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사랑’의 표상, 로메로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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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사랑’의 표상, 로메로 대주교
  • 한상봉
  • 승인 2018.07.0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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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18

순교자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 절차를 승인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좌에 오르면서 제일 먼저 한 작업 가운데 하나가 엘살바도르의 순교자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을 가로막았던 장애를 제거하고 시성 절차를 재개시킨 일이다. 교황은 2013년 4월 20일, 그러니까 교황이 된 지 5주 만에 전 세계에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를 상기시켰다.

교황청 가정평의회 의장이며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시성 청원자였던 빈첸초 팔리아(Vincenzo Paglia) 대주교는 다음 날 이탈리아의 몰페타에서 열린 토니노 벨로 주교 선종 20주기 추모 미사에서 “오늘은 벨로 주교가 선종한 날이자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 절차가 재개된 날”이라며 “마침내 로메로 대주교가 성인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교황 프란치스코가 로메로 대주교에 대한 교황청의 시복 심사 중단 조치를 해제했다.”면서 로메로 대주교에 대한 장애 해제(unblock)를 밝혔다.

 

로메로 대주교는 군사 정권이 통치하던 엘살바도르에서 “교회는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면서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고 인권을 옹호하다가 우익 암살단에 의해 1980년 3월 24일 아침 미사 중에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은 엘살바도르 민중에게 곧바로 ‘순교’로 간주되었고, 그동안 사회정의를 위해 투신하고 압제에 저항하는 교회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엘살바도르 교회의 요청에 따라 1997년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을 검토하도록 처음 지시하고, 이듬해 로메로 대주교에게 시복 전 단계인 ‘주님의 종’ 칭호를 부여했다. 그러나 교황청 관료들은 시성 절차를 전혀 진행시키지 않았다.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라칭거 추기경(훗날 교황 베네딕토 16세)이 로메로 대주교에 대한 신심이 해방신학과 같은 ‘좌파적’ 주장에 너무 가깝다고 염려했기 때문이다.

로메로 대주교에 대한 시성 절차 진행이 지지부진한 것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교황청은 조만간 로메로를 ‘복자’로 선포할 것이라고 전했지만, 2005년 4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하면서 그마저도 흐지부지 되었다.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 문제는 해방신학에 대해 비교적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 라칭거 추기경이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그런데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013년 갑작스레 사임을 표명하고, 3월 13일 라틴아메리카 대륙 아르헨티나 출신의 교황 프란치스코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곧바로 로메로 대주교에 대한 시성 절차가 본격적인 궤도에 재진입하게 된 것이다.

이제 관건은 로메로 대주교가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교황청이 확정하는 일이었다. 이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가 여러 자리에서 로메로 대주교를 ‘순교자’라고 지칭한 바 있다. 만약 교황청이 로메로 대주교를 ‘신앙’의 확신에 따른 행동으로 암살당한 ‘순교자’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다면, 교황청은 일반적인 시성절차에 따른 규정을 면제하고 그를 ‘복자’로 선언할 수 있다. 그리고 순교자의 경우에는 그 후 한 가지 기적만 확인되면 성인품에 오를 수 있다.

오스카 아르눌포 로메로 대주교(Óscar Arnulfo Romero y Galdámez, 1917∼1980)는 1968년 콜롬비아의 메데인과 1978년 멕시코의 푸에블라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선포한 모든 것을 표상하고 있다. 그는 가난한 엘살바도르 민중과 교회를 대변할 뿐, 어느 정당이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지 않았다. 그는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가 되려는 교회의 사명에 충실했다.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목숨을 위협받을 때마다 로메로 대주교는 이렇게 예언했다. “만일 그들이 나를 죽이면, 나는 다시 엘살바도르 민중 속에서 솟아오를 것이다.” 엘살바도르(El Salvador)는 ‘구원자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로메로 대주교는 엘살바도르 내전이 한창이던 1980년 3월 24일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해 프로비덴시아 병원 내 경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다 극우 군부 세력에 의해 암살됐다. 그는 당시 군부 세력의 인권 유린 실태를 비판하고 공포정치에 떠는 대다수의 빈곤한 엘살바도르 국민을 대변하는 입장을 취해 정권의 미움을 샀다.

