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난민이며 노동자, 성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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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난민이며 노동자, 성 요셉
  • 미건 맥켄나
  • 승인 2018.07.0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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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가 넘치는 그리스도-5
Friedrich Overbeck (1789-1869년), 팔려가는 요셉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요한 1,45)

우리는 요셉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올바르고, 꿈을 꾸는 사람, 마리아와 아기의 보호자라는 것 이외에. 그런데도 요셉은 하느님의 아들의 아버지이고, 유다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예언자요 정의의 아들인 예수님에게 모범이 되고 교사가 된다. 물론 요셉은 전통에 나오는 또다른 요셉을 따라 이름을 지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의 아들로서 영광을 꿈꾸고, 형제들에게 주군이 되었으며, 부모가 그 앞에 절했던 사람이 바로 요셉이다(창세 37,5-11). 첫 번째 요셉의 아버지는 우리가 아는 대로, 혼란스러웠으나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간직하였다.” 이 요셉은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갔으나, 이집트의 파라오 궁전에서 재상이 되었고, 우리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그와 함께 계시다”(창세 39,3. 21)라는 이야기를 되풀이하여 듣는다.

이 요셉은 꿈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고난의 땅에서도 성공한다. 요셉은 그를 죽이려는 형제들을 용서하고 그들이 굶주릴 때 빵을 준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경이로움에 가득 차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시어, 여러분을 위하여 자손들을 이 땅에 일으켜 세우고, 구원받은 이들의 큰 무리가 되도록 여러분들의 목숨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파라오의 아버지로, 그의 온 집안의 주인으로, 그리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창세 45,7-8)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요셉이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이다.

꿈은 하느님의 잊혀진 언어

그리고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꿈쟁이들의 오랜 역사 속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한 때 왕이었으나 지금은 점령당한 땅에서 살며 로마의 잔혹한 학정에 짓밟히고 있다. 그러나 요셉은 여전히 꿈을 갖고 산다. 언제나 충실한 약속의 하느님께 속하는 선택된 백성들을 위하여 하느님이 꾸고 계시는 꿈을 놓지 않는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약속했다. 그리고 정의의 아들, 백성들과 너무나 선명하게 함께 계시므로 모든 국가들이 와서 그 지혜와 평화를 배우게 될 정의의 아들을 약속했다.

요셉은 유다인이고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미카 그리고 기타 예언자들의 말씀과 이야기에 따라 산다. 요셉은 남은 자들, 충실한 의인들 중의 하나로서 이러한 꿈들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다. 또한 요셉은 메시아가 그들이 사는 동안 올 것이라는 굳건한 희망을 갖고 세세 대대로 살아가는 의인들 중의 한 사람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꿈이 하느님의 잊혀진 언어라고 믿었다. 절대적으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이므로, 꿈을 통하여 그 정보를 받은 사람은 백성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다. 꿈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그것을 위하여 목숨을 무릅쓰고 복종하였다. 비록 꿈에 대한 이성적인 설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기가 무척 힘들었지만 이스라엘 전통을 보면 꿈, 별, 그리고 천사들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즉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하느님으로부터의 메시지이다. 그리고 그 하느님은 지금 여기에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실 것이며, 모두에게 숨겨진 의미를 밝혀주실 것이다.

 

안톤 라파엘 멩스, 성 요셉의 꿈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

성경을 보면 요셉은 다윗 가문 출신이다. 천사가 그의 꿈에서 말을 건넨 것도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였다. 요셉은 목수이고, 가난하며 생계를 잇기 위하여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노동자이다. 그리고 아마도 확실하게 마리아처럼 요셉도 청년이다. 기껏해야 열네 살이나 열다섯 살 정도일 것이다. 유다 공동체에서는 12살 이후에 약혼하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에서 우리는 “메시아 예수님의 탄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와 관련되어서만 요셉에 대하여 알게 된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18-24)

이 부분이 요셉에 관하여 가장 길게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영감과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요셉은 자신이 매우 고통스러운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고 깨닫는다. 그는 약혼했으나 아직 마리아와 혼례예식을 치루지 않았다. 약혼기간은 수개월 아니면 수년 동안 지속될 수도 있으나, 마리아의 상황은 이혼도 감행할 정도로 심각했다. 혼례 전에 여자가 임신할 경우 법은 분명했다. 여자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와 함께 돌로 쳐서 죽는 죽임을 당해야 했다. 이런 법이 실제로 얼마나 자주 집행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불길한 징조였다. 성경의 또다른 번역본은 요셉이 마리아를 이런 법에 적용시키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헤어지려고 했다고 전한다.

그럴 경우도 여자는 공동체로부터 축출되어, 노예살이, 종살이 혹은 매매춘 생활을 해야 했다. 어떤 결정이든지 간에, 여자는 아이와 함께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요셉이 의롭고 정의로운 사람이어서 법에 순종하는 것을 많이 고민했다고 전한다. 법을 무정하게 받아들이는 경우 일어날 수 있는 고난과 공포를 요셉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셉은 인간의 모습을 한 정의 자체이신 존재의 도래와 충만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요셉은 그의 신앙의 전통을 “먹고, 자고, 마시는” 사람이다. 그는 결정을 하고 자러간다. 그리고 요셉은 그 신앙 속에서 꿈을 꾼다. 천사 조차도 요셉이 대안의 행동을 결정하도록 돕기 위하여 성경말씀을 인용한다.

