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사라지든가 다시 태어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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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사라지든가 다시 태어나든가
  • 김원
  • 승인 2018.06.19 0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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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BURNING> , 2018, 이창동 감독

[김원의 문화칼럼]

파주에 가려면 자유로를 타야 한다. 다들 그렇게 안다. 가장 속박이 심한 탈출불가의 상황 같은 나날을, 그는 ‘자유로’를 오가며 살게 된다. 이창동 감독의 8년만의 신작인 영화 <버닝>의 주인공 종수의 근황이다. 왠지 운명이라고 말하기에도 떨떠름한 구질구질한 ‘팔자소관’ 느낌이다. 종수는 아버지가 남겨준 것들에 이리저리 결박당한 채다. <버닝>은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 분)가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 분)를 만나고, 그녀에게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 분)을 소개 받으면서 벌어지는 비밀스럽고도 강렬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종수를 “내 유일한 친구”라고 부르는 해미는, 그 자유로를 통해 파주라는 옛집과 옛 우물을 오래 전 떠나갔다. 겉으로는 후암동 좁디좁은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나름 잘 지내는 듯 보인다. 그러나 '카드빚'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불안하고 갑갑한 느낌부터 든다. 어쩌면 해미에게는 ‘빚 갚기 전까진’ 그 어떤 자유도 없다. 해미는 누구를 만나든 저울질 했을 것이다. 이 사람은 나를 구해 줄 수 있을까? 

 

“이제 진실을 얘기해봐”

어렸을 때 우물에서 자신을 건져주었다는 종수는, 지금은 그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빈털터리 젊은이다. 아니 빈털터리이기엔 짊어지고 있는 게 너무 많다! 종수나 해미나 지고 있는 ‘등짐’에 눌려 있다. 돌덩이보다 무거운 '빚'에 눌린 해미는 고향 파주를, 아프리카 여행 중에 만난 벤의 포르셰 자동차에 태워져 "지나가는 길"에 들른다. 대남방송이 들려오는 마당에서 몇 시간 머물다 다시 벤의 차에 얹혀 떠나간다. 그리고 이것이 극중에선 해미의 마지막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유로를 타고, 현재까지 우리가 갈 수 있는 끝 지점은 막힌 벽이다. 판문점이라는, ‘문(門)’이 들어간 지명은 그래서 아이러니 자체다. 문이자 벽이다. 해미의 ‘실종’ 이후 온갖 기억의 편린들 속에서 힘겨워하던 종수는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한다. 왜 하필 글이었을까?

아마도 글쓰기만이 그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선택' 사항은 아니었을까? 글을 쓸 수도, 안 쓸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쓴다는 선택 말이다. 다른 모든 일들은 우산도 없는 상태에서 준비 없이 맞는 비처럼, 그저 종수에게 들이닥쳤다. 일어나버린 일들은 이미 손 쓸 수 없다. 어쩌면 글쓰기만이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의 ‘핸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통제가 아니라 선택인 듯하다. 하면 뭔가가 달라지거나 이루어지는 세상. 뭔가를 던지면, 반응이 돌아오는 세상. 분명히 액션과 리액션이 공존하는 세상 말이다. 유독 지금의 청춘들이 겪는 그늘은 침울하다. 다른 세대가 겪은 시간들과 비교했을 때 이상하리만큼 굴절돼 있다. 빛과 그림자가 지나치게 선명히 갈려 있다. 둘 사이의 접점은 없다. 해미의 방에 하루에 한 번 잠시 스치는 남산타워 유리창의 반사광처럼. 야박하고 괴이하다.

“한국에는 개츠비들이 너무 많아”

종수는 해미의 말을 유일하게 따라한 사람이다. “이제, 내가 고양이가 없다는 것만 잊으면 되는 거야?”라고 말하던 순간의 종수는, 자연스럽게 유창했다. 여유마저 느껴졌다. 그 순간 해미에게 그는 반사광이 아닌 공감이었다. 종수가 해미의 말을 받아 ‘귤’에서 ‘고양이’로 응용해 되돌려주었을 때, 해미는 빈 우물에서 울리는 상상의 메아리가 아닌 생생한 이야기꾼이 된 셈이다. 해미가 종수에게 키스한 건 그 직후다.

그런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소개한 벤은, 종수에겐 불길함 자체다. 하는 일도 없이 부유한 벤에 대해, 종수는 “개츠비네~”라고 자조하듯 말한다.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 외에도,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어쩌면 남성 독자들은 주인공 개츠비의 굴곡진 삶을 '뼛속에서부터 울리는 베이스'로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세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가 왜 그런 사람인지를 이해한다는 차원에서 말이다.

벤은 자신의 손으로 부(富)를 축적한 것도 아니고, 야망도 노력도 심지어 감정조차 없이 부유(浮遊)한다. 스스로 뭘 하는 게 아니므로 개츠비라기보단 유산상속자 느낌이다. 다만 벤을 마주한 또래 남성들의 선망과 절망이 동시에 느껴지는 단어이긴 했다. 종수는 참 쓰라리게 그 말을 내뱉는다. 영화를 다 보고나면 벤은 훨씬 더 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벤은 자기의 ‘놓여 있는 자리’를 너무 잘 아는 자로서, 그 자리를 이탈하지 않은 채 갑갑증을 해소하려는 걸로 보인다. 두 달에 한 번쯤 쓸모없고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그의 비밀스런 취미 혹은 ‘완전범죄’는, 역으로 그로 하여금 절대로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장치일 수도 있다.

