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삶이 축복이라는 말
상태바
[헨리 나웬] 삶이 축복이라는 말
  • 헨리 나웬
  • 승인 2018.07.16 22: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2부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가기-축복받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로서 우리는 축복을 받고 있다. “축복”이란 말은 지난 수년간 나에게 매우 중요한 말이 되어왔고 당신은 그 말이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도록 해준 친구들 중에 하나이다.

어느 토요일 오전에 뉴욕시에서 당신은 나를 유대교 회당으로 데려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성인식이 곧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13살 된 한 젊은이가 모인 회중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처음으로 그는 예식을 주재하였다. 그는 창세기의 구절들을 읽었고 우리환경을 보호해야 할 중요성에 관하여 짧은 설교를 했다. 그는 랍비와 친구들의 승인을 받았고 부모들의 축복을 받았다.

아름다운 축복, 성인식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성인식을 보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무엇보다도 부모의 축복이 그랬다. 나는 아직도 그의 아버지가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아들아, 네가 살아가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성공을 하든 못하든, 중요한 존재가 되든 못되든, 건강하든 그렇지 않든지간에 항상 너의 어머니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기억해라.” 아버지가 회중 앞에서 자기 앞에 서 있는 아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눈물이 핑 돌았고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이고 은총인가.”

나는 두렵고 불안해하여 불안정한 인간존재들이 얼마나 많이 이런 축복을 필요로 하는가를 점점 더 깊게 인식하고 있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또한 부모는 아이들로부터 이런 축복을 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모두는 서로의 축복을 필요로 한다. -교사와 제자들, 랍비와 학생들, 주교와 신부들, 의사와 환자들 사이에.

 

사진출처=pixabay.com

축복은 긍정이며, 본래의 선함을 환기시키는 것  

먼저 “축복”이란 말의 의미를 말해보기로 하자. 많은 교회에서 쓰여지고 있는 축복이란 말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어떤 사람에 대해 좋게 말하거나 좋은 점을 말하는 것이다. 즉 나에 관한 말인 것이다. 나는 나에 관한 좋은 말을 듣기 원하며 또한 당신도 똑같은 것을 원함을 알고 있다. 요즈음 우리는 자주 말한다: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인정 없이 잘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에게 축복을 준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인정이다. 그것은 칭찬이나 평가의 말 한마디 그 이상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탈렌트나 착한 행위를 지적하는 것 이상이다. 어떤 사람을 앞에 내세우는 것 이상이다.

축복한다는 것은 긍정하는 것이며, 어떤 사람의 축복받음에 대하여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긍정하는 것 이상이다: 축복하는 것은 그 축복이 의미하는 실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세계에는 상호적인 비판이 많은 것처럼 상호적인 칭찬도 무척 많이 있다. 축복은 칭찬과 비난, 덕과 악습, 선행과 악행을 구분하는 것 이상이다. 축복이란 상대방의 본래의 선함에 닿고 그가 사랑받고 있음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정말 축복한다는 것, 받는다는 것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얼마전에 나는 진정한 축복의 힘을 매우 개인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공동체의 한 집에서 기도모임을 시작한 직후에 공동체의 구성원인 쟈네트가 나에게 말했다: “헨리, 나에게 축복을 해 줄 수 있어요?” 나는 그녀의 이마에 엄지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긋는, 약간은 자동적인 태도로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쟈네트는 고맙다는 말 대신 매우 격렬하게 항의했다. “아니요, 그렇게 해서는 안되요. 난 진짜 축복을 원해요!”

나는 그녀의 청에 내가 형식적인 응답을 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되어 이렇게 말했다. “아, 미안해요…, 우리 모두가 기도모임을 할 때에 진짜 축복을 줄께요.” 그때야 쟈네트는 웃으면서 끄덕였고, 나는 어떤 특별한 것이 나에게 요구됨을 깨달았다. 약 30명쯤이 둘러앉아 기도모임이 끝난 후, 나는 “쟈네트가 나에게 특별한 축복을 청했어요. 쟈네트는 지금 그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하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쟈네트가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쟈네트는 나를 이런 의심 속에 오래 놔두지 않았다. 나에게 특별한 축복을 원한다고 말하기가 무섭게 그녀는 일어나 나에게 걸어왔다. 그때 나는 내 팔과 손까지 덮는 하얗고 긴 장백의를 입고 있었다. 쟈네트는 자연스럽게 팔을 나에게 걸치고 머리를 내 가슴에 대었다. 나도 자연스럽게 긴 장백의 소매로 자네트를 덮었으며 그녀는 장백의 주름 속으로 거의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이렇게 서로를 포옹하면서 나는 “쟈네트, 난 당신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딸임을 알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아주 소중합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미소, 이 집에서 당신이 사람들에게 베푸는 친절과 하고 있는 좋은 일들은 우리에게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어요. 요즈음 당신의 기분이 가라앉아 있고 마음속에 어떤 슬픔이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신이 누구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당신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고, 하느님이 깊히 사랑하시는 사람이며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 역시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자 쟈네트는 머리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환한 웃음은 그녀가 이 축복을 참으로 들었고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쟈네트가 자리로 돌아가자, 또 다른 장애여인인 제인이 손을 들고 말했다. “나도 축복을 원해요.” 제인은 일어났고 내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내 가슴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그녀에게 축복을 하고 난 후, 다른 많은 장애공동체구성원들이 축복받고 싶다는 원의를 이어서 표현했다.

