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반성하는 교회, 연대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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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반성하는 교회, 연대하는 교회
  • 한상봉
  • 승인 2018.07.02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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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17

아르헨티나 교회, 군사정권 시기 교회의 침묵, 반성하고 사과하다

위로겐 에어바허에 따르면, 다른 인권변호사인 호라시오 멘데스 카레라스가 프랑스 가톨릭신문인 <라 크로와>와 가진 인터뷰에서 “베르골료 추기경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르헨티나 친정부 인사들이었다.”며 “그가 군부 정권에 저항했는지 저항하지 않았는지 사실 여부를 따지는 비난이 아니라, 그 저항이 적극적이었는지 적극적이지 않았는지 여부를 따지는 비난은 기준이 상당히 모호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미겔 라 치티타 신부가 이탈리아 일간지 <라 스탬파>와 가진 인터뷰에서는 베르골료 예수회 관구장이 수배자들에게 성 요셉 신학교 안에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으며,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청년의 경우에는 성직자 복장을 제공하고 자신의 신분증을 지참케 해 브라질을 통해 도피시킨 적도 있다고 밝혔다. 아르헨티나 노벨평화상 수상자 아돌포 페레즈 에스키엘 교수는 “그분은 군부 정권에 협력한 분도 아니었지만 인권을 위해 몸을 바친 분도 아닙니다. 베르골료 신부는 관구장 시절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그분은 강제 연행되어 구금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조용한 외교를 펼쳤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늘 떳떳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만큼 부끄러운 허물이 많았다고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이 여기시어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젊을 때부터 저는 항상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고서 4년 만에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직책을 수행하면서 제 실수를 바탕으로 배워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엄청나게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실수와 죄를 범했습니다. 오늘 이 시점에 제가 ‘저질렀을 지도 모르는’ 죄와 허물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고 말씀드린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입니다. 저는 제가 ‘저지른’ 죄와 허물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프란체스카 암브로게티 등, 《교황 프란치스코》, RHK, 2013

 

한편 프란치스코 교황은 추기경 시절에 적어도 네 차례 이상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에서 교회가 저지른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고 사과를 청하는 데 참여했다. 그가 속한 아르헨티나 주교회의는 2000년 “우리는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뒤로 돌아서서 못 본 척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침묵한 책임이 있습니다. …… 하느님께서 이를 용서해 주시길 간절히 청합니다.” 2007년 폰 베르니치 군종신부가 군사독재 정권의 인권 탄압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자, 아르헨티나 주교회의는 당시 주교회의 의장이었던 베르골료 추기경 명의로 다시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주교회의는) 사제가 중차대한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에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 그러나 우리는 이 범죄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모든 국민이 화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범죄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길이 우리가 증오심과 복수심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베르골료 추기경은 2012년에도 사과문을 발표하고, 그해 11월에는 아르헨티나 주교들이 과거사 진상 규명을 위해 교회의 기록물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2007년에 발표한 성명서처럼 이런 결정으로 “교회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을 테지만 마침내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태도는 한국 천주교회가 일제 강점기 친일 행적과 해방 이후 독재 정권에 협력한 사실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 거듭 나려는 노력에 인색했던 태도와 비교된다.

한국 천주교회, 반성 부족한 친일 행적과 군사독재 협력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2000년 12월 3일자로 발표한 <한국 천주교회의 2000년 ‘쇄신과 화해’>라는 문서를 통해 참회문을 발표하면서도, 일제 강점기 교회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 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 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때로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이런 ‘안타깝다’는 유감 표명을 죄책 고백이라고 보기 어렵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서는 천주교인 가운데 7명(노기남 대주교, 김명제 신부, 김윤근 신부, 신인식 신부, 오기선 신부, 장면, 남상철)을 친일 인사로 등재했다. 특히 서울대교구장이었던 노기남 대주교는 그해 7월 초 정부 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었는데, 이에 대해 서울대교구 측은 “당시 노 주교의 행동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천주교회 수장’으로서 교회와 교인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였다.”고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당시 《친일인명사전》에는 종교별로는 불교 54명, 개신교 51명, 유림 41명, 천도교 29명, 천주교 7명이 등재되었다. 이에 대해 김승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은 “천주교회의 친일 인물 명단은 다른 종교에 비해 적은 편이다. 이는 천주교의 특성상 개인적 차원에서 친일 행적을 보인 사람들보다 교단 차원에서 친일 행동에 돌입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노기남 대주교.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 사전에 올라 있는 사진.(사진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 사전)

한국 교회는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이해 일본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이케나가 준 대주교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정책에 협력한 것을 통절히 사죄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일은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참된 인간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라며 “우리들은 과거의 식민지 지배와 무력 침략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반성하며, 그에 대한 역사 인식의 공유를 요청받고 있다. 그것은 두 번 다시 동일한 비극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하는 맹세인 동시에, 미래에 대해서도 책임지는 일임을 확신한다.”고 말한 것을 진지하게 배워야 한다.

