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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예" 안에서 육화된 믿음[구원의 역사: 신앙의 진전-5]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8.06.05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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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사도들의 서간들을 통해 전혀 새로운 차원의 믿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제시되었다. 그것은 예레미야와 에제키엘 예언자가 일찍이 암시하였고 예언자 요엘에 의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주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이었다:

"그런 다음에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리라.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
그 날, 나는
남녀 종들에게도 나의 영을 부어 주리라."
(요엘 3,1-2)

우리는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고 나신 후 성령이 그에게 내려오신 것을 보았고, 오순절 그 성령이 또 다시 사도들을 능력으로 채우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이 새로운 믿음을 구현한 첫 사람은 “주님의 여종을 살펴주소서”라고 말한 한 소녀였다. 메시아를 낳게 될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아무 조건없이 예라고 대답한 것은 마리아였다: “주님의 뜻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루가 1,38).

 

프라 안젤리코, 주님 탄생예고

마리아의 "예"라는 응답: 믿음의 최종단계

믿음의 최종 단계는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사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지체없이 예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그 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자 하신다. 그 분은 인류의 완전한 구원이 우리 각자 안에 일어나 우리를 통해 세상의 구원을 이루시기를 바라신다.

이 단계의 믿음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우리는 진정 하느님의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 빛나기를 원하시므로 이 부르심에 대해 우리가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분의 은총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투명해져서 그분이 우리를 통해 빛을 발하시도록 해야 한다. 자신이라는 통로를 열어 그분이 우리를 통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성서에 나오는 인물 중 이것을 완전하게 이해한 첫번째 사람이었다. 그 분은 하느님께 예라고 대답했으며, 자신을 완전히 열어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서 사람이 되시어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그 분은 당신이 잉태한 아기가 진정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성령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를 낳으셨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사랑하셨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당신의 구원 메시지를 알리셨다; 예수님의 행동들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이 표출되었다.

교회가 받은 소명: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몸으로

마리아의 완전한 응답으로 말씀이 사람이 되시자, 하느님은 부활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육체를 만드셨다. 예수는 당신 존재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너무나 친밀하셔서 그 분을 우리말로는 아빠가 되는 압바(abba)라고 부르셨다. 그 분은 역시 아버지의 이끄심에 완전히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갈등, 고통과 죽음까지도 견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 나타난 하느님의 육화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당신의 성령으로 살아 움직이며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새로운 지체를 창조하셨다. 그 창조는 성령강림절에 시작되었고 세례로써 새로운 지체를 입은 사람들을 통하여 자라났다. 이 새로운 지체의 내적인 삶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며 그 외적인 사업은 예수님이 하시던 사업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교회가 받은 소명은, 개개인의 그리스도인들의 소명 역시,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눈과 귀 입과 손이 되어야 하며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을 바꾸도록 하는 기능을 해야만 한다. 이 부르심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구현 시키는 가장 심오한 차원의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명령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소명이며, 우리를 통해 흐르는 하느님의 생명의 힘으로 변화되고 상황을 변화시켜야 하는 소명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교회를 아무리 둘러봐도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로 가득 찬 사회적인 지체를 볼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신들을 기꺼이 내어놓을 만큼 세상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찾을 수 없다.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가진 것을 주는 사람, 고통 받는 종이 그러했던 것처럼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부서지기 쉬운 이들을 많이 볼 수 없다.

하느님과 이웃과 세상에 자신을 승복하라

교회가 받은 소명은 전적인 승복으로의 초대이다: 하느님과 이웃과 세상에 자신을 승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혼자 개인적으로 해서는 안되며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함께 이뤄야 한다. 사랑을 주고받고 생활을 나누며 상처가 치유되고 약한 점이 강화될 때 우리를 통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증폭될 것이다. 하느님은 교회를 통해 강력한 방법으로 활동하실 수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통해 증가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교회생활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우리들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함께 기도 할 때면 성령이 우리를 통해 기도를 드리고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한 지체로서 활동할 때면,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고 우리 스스로 절대 이루어 내지 못할 일을 이루게 하신다.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 사랑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통해 희망을 가지신다; 심지어 우리를 통해 믿음을 가지신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믿음, 희망 그리고 사랑의 선물을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달리 표현한 것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선물이다; 모든 것이 다 은총이다. 이러한 선물들에 우리 자신을 열어 놓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 은총의 통로가 된다.

우리가 불행하게도 이런 그리스도교적 소명을 온전히 수행하는 교회를 많이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열성적으로 온전히 응답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삶이 이 세상에 존재했고 또 현재 존재하고 있는 많은 공동체를 통해, 또한 과거와 현재의 성인들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넷째 단계의 믿음의 모범을 잘 보여주고 있는 성인 두 분이 바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다.

성 프란치스코를 모범으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 프란치스코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매우 관대하였다. 청년이 되어 자신을 희생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는 군인의 삶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대신 그는 포로로 붙잡혔고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으며 그것을 계기로 하느님이 자신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더욱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를 재건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자신이 즐겨 기도 드리던 페허가 다 된 교회를 복구하기 시작한다. 후에 가난에 관한 복음의 부르심에 관해 묵상하면서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포기하고 하느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리라고 온전히 믿으며 기쁜 마음으로 구걸하러 다녔다.

