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적 신앙, 자비 안의 자비 안의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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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적 신앙, 자비 안의 자비 안의 자비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8.05.29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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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역사: 신앙의 진전-4]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개념이 너무나 편협했다는 것을 처음 안 사람들은 바로 예언자들이었다. 오늘날 초기의 성서를 들여다보면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후 예언자들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은 태초의 하느님과 변함이 없이 똑같은 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이 처음으로 주님을 알아가기 시작할 즈음, 그들은 하느님이 자신들만의 하느님이시며 자신들이 계명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에 따라 하느님의 사랑 역시 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왕국이 멸망하고 마음으로 드리는 경배가 성전의 경배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야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법을 지키며 사는 능력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하느님은 악하거나 선한 이 모두를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정의로운 이와 불의한 이 모두에게 비를 내려주신다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차원의 신앙으로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것을 맨 먼저 알아차린 사람들은 왕국에 떨어진 재앙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후대의 예언자들과 지혜서의 저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승리 뿐만 아니라 고통 중에도 항상 같이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를 짓더라도, 성전의 공식적인 예배를 합당하게 치르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은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사실을 앞에서 잠깐 얘기한 사제 초년 시절에 깨달았다. 그것은 진정으로 나의 삶을 뒤바꾼 순간이었다. 어느날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동안 나는 내가 규칙을 정확히 지킴으로써 거만해지고 있으며 나보다 덜 완벽한 수련생들을 얕잡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법을 준수함으로써 나는 하느님보다는 내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 종교적인 가치를 하느님 앞에 내세워 그 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려고 했으며 영적으로 더욱 우수해짐으로써 그것을 확실히 알고 싶어했다.

 

사진출처=pixabay.com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뿐

갑자기 내 생애 처음으로 어떻게 오늘날의 내가 되었는지를 깨닫게 한 순간이 있었다.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주님은 당신께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셨다. 그 분은 내 모든 작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셨으며 자기 기만과 자만심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

나는 내 자신을 그 분께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얻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분은 나의 선한 모습이나 악한 모습에 상관없이, 정의로운 모습이나 불의한 모습에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고 계셨다. 나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든 것은 내 자신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런 그 분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 분의 사랑을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의 자녀라는 위치 또한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나는 사랑 받고 있었고 그것만이 중요했다.

그날의 하느님의 사랑은 머리로 깨달은 것에 그치지 않고 내 마음과 내 몸 전체를 통해 느낀 것이었다. 너무나 생생한 깨달음이라 나는 그 앞에 몸을 숙여야 했고 나를 둘러싼 그 분의 신비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것은 나에 대한 그 분의 사랑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깨달음이었고 그것이 변화를 일으켰다. 그 깨달음을 나는 종종 일을 하다가 잊기도 하지만 그것을 한 번 경험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녀가 된 체험으로,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시고 당신이 무엇을 하던 식지 않는 사랑을 갖고 계신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아이가 된것 같은 느낌이다.

그 순간 이후, 나는 모든 것이 은총임을 깨달았다. 나는 하느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가 앞으로 쓰러지고 떨어지는 경험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에 그랬던 처럼 신경 쓰지 않게 되었고 내 길을 즐겁게 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실패하는 것에 마음을 쓰지 않게 되었는데 그것은 완벽하게 되는 것이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었고 다른 것들은 별 의미가 없을 뿐더러 거추장스럽기까지 하였다. 나는 필립보서 3,7-11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씀하신 것을 똑같이 느꼈다: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애물로 여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애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필립보 3,7-11)

종의 노래처럼, 하느님은 자비하시다

유배지에서 예언자들이 깨달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욥기의 저자와 다른 지혜서의 저자들이 깨달은 바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중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복음에 진정으로 귀의한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으며 그 기쁜 소식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들도 있다. 그들은 여전히 하느님을 자신들의 착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뒤쫓는 하늘에 계신 경찰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종교를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게임쯤으로 여기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역할은 모든 법을 준수하고 예식을 잘 지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가 종종 그렇게 반갑지 않은 이유가 딴 데 있었던게 아니었다!