그런데도 같은 해인 2010년 10월 15일 명동성당 코스트홀에서 열린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주최한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 천주교회’ 심포지엄에서는 노기남 대주교로 상징되는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회의 친일 행적에 대해 “일제의 폭압 아래서” 교회를 유지 온존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는 하소연이 터져 나왔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이장우 연구실장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노기남 대주교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것은 “하나같이 ‘민족’을 절대시하여 ‘도덕적 심판의 준거이자 역사적 판단의 잣대’로 삼은 결과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불만을 보였다.

1942년 12월 10일 노기남 대주교의 서품식 때, 노기남 대주교는 서울교구장에 취임하면서 “이제 우리 손으로 우리 교회를 유지하고, 유지할 뿐 아니라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도 열심한 가톨릭 신자가 되고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 …… 비록 약간 어렵고 불편할지라도 공연한 비판이나 한탄을 말고 일치 협력하야 무언 복종하라.”고 하면서 조선총독부의 시책에 아무런 말없이 협력하라고 요구했는데, 이조차도 교회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고 변명했다.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장우 실장은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당시 일본의 ‘국체’(國體)를 부정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자신의 죽음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파괴를 각오하지 않는 한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변호했다. 이는 똑같은 상황이 오면 다시 친일을 할 수도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좀더 진상을 살펴보자면, 조선 천주교회는 1926년 11월 15일 <천주교요리>를 공식문답으로 반포하여 신사참배 불가를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국체명징(國體明徵)’을 내세워 식민지 조선에서도 신사참배가 본격적으로 강요되자, 1935년 연례교구장 회의에서 신사참배를 허용키로 하고, 1936년 4월 <경향잡지>를 통해 신사참배를 공식 허용했다. 그해 5월 26일에는 신사참배는 종교 행사가 아니라 애국적 행사이므로 허용한다는 교황청 포교성 훈령이 발표되고, 6월 12일에는 <한국 교회 공동지도서>의 내용을 수정해 신사참배를 허용했다.

1940년에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이 만들어 매월 첫 번째 일요일을 ‘교회 애국일’로 정하여 시국 강연회 등을 행하고, 군기 헌납을 위해 매월 1인 1전씩 납부하도록 했는데, 이것을 모두 “어쩔 수 없었다.”며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협력이 아니라 조선 총독부의 강압적인 강요에 의한 타율적인 협력이었다.”고 강변했다.

한편 박정희 독재 정권에 협력하고 기득권을 누렸던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반성도 없었다.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이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자, 상황을 지켜보던 한국 교회는 서둘러 쿠데타 정권을 지지하고 나섰다. 대구교구에서 발행하던 <가톨릭시보>는 ‘군사혁명과 반공 정책: 반공은 국토 통일보다 중요하다’라는 기사를 통해 “우리가 통일을 원하는 것은 국민 모두가 잘살기 위해서인데 공산 치하에서는 잘살 수 없으므로 군사혁명정부가 국시를 반공으로 삼은 것은 현명한 정책이다. …… 또 이 땅이 공산화되더라도 통일이 되어야 한다든가 공산당의 음모를 알면서도 민주주의에 충실하기 위하여 언론 집회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1961. 5. 28; 280호)이라고 발표했다.

그뿐 아니다. 1961년 9월 10일 서울대교구는 간담회를 갖고 쿠데타 군부 정권이 추진하던 ‘재건국민운동본부’에 가입하여 노기남 대주교를 총재로 한 ‘재건국민운동 천주교 서울교구추진회’를 결성해 정부 시책에 협조했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1961년 12월 4일자로 <영육의 각 분야에서 신앙을 실천하라!>는 교서를 발표해 “오늘날 우리 혁명정부는 재건국민운동을 부르짖고 국민 각자의 부정과 부패를 일소하는 정신적 혁명을 모든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다.”면서 “우리 신자들은 신앙의 정신으로 재건국민운동에 적극 협력하라! …… 특히 신자 지도를 맡은 모든 본당 신부들은 주일 강론 중에서도 신자들에게 이러한 정신과 실천을 강조해 주기 요망하는 바이다.”라고 전달했다.

