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원이다
상태바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원이다
  • 한상봉
  • 승인 2018.07.23 10: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20

프란치스코 교황과 ‘예수회원’이라는 정체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예수회에 입회한 것은 21살 되던 해인 1958년 3월 11일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 신학교에 입학한지 두 해가 지난 뒤였다. 그는 예수회원이 되어 일본에 선교사로 가고 싶다는 열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입회 직후에 심한 폐렴에 걸려 오른쪽 폐의 일부를 잘라내야 했기 때문에 ‘선교’에 대한 이런 열망은 초기에 좌절되었다. 이런 교황이기에 이후 사제생활과 주교로 재임하면서도 줄곧 ‘안이하게 교구 일에만 머무는 교회’가 아니라 늘 새로운 모험처럼 ‘길 떠나는 교회’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교황이 된 베르골료는 먼저 칠레에서 인문학의 기초를 닦고, 1963년 산 미겔에 있는 성 요셉 신학교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64년부터 1966년까지 산타페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문학, 심리학, 예술 등을 강의했다. 당시 베르골료는 “하루의 어느 순간에도 기쁨 없이 있지 않기를. 지금처럼 사랑하는 이들이 다시 만날 때 그대들에게 어울리고 거룩해지기를. 식탁에서 기도할 때 나는 누구의 이름을 불러야 좋을까? 하루의 노고를 마치고 쉴 때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까?”라고 ‘귀향’이라는 시에서노래했던 프리드리히 훨덜린을 좋아했으며, 미사 중에 강론을 하면서도 보르헤스와 토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소재로 삼기도 했다. 베르골료는 분명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었을 텐데, 그중에서 ‘대심문관’ 부분은 교황의 교회개혁 정신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성목요일을 맞은 2018년 3월 29일(현지시간)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마 레지나 코엘리 교도소를 방문해 한 재소자의 발을 씻겨주고 입을 맞추고 있다. 교황은 이날 12명의 재소자들의 발을 씻겨주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매년 성목요일 세족 의식에서 사회에서 가장 낮고 소외된 사람들을 만나고 있으며, 2013년에는 로마 외곽의 소년원, 2015년에는 로마 외곽의 교도소, 2016년에는 로마 인근의 난민센터를 찾아 세족식을 진행했다. (글/사진 출처=EPA 연합뉴스)

이 이야기는 가톨릭교회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 있던 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 지역에 예수가 재림했으나 교권에 의해 거부당하는 내용이다. 종교재판소의 심문관들이 수많은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하던 시절이었다. 대심문관은 재림한 예수를 한 눈에 알아보았지만, 예수를 옥에 가둔다. 그리고 왜 다시 나타나서 우리의 일을 방해 하느냐고 예수를 심문하지만, 예수는 묵묵부답(黙黙不答)이다. 다만 대심문관이 자문자답하며 심문을 다 끝냈을 때, 조용히 일어나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는 것이 유일한 예수의 답이었다.

마치 유다가 예수의 입에 키스를 하면서 스승을 팔 때처럼. 이 소설에서 대심문관은 예수에게 “너는 이미 모든 것을 교황에게 넘겨주지 않았느냐. 따라서 지금은 모든 것이 교황의 수중에 있는 거야. 그러니 이제는 제발 나타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어. 적어도 어느 시기가 올 때까지는 방해를 말아 주게”라고 말한다. 여기서 알료사의 형 이반은 “그들은 이런 말을 입으로만 뇌까리는 게 아니라 책에까지 쓰고 있어.” 하면서 예수회 신학자들을 지목하고 있다.

상당한 기간 동안 예수회원들은 교황의 홍위병 노릇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예수회원들 가운데 하나가 지금 교황이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직’까지 개혁할 의향이 있다고 말한 것은 아마 이제는 대심문관처럼 행세하지 않고 어렵더라도 ‘예수’를 따라서 살기로 작심했다는 뜻이 아닐까.

베르골료가 가장 아꼈던 문학작품이 시스틴 성당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미켈란젤로가 참고했다는 단테의 <신곡>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그리고 영화로도 제작된 J.R.R. 톨킨의 작품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도 즐겨 읽었다는데, 이 작품에서 프로도 배긴스가 반지를 화산의 분화구에 집어넣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원정을 떠나는 모습에서도 강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교황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하느님 나라로 가는 여정에 망설이지 않고 동참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겪는 상처 역시 기쁘게 감내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한편 베르골료는 성 요셉 신학교에서 신학과정을 마치고 메데인 주교회의가 열리고 난 이듬 해인 1969년 12월 13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라몬 호세 카스텔라노 대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후 스페인에서 제3수련을 마치고 다시 산 미겔에서 수련장과 신학대학교 학장을 역임하고 1973년 예수회에 평생 머물겠다는 최종서원을 한 뒤 곧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이 되었다.

1979년 관구장 임기를 마치고 이듬해부터 베리골료 신부는 다시 산 미겔 신학교 학장을 맡았다. 당시 베르골료 학장 신부는 신학생들에게 신학교에 머물지 말고 사람들을 만나라고 독려했다. 심지어 신학생들이 더 많은 시간을 거리와 본당에 있도록 배려하는 차원에서 강의 시간을 저녁으로 옮기기도 했다. 베르골료 역시 학장으로서 학사 업무를 보면서, 입던 옷을 세탁실에서 직접 빨래하고, 틈틈이 본당미사를 나가고, 환자와 죄수를 방문했으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돌보았다.

양떼를 떠나서 목자가 있을 수 없듯이, 백성을 떠나서 사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1986년에는 신학교를 떠나 독일에 가서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로마노 과르디니에 대해 연구했다. 당시 베르골료 신부의 연구과제는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의 <권력>이란 작품이었다. 아르헨티나의 독재정권을 경험한 베르골료는 “권력은 필요하지만 나치의 권력남용에서 보듯이, 권력에는 ‘제어’가 필요하다”고 말한 과르디니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단순한 정치권력에 대한 것뿐 아니라 교회권력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