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 낯선 분] 솔로몬 주랑에서 통곡의 벽까지
상태바
[예수, 그 낯선 분] 솔로몬 주랑에서 통곡의 벽까지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8.05.07 18: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갈릴래아와 예루살렘- 10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요한 10,22-23)

요한 10,30에 따르면, 예수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말하자 유다인들은 그를 신성모독으로 비난하며 돌로 치려 한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는 한갓 사람이면서 스스로를 하느님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성전 봉헌 축제 때의 논쟁에서 유다인들과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다음의 질문들이 제기된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위해 우리의 관심은 요한 본문의 시간적 배경, 즉 성전 봉헌 축제에 집중된다.

이 축제는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1마카 1,54; 다니 9,27; 11,31; 12,11)을 세운 지 3년 후, 즉 기원전 164년 키슬레우 달 25일에 유다 마카베오의 지휘 하에 성전과 그 제단이 정화된 사건(1마카 4,36-61; 2마카 10,1-9)을 기념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요한 본문의 성전 봉헌절 축제에 참여하는 유다인들은 과거의 불행한 역사와 함께 그것을 초래한 인물, 즉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신성모독적 거만에 의해 자신을 하느님으로 자처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 산의 솔로몬 주랑은 사도행전에서도 소개된다.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데, 온 백성이 크게 경탄하며 ‘솔로몬 주랑’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그들에게 달려갔다.”(사도 3,11),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사도 5,12)

본격적인 의미의 성전은 “여자들의 뜰”, “이스라엘의 뜰”, “사제들의 뜰”, 그리고 성소(Sanctuary)와 지성소(Holy of Holies)로 이루어졌다. 성소와 지성소는 길이와 너비가 9m, 높이가 18m 가량이었다. 지성소에는 오직 대사제만이 일 년에 한번 즉,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자들의 뜰”에는 성전의 헌금함이 놓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마르 12,41-42) “여자들의 뜰”로 들어가는 동쪽 문은 “아름다운 문”으로 불렸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사도 3,1-2)

바빌론 유배 이후 약 5세기 동안 유다인들의 경신례의 중심이 되었던 제2성전은 제1차 유다 항쟁이 진압되었던 기원후 70년에 로마제국의 티투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이 성전은 제2차 유다 항쟁 당시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132년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로마 황제는 성전이 있었고 곳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다.

 

사진출처=keepbible.com

헤로데 성전의 벽들 중에서 서쪽 벽은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다. 높이 18m, 너비 60m의 이 서쪽 벽(West Wall)을 흔히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곳을 찾는 유다인들이 기원후 70년에 파괴된 성전과 조상들의 비극적인 역사를 기억하며 통곡하기 때문이다.

이 통곡의 벽은 현재 유다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장소이다. 세계 각지에서 온 유다인들이 이 통곡의 벽을 순례하는데, 그들의 기도와 염원을 쪽지에 적어 벽의 돌 틈새에 끼워 넣는다. 현재 통곡의 벽은 아래에서 약 열 한 번째까지의 큰 돌은 헤로데 대왕 시대의 것이고, 그 위의 중간 크기의 다섯 줄은 초기 아랍 시대, 그리고 나머지 윗부분의 조그만 벽돌들은 19세기의 것이다. 현재도 이 통곡의 벽에서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종교적, 정치적 행사들이 다양하게 벌어진다.

송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