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전쟁 한가운데서 은총을 찾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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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전쟁 한가운데서 은총을 찾은 사람
  • 한상봉
  • 승인 2018.05.1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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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는 교황권고를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거룩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가난과 질병, 고통과 박해를 두려워할 수 있다. 그런데 거룩해지는 걸 두려워한다니, 이건 또 무슨 뜻일까?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일원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정했지만, 그분처럼 살아가기로 마음먹지 않는다. 그분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은 받고 싶지만,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 걷기를 거절한다. 그런 길은 고명하신 주교님과 사제들, 그리고 남다른 선택으로 고독을 자청한 수도자들에게나 어울리는 길이라고 여긴다. 교황이 말한 ‘성덕’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고,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레 포기한다.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지옥을 면하는데 있지 않다”고 하였지만, 우리 삶의 목적은 ‘연옥’ 정도로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성인들의 통공’을 믿는 우리네 신앙은 참 요긴하다. 그들의 성덕으로 우리도 구원받을 실낱같은 희망이 엿보이니 말이다. 그래서 한사코 성인을 공경하고, 성지에 찾아가고, 미사봉헌에 몰두한다.

그런데 교황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성인됨에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다시 들추어낸다. 그러니 “거룩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마라”고 한다.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걷기를 희망한다. 세상의 흐름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하고, 그 길에서도 겸손함과 유머감각을 지니라고 권한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시작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조용한 혁명’을 기대하는 것이다.

조용한 혁명이란 ‘사랑의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지난 4월 5일 식목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성동구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 돌봄교실에 일일돌봄 교사로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삼삼오오 책상 앞에 앉아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아이가 갑자기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제가 가진 게 이것밖에 없지만 선물이에요”라며 손을 내밀었다. 그 고사리 같은 손안에는 100원짜리 동전이 들어 있었다.

그게 꼭 문재인 대통령이 아니어도 좋았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어준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다. 이 아이가 내민 100원짜리 동전처럼, 우리는 누구나 마음만 있다면 줄 것이 ‘아직’ 남아 있다. 예수님이 생애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에, 렙톤 두 닢을 성전에 봉헌하는 과부를 두고 극구 칭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하는데 이유가 없고, 사랑하는데 많고 적음이 없다.
 

왜 성모 마리아인가?

성모기사회 창설자인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도 그랬다. 콜베 신부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예수님 말씀을 토를 달지 않고 따르고 싶어 했다. 콜베 신부는 우리에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죄수를 대신하여 어두운 지하 감방에서 죽은 성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모든 희생과 봉사에 바탕에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콜베 신부는 “마리아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마리아를 사랑하라”고 촉구한다. 마리아만큼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마리아의 마음을 따라 사는 것보다 예수님을 사랑할 방법이 없다고 믿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예수님에게 데려다 준다”고 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내일 적에 일방적이지 않았다. 그분은 나자렛 처녀에게 먼저 ‘허락’을 기다렸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마리아의 “예”(fiat)라는 응답이 있고서야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당신의 천막을 치실 수 있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 예고를 하면서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30) 하고 말한 이유는 까닭이 있다.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고난을 자초하는 일이고, 결국 십자가에서 살해당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머니 마리아의 슬픔이었다. 이 고통과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기에, 예수아기를 태중에 배는 일은 위험하고 두려운 일이다. 게다가 당시 유대사회에서 처녀가 아기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이 가늠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 마리아는 “예”라고 하느님께 승복한다.

이러한 승복이 있고서야, 세상의 구원이 시작된다. 하느님의 섭리가 작동하고, 예수님의 사명이 실현되도록 돕는 마리아는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만 하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도 성모 마리아를 “새로운 복음화의 별”(복음의 기쁨, 287항)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마리아를 바라볼 때마다 ‘온유한 사랑의 혁명’이 지닌 힘을 믿게 된다고 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겸손과 온유가 나약한 이들의 덕이 아니라 강한 이들의 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강한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려고 다른 이들을 홀대하지 않습니다. 마리아께서는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루카 1,52)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보내시는’(1,53) 하느님을 찬양하셨습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바라보며, 바로 그분께서 정의를 추구하는 우리에게 따스한 온기를 가져다주시는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마리아께서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시는’(2,19) 분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 성령의 자취를 알아보는 법을 아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이 세상 안에, 인류 역사 안에,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 깃든 하느님의 신비를 바라보십니다. 그분께서는 나자렛에서 기도하시고 일하시는 여인이시며, 또한 다른 이들을 도우시고자 ‘서둘러’(1,39) 당신 마을을 떠나시는 도움의 성모이십니다.”(복음의 기쁨, 288항)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

콜베 신부는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아버지 율리오 콜베와 어머니 마리아 다브로프스카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라이문도’였는데, 집에는 검은 성모님의 제대가 있었다. 그 시절 라이문도는 어머니에게서 고요한 불빛 속에 홀로 앉아 오랜 시간 성모님과 대화를 나누는 법을 배웠다.