예언자들과 지혜서의 저자들이 알아본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는 자비와 연민, 용서와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이스라엘이 호세아의 아내처럼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고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야훼는 그녀를 사랑하셨다. 야훼는 그녀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릴 수 있을만큼 인내로우신 분이시다; 그 분은 이스라엘이 비록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할 지라도 이스라엘을 배반하지 않으신다. 야훼는 이스라엘이 고통 받을 때 같이 고통 받으신다. 그 분은 이스라엘이 당신을 필요로 할 때 같이 있기 위해 그녀와 함께 유배를 가셨다. 야훼는 그녀에게 내려진 벌이 끝날 때 그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구약에서 이와 관련해 하느님의 마음에 대한 통찰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대목은 고통 받는 종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종의 노래는 네 편 밖에 되지 않지만 그 노래의 작은 음정 하나가 곡으로 발전하여 마침내는 신약의 주된 주제가 되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당신을 드러내신 하느님은 사랑하시는 분이시자 종이시다. 고대의 교리에서 가르치듯,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 분을 섬기는 것은 우리들의 목표이긴 하지만 하느님 역시 우리를 알고 사랑하시고 섬기시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어떤 교리도 설명하지 못하는 심오한 지혜이다. 그것은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계시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해하기엔 너무 힘든 진리로 그것을 헤아리기 시작하는데만 몇 세대가 걸렸다.

그러나 돌아보면 우리는 이 지혜가 사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사랑이 아니고서야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까닭이 없지 않는가? 그분은 그것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하느님이 왜 노예를 해방시키시고, 그들에게 왕국을 주시기로 약속을 하시고, 그들 가운데 예언자들을 끊임없이 보내셨겠는가? 그 모든 것은 사랑, 인내롭고 노여움을 참고 용서하는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고 자신을 완전히 희생하는 그런 사랑이다.

얼마나 아찔하고 엄청난 계시인가! 순간적인 영성적 통찰력으로 그것의 일면을 한순간 힐끗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금새 압도당할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일이다. 토머스 머튼이 말했듯이 그것은 “자비 안의, 자비 안의 자비”인 것이다.

정말 그렇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 사실은 믿기지 않을 만큼 기쁜 일이다. 인류가 그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는데만 몇 백년이 걸린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예언자들이 이 진리를 처음 접했을 때 그것의 어마어마한 내용을 이해조차 하지 못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진리를 모두 이해하기 위해 그들은 시간과 공간을 떠난 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사진출처=pixabay.com

하느님은 홀로 일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이 되시기 위해 그 분은 인간과는 완전히 다르신 분이셔야만 했고 우리를 절대적으로 능가하셔야만 했다. 욥기가 주장하듯 하느님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고 우리를 완전히 능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장엄함에 경이와 황홀함으로 떨기만 할 뿐이다. 시편의 저자들이 말했듯이 하느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예언자들의 깊이 있는 성찰조차도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하느님께서 “저기 바깥에” 인간의 실존 위에 말하자면 거리를 두고 계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했다. 그 분의 구원을 상상하면서 그들은 메시야가 저 먼곳으로부터 나타나셔서 세상의 악한 이들을 물리치시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 역시, 예언적인 신앙을 갖고 있더라도, 그러한 단편적인 시각으로 인해 고통 받는 경우가 있다. 하느님께서 왜 사람들이 선하게 살도록 만들지 않는지 우리는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도록 당신의 힘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보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자신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아름다운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그렇다. 인류와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의 능력으로 가능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당신의 고통에 참여하지 않은 채 그것을 하느님이 홀로 이루신다고 생각하는 한 당신은 신약의 믿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정반대의 덫에 걸릴 수도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시기 때문에 그 분이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기 위해 우리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여긴다. 우리는 이웃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불의에 고통 당하고, 이런 저런 명분을 위해 순교하며 다른 이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하는 메시아가 되는 등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을 따르라고 부르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접근은 단기적으로는 성공할 확률이 높은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힘은 유한하기 때문에 이런 방법은 궁극적으로는 그 힘을 잃게 되고 만다. 사람의 의지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 역시 금새 동이 나버리고 말 것이다. 사람의 통찰력이란 극히 근시안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비젼을 잃어버리고 만다. 사람의 확신이란 자구심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곧 믿음마저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자들이 갖고 있던 믿음을 넘어 심지어 하느님이 선하시며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넘어 더 심오한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그 같은 믿음에 관해 성서는 계시가 온전히 드러나는 신약에 이르기 전까지 명확히 제시하고 있지 않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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