한국 천주교회가 해방 공간에서 정치세력화를 위해 나섰으며, 가톨릭의 얼굴이던 장면 총리가 집권했던 민주당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린 군사정권을 다시 지지한 것은 ‘정치권력’을 따르는 종교 집단의 비굴한 모습을 잘 드러낸다. 힘이 있으면 정치권력의 열매를 따먹고, 힘이 약하면 정치권력 뒤에 숨는 모습이다. 결국 해방 이후부터 5․16 군사 쿠데타 직후까지 교회는 여전히 일제 강점기에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고 자신을 변호했던 교회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다. 이는 교회의 애매한 ‘정치 개입주의’가 초래한 비극이다.

이러한 ‘정치 개입주의’가 지역교회 현상으로 극명하게 드러난 곳이 천주교 대구교구다. 대구를 ‘이효상의 후예들의 도시’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62년 대구대교구의 서정길 대주교의 권유로 <천주교회보> 편집장을 역임하고 <가톨릭청년>에 왕성한 기고 활동을 벌였던 이효상(이문희 대주교의 부친)이 민주공화당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이효상은 1963년 국회의장으로 당선된 뒤로 8년(6대, 7대) 동안 의장직을 맡았으며, 1972년에는 유신 체제 아래서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 당 총재 상임고문 등을 맡으며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17년 동안 요직에 있었다. ‘박정희의 사람’으로 분류되는 이효상은 국회의장 시절인 1969년 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박정희에게 영구 집권의 길을 열어 주었다.

한편 대구교구 소유의 <가톨릭시보>는 1963년 3월 16일자 ‘정치 체질 개선의 본뜻-우리는 전환기에 서 있는가’라는 사설에서 “교회는 현실 정치에 직접 간여하기를 극력 피하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 특히 공식 장소에서 정치에 언급하거나 사담으로라도 교회 울타리 안에서 그런 것을 비친다면 좋은 표양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해묵은 ‘정교 분리 원칙’을 다시 내세웠다. 1971년 4월 17일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효상은 민주공화당 경남지부 연차대회에서 “대통령으로 모실 분은 박정희 씨 오직 한 분밖에 없다.”면서, “후진국에 있어서 군 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엔 흔히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고 있다. 국가의 지도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라야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다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 정권 시절에 초법적 권력을 휘두르고,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민주 인사들을 감옥에 보내며 종신 집권 체제를 다졌다. 1976년 삼일절 명동성당에서 일곱 명의 천주교 사제들과 문익환, 김대중 등 재야 인사들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 사건이 발생하자, 이효상은 “만일 존엄한 지성소가 정치의 선전장 혹은 정치의 소굴이 되었다면 이것이 간단히 묵과할 문제이겠는가?”라며 민주화운동에 동참한 사제들을 공박했다. 자신들은 부도덕한 독재 정권에 기생하며, 정권에 도전하는 사제들은 ‘정치사제’로 매도했다.

대구대교구는 1980년 광주 학살을 딛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도 우호적 태도를 견지했다. 제5공화국이 선포되고, 해산된 국회를 대신해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는 각종 악법을 쏟아 냈다. 이때 입법회의에는 대구교구의 이종흥, 전달출 신부가 참여했다. 특히 전달출 신부는 대구교구 소유의 <대구매일신문>과 <가톨릭신문사> 사장 출신으로 한국반공연맹 이사를 역임했으며, 그 후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대구교구의 권력 유착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방송사와 언론사들이 강제 통폐합될 때 <매일신문>을 유일한 대구지방지로 남게 하는 특혜를 누렸다.

결국 교회의 ‘정치 개입주의’는 ‘정치 불간섭주의’와 동전의 양면처럼 작용한다. 이들은 실질적으로 정치권력과 유착해 기득권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정치 개입주의’를 작동시키면서, 교회 안에서는 ‘정치 불간섭주의’를 표방하면서, 교회가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길을 차단했다. 1970~1980년대에 거쳐 대구뿐 아니라 청주교구와 대전교구, 수원교구 등의 고위 성직자들은 실제로 정치 불간섭주의를 표방하면서 독재 정권과 사회 불의에 침묵함으로써 성지 개발 과정의 특혜와 꽃동네 등 사회복지기관 등을 둘러싸고 사실상의 종교적, 사회적 이득을 취해 왔다. 그 결과 해당 교구는 교황청이 신설한 ‘정의평화위원회’도 오랫동안 가동하지 못했으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참여하는 사제들도 소수였다. 그러나 최근에 대구교구, 대전교구, 수원교구 등에 정의평화위원회가 재출범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현상이다.

한편 독재 정권을 비호했던 교회 내 세력들은 과거에 대한 한마디 반성도 없이, 같은 시기에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나섰던 김수환 추기경을 브랜드화하면서 다시 이득을 챙기려는 모습마저 보인다. 이 파렴치를 무어라 말해야 좋을까? 새삼 프란치스코 교황이 추기경 시절 아르헨티나 교회의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고 사과를 청하던 모습이 새삼 아름답게 보인다.