하지만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협력자들 중의 한 사람인 24살 된 학생이 손을 들고 이렇게 말했을 때였다. “나는 어때요?” “물론, 당신도 오세요”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가 서로 마주보고 섰을 때 나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죤, 당신이 여기 있어서 참 좋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입니다. 당신이 여기 있어 우리 모두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어려울 때 그리고 삶이 버거울 때에 항상 기억하세요. 당신이 영원한 사랑과 함께 있으며 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말할 때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 너무 고맙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매번 새롭게 들려주는 계속적인 축복

그날 저녁 나는 축복과 축복받음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그것을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의 진정한 징표라고 확신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주는 축복들은 영원으로부터 우리에게 머무는 축복의 표현들이다. 그것은 우리의 참다운 자아에 관한 가장 깊은 긍정이다. 선택받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를 절대로 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며, 우리 삶의 매 걸음마다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이라고 기억하게 해 줄 사랑의 하느님에게 우리가 속해 있다는 사실을 매번 새롭게 들려주는 계속적인 축복이 또한 필요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사악과 레베카, 야콥, 레아와 레이첼은 모두 이 축복을 들었으며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축복받고 있는 존재임을 끊임없이 기억하면서 길고도 고통스러운 여정을 살았던 것이다. 예수 역시 세자 요한이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줄 때에 이 축복의 소리를 들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소리는 축복이었으며, 그가 겪은 모든 칭찬과 비난, 찬양과 단죄 속에서 그를 지탱해 주었던 것도 이 축복이었다.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예수도 그가 “축복받는 존재”였다는 이 친밀한 사실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내가 이 모든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당신과 내가 얼마나 변덕스러운 가를 알기 때문이다. 오늘 기분이 좋다가도 내일은 비참한 기분에 빠지는 것이 우리들이다. 하루는 새로운 생각들로 넘치나, 다음날 보면 모든 것이 권태스럽고 황량하게 보인다. 하루는 온 세계를 떠맡은 것 같이 느껴지나 다음날엔 아주 작은 청 하나도 우리에게 너무나 크게 다가온다.

이런 변덕스러움들은 우리가 아브라함과 사라, 이사악과 레베카, 야콥, 레아와 레이첼 그리고 나자렛의 예수가 들었고 또 우리도 들어야 할 그 축복의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있지 못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실존의 표면에서 출렁대는 작은 파도들에 의해 오르락 내리락 할 때에는 조작스러운 세계에 의해 쉽사리 희생자가 되기 쉽지만, 우리를 축복하고 있는 깊고도 온화한 목소리를 계속하여 들을 때에는 안전하다는 느낌과 참다운 소속감을 갖고 삶을 헤쳐나갈 수 있다.

우리는 정말 축복받은 존재일까, 하는 의심

축복받고 있다는 느낌은 내가 보기에 보통 우리 자신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느낌과 같은 것이 아니다. 당신은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 때에 당신은 축복받기 보다 저주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겠다. 실상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주받고 있다는 깊은 느낌으로 고통받는다고 생각한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어떤 수동적인 체념의 느낌 속에서 비난과 불평이 크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그리고 때때로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세상의 희생자로 느끼고 있으며 매일의 신문들도 그런 우리의 느낌을 감당하는데에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저주받고 있다는 느낌은 대부분 축복받는 느낌보다 더 쉽사리 우리에게 오고 있으며 그럴만한 충분한 근거를 댈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번 봐: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 피난민들, 죄수들, 병자들과 죽어가는 이들… 이 모든 가난, 불의, 전쟁을 봐… 고문, 살인, 자연의 파괴와 문화를 봐… 관계, 일, 건강 등 매일 허덕거리고 있는 우리 자신들도 봐…” 도대체 어디에 축복이 있다는 말인가? 당연히 저주받고 있다는 느낌이 더 쉽사리 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가 나쁘고 악하고 썩었고, 가치없으며 쓸모없고 병들거나 죽기가 쉬운 존재라고 말해주는 내면의 소리를 쉽게 듣는다. 그러니 축복받고 있다기보다 저주받고 있다는 것이 더 믿기가 쉬운 일이지 않는가?

