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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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 김경집
  • 승인 2018.07.02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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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칼럼]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 좋은 것은 다함께

최근에 복음서를 읽으면서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왔어요. 예수님께서 나자로의 집에 가셨을 때, 마르타는 곧바로 주방으로 갔어요. 귀한 선생님이 오셨으니 마땅히 대접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마리아는 쪼르륵 예수님한테 가서 채팅을 해요. 마르타가 가만히 생각하니 열 받잖아요. 그래서 예수님한테 가서 따져요. 그런데 정작 마리아에겐 한 마디 안 하죠. 결론은 마리아더러 주방으로 가라고 그러세요, 하는 거죠. 왜 나만 일하냐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 대답은 예상 밖이었죠. 그냥 놔주라고 하니까요. 마르타는 예수님이 야속하기도 햇을 겁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그래요. 내가 밥 얻어먹으러 온 게 아니라 복음을 전하러 왔는데, 더 중요한 게 뭔지 생각해 보라는 거지요. 제가 보기엔 마리아가 좀 이상한 여자 같아요.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알았으면 언니랑 같이 가야잖아요. 그런데 왜 혼자서 가요.

교회 안에서는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면서, 관상생활을 하는 수도자나 사목하는 사제들을 높이 평가하죠. 일상생활보다 이게 더 중요하다는 것인데, 본당에서 이건 주로 남자들의 몫이 됩니다. 총회장도 다 남자잖아요. 자모회, 성모회, 헌화회 등 몸으로 때우는 건 다 여자를 시키고, 결정적인 역할은 남자들이 독차지 하는 게 문제입니다. 여자들 가운데 변호사도 있고 회계사도 있을 텐데, 중요 직책은 남자들이 해요. 이게 뭐 벼슬이라고 말이죠. 어떤 본당에선 남성 회장과 여성 부회장을 두지만, 사제가 바뀌면 부회장 자리도 없어지죠.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린 채 반 세기가 지났는데 사실상 변한 게 없어요.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한 예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Johannes Vermeer) 1632~1675

여중이나 여고 나오신 분 계시죠. 요즘 미투 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아직도 여중, 여고가 있다는 사실이 저는 불편해요. 화가 나요. 우리는 대부분 성장하면서 철저하게 의무의 삶만 배우고 권리는 배운 적이 별로 없어요. 우린 대부분 강자의 요구에 익숙하고 규범에 익숙해요. 여자중학교과 여자고등학교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긴 별개 집단입니다. 앞에 붙은 ‘여자’라는 딱지가 어떻게 작동할까요? 여자답게 어쩌구 저쩌구 하는 동안에 은연중 무작정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이런 습속이 가장 오래,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사회적으로 미투운동이 불어도, 교회는 여기에 불가근불가원(不可近 不可遠)합니다. 적당히 대처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우리 교회의 한계이자 본질이 아닐까 생각하면 답답해져요. 사람들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비교적 ‘진보적이라고 착각해요. 그것은 한국 개신교가 지나치게 극우적이고 보수적이고 퇴행적이라서 그래요. 가톨릭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입니다. 그런 태도가 이따금 우리를 복음에서 눈멀게 하고, 여성들을 교회 주변부로 밀쳐냅니다.

안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

나는 뭔가 헛갈릴 때는 무조건 복음서를 봐요. 복음서는 나한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히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처럼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불편하고 껄끄러운 일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과연 복음대로 살 수 있는지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그런데도 내가 살면서 못된 것들과 손을 잡고 싶을 때, 그런 것들과 손잡지 않으면 뭔가 손해 볼 것 같을 때, 복음서는 이런 아쉬움을 떨쳐 버리고 더 가치 있는 선택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사실 교회만 바뀌어도, 신자만 바뀌어도 대한민국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어렵죠.

교회가 잘 바뀌지 않아요. 신자들도 일상에서 사는 모습만 보면 다른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어요. 그래서 악이 선을 이기고, 허위가 진리를 이기는 거죠. 우리 교회가 너무 나태하고 무력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가 그야말로 조금만 더 복음적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 혼자는 힘들어도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고민하고 실천하면 가능할 것도 같아요. 복음적 확신도 강해지고요.