1907년 14살에 라부프 소신학교에 들어갔고, 1911년 10월 그의 형인 프란체스코와 함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처럼 거친 수도복에 하얀 끈을 질끈 졸라매고 입회하면서 받은 새 이름은 ‘막시밀리아노’였다. 이 이름은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면서 운명적인 이름이 되었다. 초기교회에서 황제숭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로마병사 가운데 하나가 막시밀리아노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형 프란체스코 콜베는 그해에 수도복을 벗고 총을 들었다. 당시 필수드스키를 중심으로 폴란드의 재통일과 독립을 위한 강력한 투쟁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자발적으로 이 운동에 뛰어들어 조국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막시밀리아노 콜베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마치고 1917년 신학원장의 허락을 받아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로마에서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Militia Immaculatae)라는 모임을 창설했다. 전쟁 때문에 온 유럽이 피투성이가 된 상황에서 요구되는 것은 ‘또 다른 전쟁’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1918년 사제서품을 받고, 1919년 박사학위를 따고 폴란드로 귀국해서는 크라쿠프의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성모의 기사회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에 콜베 신부가 가장 갈망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하기를 바라는 일을 찾는 것”이었다. 그분의 뜻에 자신의 뜻을 일치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v=V라는 공식을 그렸다.

“작은 v는 우리의 의지를 뜻합니다. 큰 V는 하느님의 의지를 나타내지요. 우리는 말마다 힘겹게 노력하며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하느님께서 우리의 그 같은 활동에 당신의 은총을 보태주시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언제나 보잘 것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노력에 힘을 불어넣어 주시면 아무리 작은 우리의 수고도 아주 엄청난, 정말 예기치 못한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따라서 더 많은 일을 벌이는데 기력을 쏟아 붓는데 관심을 두지 말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찾는 데 더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서, 우리는 있는 힘껏, 우리의 힘이 큰든 작든,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게 성공의 비결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작은 v를 하느님의 크신 V에 일치시키는 것이죠.”

결핵을 앓았던 콜베 신부는 자코파네 요양원에 있으면서 잡지를 구상했다. 그리고 크라쿠프로 돌아오자 곧바로 1922년에 <원죄 없으신 성모기사>라는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수도회에서는 이 일을 지원할 여력이 없었고, 콜베 신부는 손에 모자를 들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기부금을 청했다.

1927년 10월에는 바르샤바에서 42킬로미터 떨어진 5헥타르의 습지를 기증받아서 ‘원죄 없으신 성모마을’을 건설했다. 프란치스코회 신부와 수사들은 인부로, 벽돌공으로, 목수로, 배관공으로 일했다. 이들은 고가의 인쇄기도 들여 놓아야 했기 때문에 신발도 공동으로 사용했다. 콜베 신부도 바르샤바에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동료 수사들을 찾아다니며 짝이 맞는 샌들 한 켤레를 구해신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몇 년 뒤에 성모의 마을은 최신 모델의 인쇄기를 갖춘 폴란드 최초의 출판단지로 떠올랐다. 일찍이 성 프란치스코가 불을 ‘형제’로 물을 ‘자매’로 부른 것처럼, 콜베 신부는 잡지를 ‘형제’라 부르고, 윤전기를 ‘자매’라 불렀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형제들에게 이 일을 통해 성인이 되라고 호소했다. “나는 여러분이 모두 성인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성덕은 사치스러운 장식품이 아니라 지극히 단순한 의무입니다. 그것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이때부터 <성모의 기사> 잡지는 해마다 발행부수가 늘어났다. 1927년에 5만부였던 잡지가 8년 뒤인 1935년에는 70만부, 1940년에는 1백만부에 이르게 되었다. 일간지인 <작은 신문>도 25만부나 팔렸다. 그밖에 단행본과 소책자, 팸플릿 등을 생각하면, v=V라는 공식이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콜베의 사명은 폴란드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1930년 믿을만한 사람에게 폴란드 성모의 마을을 맡기고, 네 명의 동료와 함께 일본 선교에 나섰다. 4주만에 일본어판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창간호가 나왔다. 이듬해에는 히코산 홍고시 외곽에 땅을 얻어 ‘원죄 없으신 성모마을’을 설립했다. 그러나 그의 열성이 그의 지병을 악화시켜 1936년에는 다시 폴란드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쟁을 막기 위해 ‘마음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던 콜베 신부는 1939년 9월 독일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하는 순간을 목격해야 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성모의 마을을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콜베 신부에게 독일시민권도 주고, 잡지의 출판재개를 허용해 주었다. 그러나 시험용으로 출판된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는 나치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이 잡지 어디서도 나치를 두둔하는 내용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고난의 시작

1941년 2월 17일, 콜베 신부는 나치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어 파비악 형무소에 갇혔다. 당시 나치는 폴란드 국민들에게 저항을 촉구할 가능성이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모두 잡아 들였다. 이른바 예비검속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해 5월 28일에는 ‘죽음의 수용소’로 불리던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옷, 신발, 머리카락 등 모든 것을 빼앗겼다.