그렇지만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당신은 축복받고 있다고. 이러한 진리를 말해주는 기쁜 말씀이 당신에게 또한 당신에 대하여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저주들-시끄럽고 난폭하고 큰 소리인지는 몰라도-은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짓말들이다; 거짓말들은 쉽사리 믿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은 거짓말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정말 축복이 진실인가? 어떻게 

당신과 나에 관하여 축복이 진실을 말하고 저주가 거짓을 말한다면, 우리는 매우 구체적인 질문에 봉착한다: 어떻게 축복의 소리를 듣고 또 그것이 축복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다. 우리가 축복받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단순히 어떤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을 형성해주는 진실이라면 우리는 이 축복을 보다 명확한 방식에 의하여 알아보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의 축복받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도움이 되는 두 가지 제안을 해보겠다. 이 두 제안은 기도와 현존의 방식이다.

먼저, 기도이다. 개인적으로 기도는 나에게 축복에 점점 더 귀를 기울이게 해주는 방법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기도에 관하여 많이 읽었고 또 쓰기도 했지만, 조용한 자리로 기도하러 갈 때에 수많은 것들을 하느님에게 말하고자 하는 나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참다운 기도는 침묵하고 나에 관해 좋은 것을 말해주는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임을 깨닫는다. 이렇게 말하면 기도가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르나, 실제로 이러한 기도는 매우 어려운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저주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너무나 두려워하고, 내가 나쁜 존재이거나 그다지 착하지 않다는 사실을 대면하기 두려워서 말하는 유혹에 쉽게 떨어지며 이런 두려움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계속 떠들어대는 것이다. 나의 선함에 대하여 의심하는 많은 소리들을 부드럽게 옆으로 밀어놓고 침묵하는 것 그리고 축복의 소리를 듣게 되리라는 믿음은 참으로 엄청난 노력을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한 시간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단지 당신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한 적이 있는가? 귀를 기울여 볼 라디오도, 볼 TV도, 읽을 책도, 말할 사람도, 끝내야 할 일도, 해야 할 전화도 없을 때 당신은 어떤 느낌을 가지겠는가? 이런 때에 흔히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을 알아차리고 결국 두려운 침묵을 떠나 일하러 가기로 결정한다!

침묵 속으로 들어가고 우리세계의 난잡스럽고 요구가 많은 소리들을 넘어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작고도 친밀한 내면의 소리를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의 고독을 감히 끌어안고 침묵과 친구가 된다면 그 소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고 어느날 당신이 실제로 그 소리를 듣게 되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환각 속에 듣는 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신앙)의 귀로, 내적인 마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이다.

기도 속으로

당신은 기도 속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흔히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말한다; ‘나는 그저 앉아서 분심만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매일 30분씩 사랑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는 습관을 들인다면 당신이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음을 점차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을 늘 축복하고 있는 소리를 뒤늦게 발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 듣기의 시간동안에 그저 수많은 혼란을 깨닫게 됐을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 조용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당신, 그 시간을 가질 수 없을 때에 아쉬워하는 당신을 보게 된다.

하느님의 성령은 아주 온화하게, 부드럽게 그리고 숨겨진 채 움직이신다. 성령의 움직임은 관심이나 주의를 끌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우 집요하고 강력하며 깊다. 우리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충실하게 기도한다면 우리 자신이 축복받는 존재이며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힘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어떤 구체적인 방법을 내놓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귀를 기울이는 한 가지 좋은 방식은 성서를 갖고 귀를 기울이는 방식이다. 시편이나 기도도 좋다. 힌두교의 영성작가인 에크나 이스와란은 마음으로 성서를 배우고 머리 속에서 구절을 말 한마디씩, 문장하나씩 천천히 반복하면서 배우는 것의 위대한 가치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렇게 하여 사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단순히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성서의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소리에 적극적으로 집중하는 길이 되어가는 것이다.

나는 수많은 30분의 기도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프란치스꼬의 기도만을 천천히 반복하면서 보냈다; “주님, 당신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보이게 하소서…” 이 말들이 내 머리에서 마음으로 옮겨가도록 할 때에, 나는 나의 모든 불안한 감정과 느낌들을 넘어 기도 속에서 청하고 있었던 평화와 사랑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나의 끝없는 산만함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멀리 또 넓게 방황하는 나자신을 발견할 때에 항상 이 단순한 기도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그래서 그토록 듣고자 원했던 소리에 내 마음속에서 다시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단순한 현존 속에서

당신의 축복받음을 확인할 수 있는 두 번째 제안은 현존의 체험을 훈련하라는 것이다. 현존이라는 말의 의미는 당신에게 매일 매해 다가오는 축복들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현대 삶의 문제는 우리가 너무나 바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잘못 짚은 자리에서 인정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주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 좋게 말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마, 잊어버려,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일축해 버린다. 이런 표현들은 이떻게 보면 겸손의 표현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주어지는 축복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가 충분히 그리고 진정으로 집중하지 않는다는 표시이다.