이러한 요셉의 이야기는 참으로 경이롭다! 그것은 “일이 벌어지는” 과정 안에서 발생하는 깜짝 놀랄만한 멎음의 순간이다. 요셉은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하여, 성령의 힘에 의하여 잉태된 아기와 이 여인을 구하기 위하여 법을 어기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두 가지 무서운 선택들에 직면하면서 자러갔고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키며 생명으로 충만케 하는 어떤 것을 깨달으며 일어난다. 그는 하느님의 이 아기를 자신의 아기로 입양하고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받아들였고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아기를 키운다.

 

John Everett Millais

일용노동자 요셉

이것이 요셉의 첫 번째 꿈이다. 요셉은 이 꿈 말고 두 개의 꿈을 더 꾼다. 하나는 한 밤중에 즉시 일어나 아기와 엄마를 데리고 헤로데로부터 그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이집트 땅으로 도망가라는 경고를 받는다. 헤로데가 왕이 될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미래에 자기 권력이 위협을 받을 까봐 분노하고 어쩔줄 몰라 하기 때문이다(마태 2,13).

그리고 또다시 우리는 이집트에 오랫동안 추방되어 피난민 생활을 하고 있었던 그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이스라엘로 돌아가도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요셉은 또다른 꿈에서 헤로데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나자렛에 정착하기로 결정한다(마태 2,19). 이 꿈들은 실질적인 꿈들이다. 언제나 생명을 구하고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기가 자라고 성장하기 위해서이다. 요셉은 일용노동자로서 아들에게 목수일을 가르쳤다. 예수가 빨리 그와 함께 일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아마 힘든 노동이었을 것이다. 도시를 짓는 일을 6일 동안 하고, 주님의 안식일, 하루를 그들의 날로 살았을 것이다.

요셉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전통 속에서 키웠다. 유다인이 되도록 가르쳤다. 기도하고, 윤리적인 선택을 하고, 자기의 온 삶을 예언자들과 시편에서 드러난 주님의 말씀으로 살도록 양육했다. 예수님은 요셉으로부터 이야기와 법들을 배우고, 그것들을 삶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를 배웠을 것이다.

예수님은 요셉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기도하고, 하느님의 선하심을 노래하며,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의 결실을 나누며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장 많이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로마 군인들이 점령하고 불의와 억압이 누르고 있는 땅에 관하여 알아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수차례 예수님이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는 이야기를 듣는다. 요셉은 예수님을 야곱 가문의 의로운 새싹으로 키운 사람이다(이사 27,6).

하느님의 양육자, 요셉

요셉은 피난민이고, 이집트에서는 문맹의 이방인으로, 살기 위하여 도망치고 국가적 증오와 광기의 폭력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애쓴 사람이다. 그는 낯선 땅의 나그네로 살았다. 아무도 그들을 돌보아줄 사람이 없는 마을에 정착하였다. 요셉과 가족은 있을 곳을 찾던 사람들로서, 모국어가 아닌 타국어를 말하고 하루하루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았다. 무시 받으며, 인생의 초반기에는 같은 유다 동족이나 친척들로부터 떨어져 그들끼리만 살아야 했다. 그들은 테러를 피해 도망갔으나 일생 내내 테러의 그림자 아래 살았다.

요셉은 하느님의 아들을 키우는 과제를 떠맡았고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느님의 꿈이라는 과업도 수행해야 했다. 요셉은 마리아만큼이나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았고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했다. 하느님의 아기가 잘 자라나 어른이 되고 백성을 그들의 죄악으로부터 구원하도록 온 삶을 거기에 바쳤다.

아버지 하느님은 믿음에서만 볼 수 있는 존재이고, 요셉은 아버지 하느님의 그림자였다. 하느님의 아기는 그분에게 집과 평화로운 관계를 준 요셉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예수님은 이 평화의 그늘 속에서 자랐고 날이 갈수록 지혜도 자라나고 몸도 튼튼해갔다. 예수님은 자주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이 요셉의 아들 예수란 말이오”

그리고 요셉은 아기가 자라나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자주 이렇게 기도했든가,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이사 45,8). 우리는 이 가족 앞에 선다. 그들은 우리에게 정의가 번창하고 모든 아이들이 안전하며 꽃을 피우고, 사랑받는 평화의 자리로 이 세상을 만들도록 도전한다.

아버지 하느님의 그림자이신 요셉이여,
당신께서 사랑하신 양자 예수님을 가르치셨던 것처럼
우리도 가르쳐 주소서.
복종하고, 꿈을 따라 살며,
하느님의 약속에 우리의 온 삶을 바치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아멘.

[출처] <자비가 넘치는 그리스도>, 미건 맥켄나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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