 

사진출처=pixabay.com

복음서의 선한 포도밭 주인 생각이 듭니다. 그 주인은 새벽에도, 아침에도, 점심 때도 일군을 데려옵니다. 심지어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도 사람을 데려옵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지불합니다.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은 ‘공정함’에 대해서 따지고 들지만, 포도밭 주인에게 공정한 임금은 노동시간이 아니라 일꾼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이지만, 예수님에게 모든 기준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2018년 최저임금은 시급 7,530원입니다. 교사의 경우에, 저는 최저임금이 얼마인지 모르는 사람은 교사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사는 해당 교과목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일할 때 필요한 지식을 전달해 줘야 합니다. 그중 하나가 노동의 권리입니다. 아이들도 아르바이트로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일합니다. 어른들은 학생들이 어리다고 이렇게 후리고 저렇게 꺽고 착취합니다. 이럴 때 아이들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학교는 지식만 아니라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다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기도하고 일하라.”고 하였죠. 덧붙여 공부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교회에선 신자들이 공부하는 걸 좀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적당히 하면 문제 없겠지만, 열심히 하면 겁을 내요. 공부하면 자기 인식이 생기고,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그래서 따지기 시작하고 심지어 대들고,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기도 한다는 거지요. 그렇지만 신자들도 제대로 배우고 공부해야 제대로 신자 노릇을 할 수 있어요. 교회에서 가르쳐 주지 않으면 우리끼리 모여서라도 공부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측은지심이다

요즘 가장 마음 아픈 사람들이 청년들입니다. 취업도 안 되고, 연애도 포기해야 하는 청춘이라면 얼마나 고민이 많겠습니까? 미래에 대해 포기한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어도 존재론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살자가 한 해에 4천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기성세대들은 청년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없어요. 우리 교회처럼 말이죠. 그래서 한다는 말이 “아프니까 청춘이다.”입니다. 아프면 청춘이 아니라 환자입니다. 그러니 어디가 아픈지, 왜 아픈지, 얼마나 아픈지 물어보고 치료해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알리바바(阿里巴巴集团)의 창업자, 마윈

세계적인 중국 쇼핑몰 알리바바(阿里巴巴集团)의 창업자인 마윈을 아시나요? 마윈은 젊었을 때는 취업이 되지 않아 KFC 매장 매니저를 비롯해 여러 군데 지원서를 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영어를 잘해서 영어 강사 및 관광 가이드로 일을 하며 생계를 잇기도 했지요. 그가 항저우 전자 대학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기도 했는데 당시 그의 수입은 한 달에 12달러(한화 12,000원) 가량에 불과했습니다. 우연히 만리장성 가이드를 하다가 ‘야후!’의 창업자 제리 양을 만나서, 그 친분으로 투자를 받아 알리바바를 창업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일본의 손정의 회장에게 2,000만 달러(한화 약 2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알리바바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주목했던 계층은 시골에서 대도시로 돈 벌러 온 농상공인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명절을 싫어하는데, 삭막한 대도시에는 가난하고, 만날 사람도 없고 축하해 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발렌타이 데이에는 연인끼리, 광군제 때에는 대학생들이 서로 모여 밥 한 끼 없었죠. 그런데 이 하급 노동자들에게 마윈은 “너 자신에게 선물하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너 자신이니, 남이 선물하지 않는다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알리바바에서 이들에게 상품을 정말 싸게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온라인으로 거의 80~90퍼센트 싸게 상품을 파는 거죠. 미국의 블랙데이는 오프라인으로 줄을 서서 사지만, 알리바바는 인터넷을 이용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측은지심입니다. 공감입니다. 복음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약자에 대한 연민입니다. 그게 빠지면 복음정신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사에 열심히 참여하고, 기도를 하더라도 성당 문밖으로 나서면 공감도 없고 측은지심도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영성이 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것은 신학적 교리적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입니다. 다만 영성을 의제로 만들고 문장으로 만든 까닭은 그 문장이 내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해주고, 내 삶의 일관성을 유지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한꺼번에 바뀌지 않습니다. 자선이나 기부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위해 고민하고, 그들을 인격적으로 마음을 나누어 주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양성하는 못자리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생길 겁니다.

*이 글은 2018년 5월 13일 가톨릭일꾼 2주년 기념미사에서 이루어진 강연 내용입니다.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생각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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