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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신앙은 미성숙하다[구원의 역사: 신앙의 진전-2]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8.05.15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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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에집트의 노예 생활을 하던 그의 자손들이 믿고 신뢰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한 것을 보았다. 그들은 하느님이 선택하셨음을 느꼈고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믿었으며, 하느님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심을 보게 되었다.

이 단계의 믿음에서 긍정적인 면, 성장의 측면은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이 계시에 신뢰에 찬 응답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의 믿음에는 부정적인 면, 제한적인 면이 역시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이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느님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제외시킨 채 자신들만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사진출처=pixabay.com

배타적인 신앙의 덕목은 '충성'

이런 종류의 배타적인 사고방식은 때때로 자기 민족 중심적인 종교라고 부르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그들 대 우리 또는 단체에 속한 사람 대 단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 식의 사고방식으로 특징 지워진다. 이런 종교에서는 단체에 속한 이들, 선택받은 자, 진리를 알고 구원을 받은 이들에게 주로 초점을 맞춘다. 반면 그 단체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 이방인, 다른 나라 사람들은 배척당하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 이런 종교는 곧잘 참된 믿음보다 “올바름”을 지향한다.

배타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최고의 덕목은 충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충성을 다하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다른 종교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는 떨어져 지냄으로써 스스로를 순수하게 보존하려고 한다. 그들은 외국의 믿음을 거짓으로 간주하고 낯선 신들을 위협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았음을 나타내는 상징물에 집착하고 자신들과는 다른 사상, 행동양식과 접촉함으로써 더럽혀지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믿음은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엄마, 아빠가 가르쳐 준 모든 것은 진실한 것으로 여기나 다른 사람들의 신념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아 그것들을 의식 속에서 지워버린다. 부모님의 가치와 교회의 신앙에 대한 그들의 충성은 절대적이다. 젊은 혈기의 순수함으로 인해 다른 가치들을 두려워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는다.

우리 종교의 역사 속에서 교회나 다 자란 성인으로서 우리 자신이 이런 사고 방식을 가졌던 때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가장 최근까지도 주님께 충실한 것 보다는 자신이 속한 단체에 충실한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 가톨릭 교회, 인종별 본당, 수도회 혹은 당신이 속한 그 어떤 단체. 사람들이 “바람직한 가톨릭 신자는 이것을 믿어야만 해,” 혹은 “바람직한 독일 가톨릭 신자라면 이처럼 해야 돼,” 혹은 “바람직한 프란치스코 수도자라면 이렇게 해야 돼”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으로 끝난다. 우리는 주님을 알리는 대신 가톨릭시즘 혹은 그것의 국수주의판 혹은 종교적인 영성만을 떠들었을 뿐이다.

원수를 원수로 보는 신앙

믿음의 후반 단계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종교적 사고방식이 얼마나 제한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분명하게 듣기를 거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것에 따르는 요구가 부담스러워서일 수도 있다. 하느님과 맺는 깊고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초대는 지속적인 경청과 자아탈피 그리고 주님께 완전히 의탁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첫 단계에서 멈추어 버리고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 단계로 퇴행하던지) 하느님께서는 자신들이 속한 단체에만 충실할 것을 바라신다고 결론을 지어 버린다. 하느님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을 우리에게 바라신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단체에 충실한 것이 주님께 의탁하는 것 보다 더 단순하다.

우리 대 그들이라는 사고방식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선택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아니면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사랑하시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런 감정은 하느님이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에 미워하거나 파괴해도 된다는 생각을 낳는다. 성서를 연구한 결과, 이 단계의 종교적인 믿음과 연계된 미성숙한 도덕성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과 틀린 사람들을 독선적인 판단하에 살육했다.

교회사에서도 우리는 중세에 이와 유사한 미성숙한 도덕성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을 고문하고 화형 시킨 것을 정당하게 여기고 성전(聖戰)을 통해 수천의 사람들을 죽인 것이 하느님의 동의를 얻어 행한 것으로 여긴 과거를 발견한다. 오늘날에 와서는 자신이 내세운 성스러운 해설을 방어하기 위해 핵 폭탄 발사 단추를 기꺼이 누를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지금에 와서 알게 된 것은 그것이 유치한 수준의 믿음이었고 미숙한 상태의 도덕심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시작임에는 분명하나 단지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믿음이 전혀 없고 도덕 의식이 전혀 없는 것 보다는 나은 상태이긴 하다. 그러나 그 상태에 만족하여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좀더 주의해서 듣고 더욱 높은 수준의 믿음과 도덕성으로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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