이름도 빼앗겼는데, 콜베 신부는 그 후 16,670번으로 불렸다. 콜베 신부는 사제라는 이유로 더 가혹한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콜베 신부는 이미 자신이 평생을 바친 성모의 마을이 파되딘 것도 알았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하느님은 악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나무둥치를 짊어지고 가다가 힘겨워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이때 나치 장교 크로트는 콜베 신부에게 발길질과 주먹질을 퍼부으며 “지옥에나 떨어진 신부 놈아, 내가 일하는 법을 가르쳐주마!” 하고 소리쳤다. 크로트는 그를 나무둥치 위에 가로눕히고 몽둥이로 50대나 대렸다고 한다. 죽을 지경이 되어 17호 감방으로 돌아온 그를 사람들이 병실로 옮겼다.

그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악담을 퍼붓거나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처럼 묵묵히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수용소에서 생존한 스테믈로 박사에 따르면, 이날 밤 골베 신부는 스테믈로 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증오는 아무것도 건설하지 못합니다. 구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7월 20일, 16,670번 수감자인 콜베 신부는 농사일을 하는 14호 감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침 수확기였는데, 한 수감자가 쌓아올린 수확물 속에 몸을 숨겨 탈출을 시도했다. 저녁 점호 시간에 한 사람이 대답을 하지 않자 14호 감방 수감자는 전율했다. 아우슈비츠에 통용되던 나치의 법은 “한 사람이 탈출할 때마다 그 대가로 열 명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하 감방에서 굶어죽게 될 것이다. 형무소장은 광장에서 수감자들을 열 지어 서게 하고, 아사감방으로 갈 희생자 10명을 골라냈다. 해당자는 울거나 동료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중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라는 사람이 가족들이 보고 싶다며 울부짖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 죄수가 열에서 나와 그 사람 대신 자신이 가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콜베 신부였다. 나치 간수는 이들을 아사감방에 몰아넣으며 이렇게 말했다. “네놈들은 튤립처럼 바짝 말라비틀어져 죽을 게다.”

콜베 신부는 아사감방에서 다른 수감자들에게는 성모 마리아 같은 분이었다. 마치 자식인 예수님을 어루만지듯 마지막 순간까지 죽어가는 이들의 눈을 감겨주었고, 그들을 위해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감방에서 드나들며 수감자들의 상태를 점검하던 통역자 부르노 보르고비에크는 이렇게 증언했다.

“예전에 보았던 사형수들은 거의 항상 절망에 빠진 모습이었는데, 이번에는 독일 간수들조차 아연실색할 정도로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형수들이 콜베 신부를 중심으로 둘러 앉아 긷호를 하고 있었어요. 자주 성모님께 바치는 폴란드 성가를 부르면서 말이죠. 다른 감방의 사형수들까지 그 합창소리에 동조하곤 했기 때문에 경비병들은 그럴수록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8월 14일, 성모승천대축일 전날 아직 살아있던 다른 세 명의 수감자와 함께 콜베 신부는 팔에 페놀 주사를 맞고 죽었다. 그리고 화장터의 화로 속으로 던져졌다.

 

은총의 순간

그러나 몇 달 동안 아우슈비츠에서 보낸 콜베 신부의 시간은 ‘은총의 순간’이었다. 죽어가는 아들의 십자가 아래서 울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는 시간이었고, 그 어머니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시간이었다. 콜베 신부가 아사감방에서 임종을 맞이하기 딱 일 년 전인 1939년 8월 24일 비오 11세 교황은 라디오 담화에서 “평화로는 잃을 게 없다. 그러나 전쟁으로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은 인간의 마음에도 페허를 남기기 때문이며, 사람들은 비인간성이 무엇인지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살육과 악담과 저주와 비난, 미움과 조소와 인간의 교만함이 한껏 부풀어 오르는 자리가 전쟁터이다. 그러나 그 비정한 전쟁 한복판에서 콜베 신부는 오히려 성모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다. 그 참담함 속에서 ‘그럼에도 사랑해야 한다’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증언했다. 이것이 은총이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우리는 어느 때 가장 많은 은총을 얻게 될까요? 육체적 정신적으로 암흑에 있을 때, 피로할 때, 고통을 당할 때, 위로 받지 못할 때, 박해 받을 때, 끊임없는 실패의 와중에 있을 때,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을 때, 조소의 표적이 될 때, 고독으로 외톨이가 되었을 때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있으면서도 십자가의 예수님과 같이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원죄 없으신 성모의 도우심으로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게 하십시오. 이처럼 고통 중에서도 사람들을 하느님과 친밀하게 일치시키고자 노력하면, 그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총을 많이 받게 됩니다.”

1971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콜베 신부를 증거자로서 시복하였으며, 1982년 10월 10일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콜베 신부를 순교자로 기록하고 그의 성인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참고]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김경상, 세상의 아침, 2006

[출처] <가톨릭평론> 2018년 5-6월호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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