당시에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해방신학에 반대하던 교황청 역시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로메로 대주교의 활동에 우려를 나타냈다. 또한 교황청 관리들은 로메로 대주교가 시복될 경우 체 게바라와 살바도르 아옌데처럼 ‘정치적 영웅’으로 부각되어 정부와 교회 사이에 논란이 발생할까 우려했다. 그런데 라틴아메리카 대륙이 낳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모든 염려에도 불구하고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 절차를 승인했다.

 

로메로 대주교, 민중의 고난과 역사적 요청 안에서 거룩함 발견하다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수사하라고 지명된 라미에즈 아마야 판사의 말에 따르면, 오르덴(ORDEN)이라는 준군사적 암살단의 창설자인 호세 알베르토 메드라노 장군과 전직 첩보 장교인 로베르토 다우뷔손 소령이 살해를 계획했다고 한다. 살해당하기 바로 전날인 3월 23일 사순 첫 주일 미사에서 로메로 대주교는 군인들에게 ‘형제자매를 죽이지 마라!’고 호소했다.

“형제들이여, 그대들도 우리와 같은 민중입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형제인 농민을 죽이고 있습니다. …… 어떤 군인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야말로 그대들은 양심을 되찾아, 죄악으로 가득 찬 명령보다는 양심에 따라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울러 날마다 더한 고통을 받아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은 민중들의 아픔으로, 나는 그대들에게 부탁하고 요구하고 명령합니다. 탄압을 중지하시오!”

그가 살해당하던 날, 미사 전에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로메로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는 듯이, “순교는 은총입니다. 그 가치는 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랍니다. 하느님께서 내 생명의 희생을 받아 주신다면, 내 피가 해방의 씨앗이 되고 곧 현실로 다가올 희망의 표징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복음 말씀이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을 뿐이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라는 구절이었다.

그는 강론에서 “역사가 요구하는 생명을 건 모험을 회피하지 말자.”고 말했다. 몇 분 뒤에 성찬례를 위해 빵과 포도주를 들어 올리는 순간 한 방의 총탄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는 어떤 폭력도 반대했지만, 그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정부군에게 총질하지 말라고 한 호소가 사망증명서가 되었다.

페루의 해방신학자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로메로가 나타나기 전에 가톨릭교회는 수많은 이들이 정치적 이유로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로메로가 죽은 이유는 정치적 이유나 교회를 수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로메로 대주교는 본래 보수적인 인사로 알려져 왔다. 1917년 8월 15일, 엘살바도르의 산미겔 지역에서 태어난 로메로는 1942년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돌아와 산미겔 교구 주교비서, 엘살바도르 주교회의 사무국장, 산살바도르의 보좌주교, 교구에서 발행하는 <오리엔타시온> 편집장, 신학대학 학장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우술루탄 산티아고 데 마리아 교구의 교구장을 거쳐 1977년에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평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적 사목 방침을 염려하는 전통주의자였으며, 1968년에 열린 메데인 주교회의에서 선언한 ‘민중의 교회로 가자’는 슬로건에 반대하고, 해방신학을 ‘증오에 가득 찬 그리스도론’이라고 공박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로메로 대주교의 착좌식을 바라보면서 엘살바도르 민중은 이를 치명적 사건으로 받아들였으며, 군부와 부유한 지주들은 이제 평화가 도래했다고 반겼다.

그러나 착좌식이 있은 지 3주 만에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생각은 달랐지만 그와 오랜 우정을 나누던 예수회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가 아길라레스 성당에 미사를 봉헌하러 가다가 암살단에 의해 피살된 것이다. 그란데 신부는 공공연히 부유한 지주들을 비난했다. 엘살바도르에서 지주들은 소작농을 바위투성이 산골짜기로 내몰고 비옥한 토지를 차지했으며, 14가문의 사람들이 전체 경작지의 60%를 소유했다. 대지주들은 국가방위군, 국립 경찰, 재무성 경찰, 엘살바도르 정규군, 부패한 법조계 인사들, 대통령과 비겁한 국회의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날 밤 10시에 그란데 신부의 추모 미사를 집전하면서 로메로의 눈을 덮고 있던 비늘이 떨어져 나갔다. 미사에 참석한 수백 명의 아길라레스 농민들이 침묵 속에서 로메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들이 침묵 속에 던진 질문은 “그란데 신부처럼 당신도 우리 편에 서 주실 건가요?”였다.