점차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로 가득했던 프란치스코의 겸손한 삶은 그 자신이 살기 시작한 하느님의 삶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많은 남녀를 매료시켰다. 그들이 이러한 공통의 믿음의 삶에 투신하게 되면서 중세 교회 전체가 새로워지고 재건되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의 도구가 되기만을 바랬고 도구가 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통해 하느님은 성인이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일을 이룩하실 수 있었다.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를 모범으로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성녀 데레사 역시 이런 믿음을 아름답게 형상화시킨 분이다. 그녀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자신을 항상 작은 아이로 묘사했다. 그녀가 처음 주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높은 층계의 맨 밑에 작은 아이의 모습으로 서 있고, 하느님이 꼭대기에서 당신의 팔을 뻗어 자신을 부르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분은 “데레사 어서 오너라 어서” 라고 부르고 계셨다.

그 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 데레사는 그 분의 미소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작은 발걸음을 하나씩 떼어놓기 시작했다. 꼭대기에 거의 다다르자 하느님은 몸을 굽혀 그녀를 안으셨다. 은총의 순간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아, 하느님은 그녀를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만드셨다. 그분의 안전한 팔에 안겨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 데레사는 계단을 오를 수 있는 힘을 주신 분이 다름아닌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녀에게 영감을 주셨고 방향을 알려 주셨으며, 데레사가 매 걸음마다 예라고 응답하는 자신의 몫을 채워야 했어도 그 모든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구원하시도록 한 것이다.

그분께서 붙들어 주신다

우리가 실천하는 믿음도 프란치스코와 데레사와 같아야 한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당신의 뜻을 행하고 당신과 일치하라고 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들의 결정들과 행동들을 통해 우리를 위한 그분의 가르침을 찾아내며,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이 더 큰 사랑과 더 큰 베품과 더 큰 자유로 인도되는 한 우리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실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그것은 우리가 귀를 기울이고 있기만 하다면 당신께서 우리를 바로잡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넘어지거나 떨어질 염려를 할 필요가 없는데, 그 분께서 우리를 즉시 붙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단계의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하고 순진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위대한 일을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분은 당신이 우리 안에서 커지시기를 원하실 뿐이다. 우리가 그러기로 허락한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 위대한 일들을 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만들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저 매 단계마다 승복하고 신뢰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매 순간 그 분 안에서 희망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약속을 믿고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며 그 약속에 일치하는 선택을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장의 첫 부분에서 보았듯이, 이것을 처음으로 완전히 이해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마리아였다.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하느님은 살을 취하시고 독특한 방법으로 육화 되셨다. 그녀는 가장 충만하게 믿음의 삶을 살았다. 마리아는 아브라함에게 있어 믿음이 가졌던 의미, 이스라엘과 그 예언자들에게 있어서의 믿음의 의미를 뛰어넘어 그리스도인 전체를 위한 의미로 확대시켰다.

마리아는 구약과 신약이 만나는 시점에 살았고 한 시기가 다른 시기로 넘어가는 것을 도왔다.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그녀는 앞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이 어떠해야 된다는 모범을 보여 준다. 그 분은 또한 유대 여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영성이 항상 어떠해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이기도 하다. 하느님이 그녀 안에서 그녀를 통해 이루신 일들을 찬양한 마리아의 기도인 마니피캇은 구약 믿음의 온전한 의미를 신약적 차원에서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루가 1,46-55)

믿음의 사람으로서 마리아는 완전히 주님을 향해 있다. 하느님이 그녀의 구원자시라는 것을 그녀는 마음 속 깊이 깨닫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의 힘으로 구하려는 착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그 모든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를 드린다.

동시에, 마리아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새로운 위대함을 자각하고 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그녀 안에 계심으로 인해 그녀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신앙의 차원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통해 활동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고 바로 이 사실이 우리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가 무슨 굉장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 안에서 위대한 일을 하시도록 우리가 허락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분 앞에서 “경이로움” 속에 산다면(경이로움의 참된 의미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힘이 우리를 통해 활동하시도록 허락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거만한 이들과 힘을 가진 자들이 작아지고, 비천한 이와 약한 이들이 들어올림을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가난한 이들은 갖게 될 것이고 부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인데, 세상은 자신의 능력을 보존하려고 하며 자신의 부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자신들로 이미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주시려고 하는 것을 받을 수 없다; 가진 것이 없는 자만이 채워질 수 있다.

그리하여 구약의 종반과 신약이 시작되는 문턱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인간의 믿음이 마침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행위를 있는 그대로 참되게 인지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서 온전히 다스리도록 내맡긴 사람들의 활동을 통해 하느님의 성령의 행위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하시는 활동을. 마침내 하느님의 충실하심이 내어 맡기고 용서하는 이들의 충실함을 통해 인간의 역사에 온전히 나타나고 있다. 기꺼이 하느님의 하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자비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가 마침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보여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의 끝은 성서의 마지막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충실하심과 자비에 관한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이야기의 시작부분이 종결되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구약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가톨릭일꾼 기사는 상업적 용도 아니라면 출처를 밝히고 누구나 퍼갈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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