우리같이 바쁜 사람들이 진정으로 어떤 축복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아마도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진정한 축복을 사람들에게 주고 있다는 사실은 그러한 축복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는 슬픈 결과를 말해주는지 모른다. 멈추고 귀를 기울이며 주의를 집중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감사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정신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이 사실이 나에게 분명히 보여지고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줄 많은 축복들을 갖고 있지만, 내가 늘 바쁘고 무언가 더 중요한 것에 빠져 있을 때 어떻게 이 축복들을 받을 수 있겠는가? 공동체의 구성원인 아담은 말할 수도 혼자 걸을 수도 없으며, 도움이 없으면 먹을 수도 입을 수도 벗을 수도 없지만, 그에게 집중하는 사람에게, 그를 안거나 그저 함께 앉아 있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많은 축복들을 갖고 있다.

나는 아담과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 중에서 그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그것은 단순한 현존으로부터 오는 축복이다. 그런데 당신도 아는 것처럼, 그러한 단순한 현존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해야 할일이 너무나 많고 끝내야 할 과제들과 처리해야 할 안건들이 늘 많으므로 단순한 현존은 쉽사리 쓸모없거나 시간낭비로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려는” 의식적인 갈망이 없다면, 축복을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집중적인 현존은 우리로 하여금 받아야 할 축복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도록 해준다: 길에서 우리를 멈추게 하는 가난한 이들의 축복,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일러주는 싹이 트는 나무들과 싱싱한 꽃들, 음악, 그림, 조각 그리고 건물들의 축복-이 모든 것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축복은 감사, 격려, 애정 그리고 사랑의 말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축복들이다.

이 수많은 축복들은 발명될 필요가 없다. 축복들은 그저 우리를 온통 에워싸면서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축복들에 현존해야 하며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축복들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이 축복들은 우리를 이름으로 부르고 우리에 대해 좋게 말하는 존재의 아름답고도 강력하며 그러나 숨겨진 소리를 부드럽게 상기시켜 줄 뿐이다.

나는 기도와 현존이라는 두 가지 방식이 당신이 축복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축복받음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쉽사리 저주받는 땅으로 이끌리게 된다. 축복의 땅과 저주의 땅 사이에는 거의, 아니 조금의 중립영역도 없다. 당신은 어디에 살기를 원하는지 선택해야 하며, 그 선택은 매순간 해야 한다.

다른 이를 축복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의 축복받음을 확신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강한 갈망을 가지게 된다. 축복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간에 늘 축복의 말을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축복받음과 맞닿아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그들에게 또한 그들에 관한 좋은 것들을 말하고 그들의 아름다움과 진실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놀랍기만 하다. 축복받은 존재임을 깨닫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축복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축복받고자 한다! 당신이 어디를 가든지간에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저주나 입방아, 비난 그리고 원망으로 생명에 이르는 존재는 없다.

이런 사실은 우리 주변에서 늘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저주 등은 오직 어둠, 파멸 그리고 죽음을 가져올 뿐이다. “축복받은 존재들”인 우리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며 축복을 줄 수 있다.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축복은 우리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뿐이다. 우리를 이름으로 부르고 축복하는 소리를 내면에서 들을 때에 어둠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한다. 사랑받는 존재라고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축복할 말을 줄 것이며 그들이 우리보다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려줄 것이다.

당신은 뉴욕에 살고 있고 나는 토론토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가 살고 있는 주변에서 어둠을 보고 있다. 외로움, 집없음 그리고 중독된 사람들이 온통 가득차 있는 거리들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사람들은 축복을 갈망하고 있다. 이 축복은 스스로가 축복을 들은 사람들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가장 어려운 진실을 당신에게 써야겠다는 필요를 느낀다. 그것은 우리모두가 부서짐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선택되고 축복을 받는 존재들이다. 이 사실을 참으로 인정할 때에 그리고 그 사실에 “예”라고 대답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눈을 크게 뜨고, 우리자신과 이웃들의 부서짐을 직면할 수 있다. 이제 그 직면을 시작해 보자.

[원출처] <사랑받는 사람의 삶 Life of the Beloved -세상 속에서 영적인 삶을­>, 헨리 나웬,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1999년 7월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