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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체가 훼손될 수 있을까?성체 모독 논란에 관하여 한 마디

[윤영석 신부 칼럼]

워마드와 성체 모독 건으로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 안팎에서 떠들석하다. ‘워마드가 택한 방식은 잘못했다’라는 의견으로 분분하고, 누구는 ‘넘어서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섰다’는 도덕적 잣대를 댄다. 내 단상도 이런 여러 의견 중 하나에 불과하다. 다만 1) 워마드의 저항 방식이 왜 불편한지, 2) 워마드가 일으킨 일종의 종교적 무례함에 반응하는 진영이 펼치는 논리는 정당한지, 그리고 3) 왜 성체를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정도 살펴보겠다.

 

사진출처=pixabay.com

1) 전례적 교회 전통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워마드가 성체에 저지른 행위는 결코 유쾌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언짢은 감정을 감추기 힘들다. 종교가 정한 어떤 금기 법칙을 운운하지 않아도 내가 소중히 여기는 그 무언가를 공격하는 건 기분 나쁘다. 그런데 이런 건 개인과 성체를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가 느끼는 아주 불쾌한 감정일 뿐이다. 내게 워마드의 이런 저항 방식이 불편한 이유는 파시스트 선동(facist propaganda)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선동은 생각을 배제시키고 편견과 선입관을 일으켜 감정적 반응만을 일으킨다. (선동은 진보 보수 가리지 않고 마구 나타난다.) ‘예수의 남성성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모든 여성 억압의 원흉이다’라는? 혹은 예수는 그저 ‘한남’같은 인물이던가. 문제는 워마드의 이런 선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남성이라는 원흉 앞에 ‘결백하고 무고한 피해자’가 된다. 나는 이 부분이 불편하다.

2) 그렇다면 이 선동에 반응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펼치는 논리는 정당한가? 저마다 신심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성체 경건주의(Eucharistic pietism) 류의 표현이 난무하다. 예를 들어 이런 표현, “성체를 씹는 행위조차 불경스러워 녹여 모신다.” 성체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 현존의 신비를 대하는 행위를 아주 감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성체를 받는 그리스도인을 워마드의 성체 모독 앞에 ‘결백하고 무고한 피해자’로 둔갑시켜 버리는 또다른 선동(propaganda)의 모습이 아닌가. 이런 식의 미사여구는 성체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얼버무리고 ‘내가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걸 어떻게 함부로 대할 수 있어’라는 논제 뿐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발달시킨 화체설(성체의 실체변화론)이 있기 전 11세기 투르의 베렌가리우스가 있었다. 그는 성체를 상징으로 여겨야 한다고 논쟁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 일로 교회는 베렌가리우스에게 출교라는 압박을 가한다. 그래서 그는 이런 서약을 강제로 해야했다: “제대에 놓인 빵과 와인은 축성 후 성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이며, 이는 물리적으로 사제의 손에 받들어지고 부서지며 신자의 이빨에 의해 으깨지는데 성사적일 뿐 아니라 진리 안에서 이뤄진다.” (1059년 로마회의)

아이러니하지 않나? 2018년엔 성체를 씹는 행위를 불경스럽게 보는데 1059년 공식 문서는 성체가 신자의 이빨에 으깨져야 한다고 하다니. 내가 어떻게 성체를 대하느냐, 성체에 대한 나의 공경심이 워마드가 성체를 모독해서는 안 될 신학적 이유는 될 수 없다. 그냥 기분 나쁜 거지. 근데 그것 뿐이다.

워마드의 성체 모독 건에 관한 또다른 반응은 천주교 주교회의가 ‘성체 훼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워마드가 모독한 게 축성된 면병이었나? 성체였다고 치자. 그런데 이게 신학적인 부분에서 볼 때 훼손이 가능한가? 이건 좀 의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화체설이 성체가 지닌 신비에 다가가는 최선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화체설로 성체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성체(聖體)는 그리스도의 육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사적(sacramental) 몸이며,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하느님나라에 속한 새로운 그 무언가(substance)이자 신비이다.

거기에 저열한 낙서를 한다고 해서 정말 훼손이 될까? 이미 성사는 신학적으로 객관성을 띄고 있는데 인간이 뭔 짓을 하든 그 효력과 여파가 성체에 있느냐(내 기분이 아니라) 곰곰히 생각해야 할 문제다. (도나티스트 논쟁만 봐도 그렇다. 배교한 사람에게 받은 세례는 진정한 성사인가? 성사다. 성사는 결코 인간에게 달려 있지 않다.) 성체 ‘훼손’이란 표현을 쓰기 전에 훼손이 가능하냐고 묻자. 훼손이 가능하다면 오히려 화체설과 성사의 본의미를 잊은 게 아닌가? 적어도 새로운 세계, 하느님나라에 속한 그 뭔가라면 인간이 뭔 짓을 해도 끄덕없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뭘 하란 소린 아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3) “왜 하필 많고 많은 것들 중 성체를 골랐어!” 저항의 방식 중 굳이 성체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 물론 성체성사가 가장 중요해서 그걸 노렸겠지만, 가톨릭 전통(정교회 역시)에선 남성 사제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핵심이 아닐까? 그런데 이 교리와 전통이 만드는 핸디캡이란 면병이 성체가 되는 신비에 ‘남성’ 사제라는 필요 조건을 붙여 버린다는 사실. 이 부분은 여성에게 충분히 억압적이다. 남성이란 존재가 없어진다 치자. 그러면 사제가 될 사람도 없을뿐더러 그 누구도 사제가 못된다. 결국 남겨진 이들은 그리스도의 성사적 몸, 성체의 신비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몸소 체험할 수 없다는 게 아닌가? 교리와 전통을 떠나서 이 신비에 조건이 붙인 게 좀 성사적이지 못하다는 모순이 있다.

끝: 워마드가 모독한 성체를 바라본다.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범법자에게 인간이 지닌 존엄성은 사라진다. 그저 아무 쓸모없고 쓰레기 같은 존재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선동한 자들이 훼손한 육체에서 부활꽃이 핀다.

윤영석 바울로 신부
미국성공회 뉴왁 교구 성 아그네스 성당 주임 & NewYork-Presbyterian Hospital 원목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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