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푸에블라 주교회의, 보수화에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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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푸에블라 주교회의, 보수화에 맞서다
  • 한상봉
  • 승인 2018.05.0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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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9

1978년에는 칠레뿐 아니라 11개의 라틴아메리카 나라에서 우익 군사정권이 집권했다. 메데인 주교회의를 성사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바오로 6세 교황은 늙고 병들었으며,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을 발표할 때 가졌던 안목과 개방성이 크게 쇠퇴했다.

“십자가는 수직적이지만, 수평적이기도 하다.”

교황청 관료들은 다시 보수적인 인사들로 채워지고, 교황청 주변에서는 “서기 2천 년이 되면 교황청이 브라질로 이동할 것”이라고 입방아를 찧었다. 20세기 말이 되면 전 세계 가톨릭 인구의 절반이 라틴아메리카에 거주할 것이며, 그 가운데 브라질의 신자 수가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브라질 교회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교회였다. 이들은 “브라질 교회가 너무 수평적”이라고 비판했다. 해방신학과 그리스도교 기초 공동체가 가장 왕성하게 꽃을 피운 브라질 교회가 ‘지나치게 민주적’이라는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런 논란이 계속되자 브라질의 돔 헬더 카마라 대주교는 “십자가는 수직적이지만, 수평적이기도 하다.”고 응수했다. 실제로 바오로 6세 교황이 선종하면서 열리게 된 콘클라베(교황 선출 추기경단 회의)에서 브라질의 알로이시오 로샤이더 추기경이 교황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당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와 브라질 주교회의 의장을 겸임하고 있었던 가장 진보적인 주교 가운데 하나였다.

반개혁 일환으로 준비된 푸에블라 주교회의

메데인 주교회의에서 시작된 해방의 열기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보수파 중에서 선택된 사람은 콜롬비아의 알폰소 로페즈 트루히요 대주교였다. 메데인 주교회의 직후에 조성된 보수적 분위기에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사무총장으로 출세한 트루히요 대주교는 벨기에 예수회의 로제 베케망스 신부, 그리고 교황청의 라틴아메리카 담당이었던 세바스티아노 바기오 추기경의 지원을 받아 서둘러 제3차 주교회의를 멕시코의 푸에블라에서 열기로 했다. 메데인 주교회의의 진보적 견해를 서둘러 원점으로 되돌려 보려는 시도였다. 트루히요 대주교가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를 장악하자마자 보수적 인사로 실무진을 교체한 뒤였다.

1978년에 열리는 푸에블라 주교회의를 앞두고 보수파 실무자들이 작성한 214페이지의 예비문서가 1977년 12월에 미리 배포되었는데, 여기서는 메데인 회의가 채택한 사회정의에 대한 강력한 요구를 부정했다. ‘녹색 문서’로 알려진 이 문서는 내세를 기대하면서 지금 겪는 비참한 생활을 받아들이라고 가난한 이들에게 요구했다. 이 문서에는 “비록 모든 것을 빼앗기는 때일지라도 그들은 하느님과 신앙을 풍성하게 소유하게 되는데, 하느님과 신앙의 덕택으로 그들은 어떤 인간의 고통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하느님 왕국의 인내와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 문서에 대한 반발이 즉각적으로 일어났다. 페드로 카살달리가 주교는 이 문서를 “모든 것을 다루고 있지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백과사전”이라고 혹평했다. 브라질 주교회의는 이 문서를 대체할 128편의 권고문을 만들었다. 시민사회와 교회 안에서 광범한 논쟁이 일어나면서 1,258페이지나 되는 비판적인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결국 1978년 중반에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의장인 로샤이더 추기경의 지도 아래 푸에블라 문서를 다시 쓰기 위한 회의가 소집되어 더 간결한 문서가 작성되었다.

개혁과 반개혁 사이
"가톨릭 대륙의 빈부격차는 교회를 부끄럽게 한다"

당황한 트루히요 대주교는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 자신이 추천한 181명의 추가 대표를 선임했는데, 당시 각 나라 교회에서 임명한 다른 대표들은 175명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트루히요 대주교는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등 해방신학자들을 의도적으로 회의에서 배제했다. 그러나 이 신학자들은 각 나라 주교들의 개인적인 보좌관 자격으로 회의에 영향을 미쳤다. 주교회의에서 브라질 상파울루 교구의 아른스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다음의 세 가지 요인이 민중을 삶의 가장자리로 밀어내는 데 기여했다고 확신한다. 전체 인구의 5% 미만에게 집중되어 있는 토지와 산업, 전체 인구의 1%에게 집중되어 있는 정치권력,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1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의존이 그것이다. 상파울루의 시민 3백만 명이 주택, 식량,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지냈으며, 시 행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흡족하고 자유롭게 종교의식을 거행할 수 없었다.”

푸에블라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은 지난 500년 동안 가톨릭교회가 지배하는 동안 아직도 빈부 격차가 엄청난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다. 이처럼 푸에블라 주교회의가 역동성을 띠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33일 만에 선종한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을 이어 즉위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다. 교황이 되자마자 푸에블라 주교회의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 멕시코를 방문한 교황은 자신을 맞이하는 수백만 명의 군중에게 압도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과달라하라에 있는 자포판(Zapopan) 성지에서 “하느님은 우리 형제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사회 변혁에 대한 확고한 참여를 바라신다.”고 했다. 교황은 ‘인간 문제 전문가’인 교회가 인권을 옹호하고 인간 존엄성을 증진시키는 데 나서야 한다고 선언했다. 교황은 옥사카(Oaxaca)의 치아파스 인디언들에게 “교황은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고자 한다. 그대들에게는 존중받을 권리,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그 적은 것을 때로는 약탈과 다름없는 방법으로 빼앗기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대들에게는 착취의 사슬을 던져 버릴 권리가 있다.”고 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만 해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그랬던 것처럼, 해방신학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해방신학의 관점을 부추겼다. 한편 비폭력 저항을 주장했던 돔 헬더 카마라와 마찬가지로 ‘실효성 없는’ 계급투쟁은 반대했다.

팔라폭시아노 신학교에서 열린 주교회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편애와 가난한 사람과의 연대를 표명하는 예언자적 선택을 결정한 메데인의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의 입장을 다시 한 번 천명한다.”고 확실히 밝혔다. 이들은 교회 내 보수파의 반발을 의식한 듯 “메데인의 정신을 더럽히는 일부 사람들의 해석과 왜곡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무시와 적개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고 덧붙였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장을 따로 문헌에 마련한 푸에블라 주교회의는 라틴아메리카 교회에 몸담은 모든 주교들이 가난한 사람에게 충분히 투신해 온 것도 아니고, 항상 연대하지도 못했다면서 “지속적인 회심과 연대”를 요구했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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