이날 밤 친구인 그란데 신부가 목숨을 바친 농민들의 얼굴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본 로메로 대주교는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메데인 주교회의에서 선포한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사실상 처음 만났다. 산살바도르에서 장례 미사가 열리는 날엔 교구에서 단 한 대의 미사만 봉헌되었고, 로메로는 모든 교구민을 초대하여 탄압 위기에 놓인 모든 사제들을 도와주겠다고 공표했다. “이 사제 가운데 한 명이라도 건드리는 것은 곧, 나를 건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가톨릭 학교는 3일 동안 휴교했고, 로메로 대주교는 정부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으며, 어떤 공식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밤사이 ‘예언자’가 된 것이다. 그는 전국에 방송되는 라디오를 통해 주일마다 고문당하는 이들, 살해된 이들, 투옥된 이들, 위협당하는 이들과 서민들을 위해 강론했다. 이 강론은 ‘피의 바다에 떠 있는 희망의 고도(孤島)’였다.

두 달 뒤에 나바로 신부가 암살되고, 아길라레스 성당이 군용 막사가 되고, 1980년부터 1981년 중반까지 게릴라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2만 5천여 명이 군부에 의해 피살됐다. 군부와 지주들에 반대하는 교원노조와 인권운동 단체들은 물론이고 여성과 어린이도 군인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래도 미국 레이건 정부는 엘살바도르 정부군에 3천5백만 달러어치의 무기를 공급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로메로는 전통을 사랑하고 말수가 적은 사목자였고, 고요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비판적이고 금욕적인 그 사람이 혼란과 갈등에 휩싸인 엘살바도르의 민중 속에 녹아들어가 죽기까지 헌신했던 것이다. 만 3년 동안의 일이었다. 예언자는 오래 살지 못한다. 로메로 대주교에게 민중은 은총의 원천이었고, 복음을 더 분명히 다시 읽게 해 주었고, 교회의 미래를 보게 해 주었다.

그는 민중의 고난과 역사적 요청 안에서 거룩함을 발견한 예언자였고, 하느님의 사제였다. 그 과정에서 로메로 대주교는 교황대사를 비롯한 다른 고위성직자들에게 교회 일치를 깨뜨린다고 비난받았지만, 교회의 참된 일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사랑하던 가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하느님만이 답을 갖고 계시다고 말했다.

‘순교’라는 말은 본디 그리스어 ‘마르티리온(μάρτυριον)’에 어원을 두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행위’를 뜻한다. 필리핀 나보타스에서 빈민 사목을 하고 있는 김홍락 신부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실은 기고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생명을 바치며, 그분이 가르치신 바를 증언하거나 실천하고 죽은 사람을 우리는 ‘순교자’라 부르며 공경한다.”고 말한다.

“사실 가톨릭교회에서 성인 공경의 뿌리는 순교자 공경에 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말미암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이전, 박해 시대에 순교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으며, 신앙의 최고 정점으로 여겨졌다. 목숨을 바친 순교자뿐만 아니라 영성이 뛰어난 이들 이름 앞에 ‘성(聖)’ 자를 붙여 성인의 이름을 부르게 했던 5세기 이전, 순교자들은 이미 당시 신자들로부터 공경의 대상이었다. 2세기 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는 <호교론> 제50장에서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2000년 5월 7일,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 콜로세움에서 1만 2,692명의 그리스도인을 ‘신앙의 증인’으로 선포했다.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성공회 등 교파를 초월해 모든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을 망라한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나치에 의해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희생된 에디트 슈타인 수녀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 그리고 독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처형된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를 비롯하여, 1980년 산 살바도르에서 살해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등이 포함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 3월 7일 교황청 시성성을 통해 로메로 대주교의 전구로 인한 여성의 치유 기적을 승인한 시성 교령을 발표하면서, 시성에 필요한 마지막 단계를 승인하였다.  로메로 대주교는 10월 바티칸에서 열리는 주교대의원회의에서 바오로 6세 교황과 더불어 시성식을 가질 예정이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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