 

“난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워요”

그런데 해미는 어디로 갔을까? 과연 어떻게 됐을까? 해미는 세상의 방식과는 다른 자기만의 해석을 갖고 있다. ‘귤’이 있어도 없어도 스스로는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없다는 사실을 잊기’를 받아들이는, 성냥팔이 소녀 같은 사고를 거부한다. 해미는 아프리카의 지는 석양을 본 이후, 뭔가가 변화되었다. 자취 없는 그녀를 두고 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말하고, 종수는 ‘비닐하우스처럼 태워졌다’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태운다는 말에 홀린 종수와 벤 사이에서, 해미는 홀연히 모습을 감춘다. 새벽안개나 노을처럼 말이다. 해미는 석양 아래서 웃옷을 벗은 채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춘 이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종수 또한 어느 시점에서 그렇게 된다. 강을 건넜으면 지푸라기 뗏목은 불살라버려야 한다. 방편(方便)이라는, 흔적으로 남은 옛이야기의 지혜다. 고귀한 도전이다. 뗏목을 태우고 두레박을 타고 내려가야 새로운 샘을 만난다. 역설적인 희망이다.

해미 외에 벤의 포르셰 옆 좌석에 앉았을 ‘그녀들’에 대해 생각한다. 팔찌나 장신구들로만 벤의 집 화장실 서랍 속에 남은 그녀들의 자취. 그것은 기념품일까, 전리품일까? 뭐가 됐건 벤에게는 그저 한동안의 ‘놀이’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기괴한 이 간극. 눈물을 아예 흘리지 않는 부유한 남자와, 그의 ‘재미’로 시작되었으나 끝내 ‘연민’으로까지는 가지 못한 채 ‘하품’에서 멈춰지는 그녀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한쪽은 절박하고 다른 쪽은 권태롭다.

진지해질수록 그녀들은 동물원 우리 안의 동물과 진배없어진다. 벤의 부유한 친구들은 그저 상품 평가하듯 단순비교로 저번 여자와 이번 여자를 ‘구경’했으리라. 어떻게든 벤의 눈에 들어 간택되고 싶은 그녀들의 간절한 ‘무대’. 구경꾼과 구경거리의 자리는 이미 확고하게 정해져 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벤의 유일함이 되고 싶었겠으나, 벤에게는 그저 비교급의 고만고만한 재밋거리이다. 곧 싫증나면 버려질.

벤이 쓰는 단어, ‘베이스’라든가 그것을 향해 가는 ‘페이스’라든가 등등은 종국엔 죽음을 향해 있다. 벤의 마지막 표정이 몹시 인상적이다. 한없는 희열에 찬, (드디어) 베이스에 푹 젖은 ‘바랄 게 없는’ 얼굴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죽음 쪽으로만, 경도돼 있다. 주변의 어떤 것을 살리거나 살게끔 돕지 못하고 ‘시간을 죽이고’, 죽음의 미학을 예술적 취미로 즐기고, 요리마저 ‘제물’이 주는 기쁨을 위해 한다. 주말의 성실한 가족모임인 미사도 말하자면 ‘제례’다. 죽음을 향유하고 죽음이 풍기는 ‘베이스’에서 짜릿함을 느낀다. 그 맛으로 겨우 일상이라 여기는 것들을 유지한다.

관객 입장에서는 벤이야말로 미스터리이자 ‘메타포(은유)’로 비칠 수 있다.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처럼 읽히기도 하며, 유난히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대사를 많이 한다. 그의 외양이나 조건은 오히려 진짜 현실의 한국의 젊은 부자를 묘사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상류층의 문화나 분위기 전반이 살림이 아닌 죽음 쪽으로 기울어 있음 또한 꽤나 현실적인 포착이긴 하다. 벤은 이 영화에서 가장 명확한 캐릭터인 동시에 가장 모호한 베일이다.

 

네 감정을 지켜라

해미는 자신의 ‘우물’을 지켰으나, 종수와 재회했을 때까지도 마른 우물이었다. 어쩌면 (아직)빠지려야 빠질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우물에 풍덩 몸을 던진 건 종수다. (사라진) 해미의 뒤꿈치를 밟아 마치 오르페우스처럼 기꺼이 지옥에라도 따라 들어가겠다는 듯이. 가장 무력한 자의 사랑은 외려 가장 신화적인 원초성에 기대고 있다. 몰아(沒我)와 완전한 연소(燃燒). 해미가 아니고는 발원(發源)되지 않았을 감정으로 인해 그는 발화(發火)되었다. 해미의 ‘실제’ 존재여부와 별개로 말이다.

자신에게 남은 남루한 것들과는 도저히 조화되거나 섞일 수 없는 해미에 대한 감정. 그 불꽃을 지키는 방법은 밖으로 꺼내놓고 그 속에서 스스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뿐이다. 영화 <버닝>이 극단적으로 다만 종수의 시선, 종수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해도 이 불꽃이 주는 울림은 강력하다.

무엇보다 종수의 그 분노조차 해미와의 한 번의 정사, 그러니까 쾌락이 주어지고 난 뒤에야 찾아진 감정이다. 어쩌면 분노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차단책은, 쾌락을 아예 모르도록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정서적으로 거세당한 집단인 지금의 N포세대에게는 소름끼칠 얘기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고 고래(古來)로 사람을 부려먹어 온 설계방식이다. 노예 상태에서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분노 이전에 사랑의 경험이 있어야 했다. 한 비밀의 시작이다. 분노는 이차적 감정일 뿐, 원초적 감정이 아니다. 느끼지 못한다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직 피가 뜨거운 모든 이들에게 영화 <버닝>은 불을 지르며 촉구한다. 아무것도 빼앗기지 말라. 네 감정을 지키는 것이 너의 생명력을 지키는 일이다. 두려워 말고 너의 길을 가라.

김원 로사
문화평론가. 극예술을 통한 세상 읽기가 세상 잇기로 이어지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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