대통령과 갈등하는 추기경, 베르골료

한편 베르골료 추기경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에 그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의 독재정권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애도와 위로는 물론이고, 과거 정부인사에 대한 용서와 화해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1984년 처음 한국 방문했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5월 4일 광주민중항쟁으로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광주에 방문해 무등경기장에서 ‘용서와 화해’를 주제로 미사를 봉헌했다. 당시 언론에선 “교황, 광주에 ‘화해’ 복음 선포”, “용서는 위대하다, 광주 무등벌의 뜨거운 화합” 등의 제목으로 기사를 올렸다.

베르골료 추기경(현 프란치스코 교황)

교황은 이 자리에서 “진실과 용서”를 요구했지만, 언론에서는 교황이 전두환 대통령의 전용헬기 편으로 광주로 이동했다는 소식이 더 중요했다. 자칫 교황의 방문이 5.18광주학살을 자행한 정권에 대해 광주시민들이 용서하라는 모양새로 비추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과거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의 만행에 대해 “우리가 아무리 용서하더라도 상대방이 회개하고 보상할 때에만 용서를 받게 된다”고 분명히 말했다. 프란체스카 암브로게티 등과 나눈 인터뷰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누구도 ‘너를 용서해. 여기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라고 말할 수 없다”고 답했다.

“제가 용서를 베풀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만, 이를 받는 측에서도 제대로 수용할 수 있을 때 효과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잘못을 회개하고 보상하려고 할 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는 것과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은 별개입니다. 만약 제가 어머니를 구타하고 그 후에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기는 하였지만, 이후에도 어머니의 행동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또 어머니를 구타할 것을 내 스스로 알고 있다면, 비록 지금 어머니가 나를 용서해 주시더라도, 내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교황은 “군사정권 말기에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실종되기까지 했는데, 이런 인권유린이 국가에 의해서 자행된 것일 때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말했다. 한편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 관구장 시절에는 군부독재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지만, 추기경 시절에는 경제위기로 국민들이 먹고사는 문제로 곤란을 겪게 되자, 국민들을 대변해 국가권력에 대한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2001년 12월 아르헨티나 정부의 예금인출 금지 조처로 폭동이 일어나 5월 광장에 군중이 운집했을 때, 한 여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경찰을 주교관 창문으로 보고서 치안 장관에게 전화해 항의했다. 이 당시 베르골료 추기경은 이미 신자유주의와 IMF의 처방에 문제의식을 느끼며 점차 정치참여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2000년 페르난도 데라루아 대통령 시절에는 강론을 통해 슬픔에 젖어 한탄만 하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전했다.

“저는 간혹 제 스스로에게 질문해 봅니다. 만약 사회가 당면한 현실을 외면하고 슬픔에 젖어 한탄만 한다면, 모든 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생각하여 원하는 바를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면, 또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작은 기대에 만족한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 우리는 국가 시스템이 ‘불신의 그림자’라는 큰 그늘에 갇혀버렸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정부의 약속과 발표는 장례행렬처럼 공허하기만 합니다. 모두가 망자의 일가친척만을 위로할 뿐이지, 막상 아무도 죽어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카 암브로게티 《교황 프란치스코》 2013, 재인용

2003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과 후임인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대통령과도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어 왔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각자의 어깨에 조국을 짊어질 것”을 요청했던 베르골료 추기경이지만, 이듬해인 2004년에는 정부의 태도를 다시 비판하며 국민들에게 “우리는 너무나 큰 소속감을 느끼는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너무나 뛰어난 혜안을 갖다 보니 장님이 되어 버렸다”고 호소하며 “압제자와 살인자의 증오와 폭력을 모방하는 것은 그들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이라고 에둘러 비판했다. 2012년 5월 25일 아르헨티나 건국 기념일 미사(테데움)에서는 정부 고위관료들이 대대적으로 참석한 가운데 정치권력 하나의 ‘이념’만을 내세우는 것은 ‘기만’이라고 비판했다.

“탐욕스럽게 권력을 움켜쥐고자 하는 행위,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는 행위,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행위들이 우리를 어디로 몰고 가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 때문에 우리의 양심은 마비되고, 광기에 빠지게 됩니다.”

위르겐 에어바허는 <교황 프란치스코>(가톨릭출판사, 2014)에서 “이러한 말이 당시 집권하고 있던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두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200년 이상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교좌 성당에서 봉헌하던 건국 기념일 미사에 대통령이 참석하던 관행을 깨고, 2005년부터 추기경의 정부비판 강론을 빌미로 다른 성당에서 봉헌하는 미사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추기경이 교황이 되면서 2013년 3월 18일 교황으로 베르골료 추기경을 알현하게 되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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