지는 아주 작은 짐 하나도 우리를 깊은 좌절로 이끌어 갈 수 있으며 심지어 자살에 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크고 무거운 짐들도 축복의 빛아래에서 살아가게 되면 가볍고 쉬운 것이 되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보여졌던 것들이 도전이 된다. 좌절의 이유가 되었던 것이 정화의 원천이 된다. 징벌로 보여졌던 것이 부드러운 타이름이 된다. 거부라고 보여졌던 것이 더 깊은 통교에 이르는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과제는 축복이 부서짐 속에 있는 우리들을 만지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부서짐은 점차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우리자신들을 완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문처럼 보여질 것이다. 이것은 참다운 기쁨이 왜 큰 고통 한 가운데에서 체험될 수 있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훈련되고 정화되며 쓸데없는 가지가 쳐지는 기쁨이다. 마치 경주를 하고 있는 육상인들이 큰 고통을 체험하면서 동시에 목표지점에 가까이 가고 있음을 알게 되는 기쁨을 맛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들 역시 그들이 열망하는 더 깊은 일치와 통교에 이르는 길로서 고통을 경험할 수 있다. 여기에서 기쁨과 슬픔은 더 이상 서로의 적이 아니며, 사랑받는 자녀로서 온전히 성숙하고자 하는 한 갈망의 두 가지 측면들이 되는 것이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알콜중독자 모임이나 알콜중독자의 성인자녀모임들은 모두 우리의 부서짐을 축복아래 두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며 이렇게 하여 고통을 새로운 삶에 이르는 방법으로 변화시킨다. 모든 중독들은 우리를 노예가 되게 하지만, 우리가 우리자신의 의존성을 기꺼이 고백하고 하느님만이 유일하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수 있다고 믿음을 표현할 때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샘은 희망의 샘으로 변한다.

한 때 내가 어떤 한 사람의 애정과 우정에 전적으로 매달렸던 경우를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 의존은 나로 하여금 커다란 고통의 함정에 빠지게 했으며 매우 자기 파괴적인 절망과 우울의 벼랑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인간에 대한 중독성향을 내 마음의 가장 심오한 갈망들을 채워주실 사랑하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승복하고자 하는 요구의 표현으로 여기도록 도움을 받은 순간부터, 나는 이런 나의 성향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식에 의해 살기 시작하였다. 그런 성향을 부끄럽고 당황스럽게 여기는 대신, 나에 대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의 긴박한 초대로 여기고 살 수 있었으며, 이런 하느님의 사랑은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주기 위하여 부서지고 있는 것

이렇게 우리들의 부서짐에 대하여 말했던 것이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부서짐을 친구로 여기고 그것을 축복아래 둔다고 하여 반드시 우리의 고통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제로는 우리들의 상처가 얼마나 깊으며 또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더 깨닫게 해줄 따름이다.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나는 우리들이 지닌 상처가 삶에 있어 기본적인 부분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달아가고 있다. 이들의 고통은 부모로부터 오는 거부, 결혼할 수 없는 고통, 언제나, 심지어 옷 입고 먹고 걷고 버스타기, 선물을 사거나 돈을 내야 하는 등 가장 “일상적”인 것에까지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걱정… 이런 모든 부서짐 중에서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서 영원히 사라지거나 줄어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서짐을 끌어안고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라고 부르는 절대적인 존재의 빛 속으로 그 부서짐을 이끌어 갈 때에 우리들의 부서짐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날 수 있는 것이다.

2년 전 함께 링컨 센타에 가서 레오나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들었던 것을 당신은 기억하는가? 매우 감동적인 저녁이었다. 후에 우리는 이 음악적 천재의 모습을 직접 본 것이 그때가 마지막이었음을 알았다. 레오나드 번스타인은 의심할 바 없이 나에게 음악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알려준 가장 훌륭한 지휘자요 작곡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청년기의 나는 그가 네델란드의 한 음악당에서 모차르트 협주곡들을 얼마나 열렬하게 지휘하고 피아노 연주를 했는지 또 그때 내가 얼마나 큰 감동으로 압도되었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가 작곡한 웨스트 사이트 스토리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몇 달간이나 그 멜로디들을 콧노래로 불렀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도 수차례 보곤 하였다.

아이들을 위한 고전음악 설명프로그램에서 풍부한 표정으로 지휘하고 설명하는 그의 모습을 텔레비젼에서 보면서 나는 레오나드 번스타인을 나의 가장 존경하는 음악 선생으로 삼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마치 아주 가까운 친구의 죽음처럼 충격을 받았다.

우리의 부서짐에 대하여 쓰면서 나는 레오나드 번스타인의 미사(존 에프 케네디를 추모하며 작곡한 뮤지컬)가 부서짐을 축복으로 여기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던 사실을 기억해 낸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제는 화려한 예식옷을 입고서 사람들에 의해 들어 올려진다. 그는 환호하는 군중 위에 높이 서서 손에는 번쩍이는 유리성작을 들고 있다. 갑자기 인간 피라미드가 무너지고 사제는 바닥에 떨어져 버린다. 그의 화려한 예식 옷은 찢어지고 유리성작은 산산조각이 되어 깨어진다. 그는 방금전까지 누렸던 영광의 부스러기로부터 천천히 걸어나온다. -맨발로 청바지와 티셔츠의 차림으로- 이어 아이들의 합창소리가 들려온다. “찬미, 찬미, 찬미하라.” 갑자기 사제는 부서진 성작을 발견한다. 그는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주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난 부서진 성작이 이렇게 눈부시게 빛날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 말들을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나에게 이 말들은 나의 삶과 당신의 삶의 신비를 그리고 번스타인이 죽은지 얼마 안 되는 지금은 그의 놀라운 삶 그러나 비극적인 삶의 신비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부서짐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나는 우리들과 다른 사람들의 관계에 있어 이 부서짐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말해야겠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얼마나 적은 가를 점점 더 깨닫고 있다. 그렇다, 참으로 우리는 선택받았고 축복 받았으며 그리고 주기 위하여 부서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눔에 대하여 이제부터 말하고 싶다.

[원출처] <사랑받는 사람의 삶 Life of the Beloved -세상 속에서 영적인 삶을­>, 헨리 나웬,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1999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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