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이 우리네 종교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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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이 우리네 종교가 되기까지
  • 김지환
  • 승인 2018.05.01 12: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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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환 칼럼]

한 대학의 건물 이름, 그 사람 하비에르

서강대학교의 각 건물은 가톨릭의 성인(특히 예수회 출신)이나 천사의 이름이 붙는다.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경영대학 건물 이름이 세리 출신인 마태오관이고, 언론대학은 가브리엘관이다. 인문대학은 X관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예전에는 사베리오로 불렀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성인의 이름 이니셜을 따온 것이다. 인문대학과 하비에르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 하비에르 성인에 대해 알고 나서 정말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비에르 성인을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는 선교지 사람들의 생활, 관습 그리고 이념 체계에 융통성을 갖고 적응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아코모다시오네스(acomodaciones, 적응)’라 한다. 아코모다시오네스는 선교지 사람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므로, 지극히 인문학적이기 마련이다. 선교지 사람의 심성을 고려하고 이를 가톨릭과 잘 접목하는 것은 매우 섬세하고 대단한 노력이다.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는 아코모다시오네스를 통해, ‘天, 上帝=天主, 제사≠우상숭배’라는 등식을 도출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예수회는 프란치스코회와 달리, 원주민의 기존 믿음 체계나 예배의식을 포용하려는 입장이었다. 훗날 예수회 추방을 명령했던 멕시코의 부왕(副王) 크루와는 자신의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회 선교사를 두고 “그들은 이 광대한 제국에 사는 전 주민의 마음과 지성을 사로잡았다”고 적기까지 했다. 최근 드루킹이 ‘청와대는 예수회, 조국은 로마’라고 어이없는 말을 하면서, 예수회가 마치 음험한 조직인 듯 이야기해왔던 것이 떠올랐지만, 예수회는 이처럼 엄청난 일을 해왔던 가톨릭교회의 구원투수였다.

 

고아에 있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유해

‘격의 가톨릭’이라 부르면 어떨까?

불교는 수천 년간 우리 문화에 스며들어 그리스도교보다 이물감이 덜하지만, 사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먼 서방에서 전래한 종교이기는 매한가지다. 특히 우리에게는 중국을 거쳐 불교가 전래되는데, 중국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일 때 자신의 언어로 불교를 이해하려 했다. 이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 한다. 격의불교는 중국에서 불교 수용의 초기 단계인 위진(魏晉) 시기에 노장사상으로 불교사상을 설명해 중국인에게 불교를 쉽게 이해시키려는 불학이다. 격의(格義)는 <고승전>(高僧傳)』 「축법아전(竺法雅傳)」에 “경전의 중요 개념을 외서에 비교하여 이해하는 것을 격의라고 한다(以經事數擬配外書 爲生解之例 謂之格義)”라고 정의되었다.

가톨릭도 처음에 중국으로 들어올 때는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을 통해 중국인에게 그리스도교를 소개하려 했던 마테오 리치의 시도를 ‘격의 그리스도교’라 할 수 있겠다. 중국인에게 서방의 종교인 가톨릭을 설명하는 것은 보통 힘든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테오 리치 스스로 중국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 거의 중국인이 될 정도로 중국을 이해해야 했을 것이고, 그러면서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언젠가 같이 일했던 한 선생님한테 마테오 리치가 가톨릭의 개념이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이전 당나라 때 중국에 들어왔던 경교(景敎) 그러니까 네스토리우스교의 경전을 차용했다는 설을 이야기해준다. 이 사실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지만,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의 책을 읽다가 놀라운 대목을 발견한다. 어쩌면 이미 남북국 시대(통일신라 시대) 무렵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었을지도 모른다.

“넓고 높다란 그 비석은 용머리 조각으로 장식을 했으며, 조각 뒷면에는 십자가가 수줍은 듯 새겨져 있었다. 비문의 내용은 네스토리우스파의 교리로, 불교 성지에 왜 이런 비석이 서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낯선 비석은 낯선 땅에서 그저 이방인의 유물로 남을 수밖에.”(노르베르트 베버, <수도사와 금강산>, 푸른숲, 1999, 47쪽)

언젠가는 그리스도교도 온전한 우리 것이 되겠지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

예전부터 왠지 조로아스터교에 관심을 가졌는데, 니체의 책 제목에 나오는 ‘차라투스트라’가 조로아스터였다는 사실은 비교적 최근에 알았다. 페르시아는 유다인을 바빌론의 압제에서 해방시켰다. 그러면서 유다교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 영향을 받았다고 예측할 수 있다.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핵심적인 인물 중 하나였던 빈의 대주교 프란츠 쾨니히 추기경은 고대 종교에 정통했는데, 이런 말을 한다. “예수를 이해하려는 자는 누구나 조로아스터교의 영적 세계에서 출발해야 한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조로아스터교의 분파인 미트라교의 축일에 성탄 축일을 보낸다.

그리스도교는 계시종교로서 일체의 혼합주의를 거부하지만, 사실 수많은 문화를 만나면서 성장해왔다. 그리스도교는 둘 이상의 서로 다른 문화가 직접적, 지속적으로 접촉하여 그 한쪽 또는 양쪽이 원래의 문화 유형에 변화를 일으키는 문화변용(文化變容)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왔다고 봐야 한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만남이 그 시작이었을 것이다.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는 가톨릭을 ‘위대한 혼합주의’라 하지 않았던가? <오리엔탈리즘>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는 또 다른 주저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베토벤은 그가 독일인인 만큼이나 서인도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음악은 인류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유산은 문화의 주고받음에서 만들어진다.

물론 그런 만남이 단순한 섞임과 차용의 차원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깊은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고도의 편집’ 또는 융합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교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종교다.

프랑스의 종교사학자 프레데릭 르누아르와 저널리스트 마리 드뤼케르의 대담집 <신의 탄생>(김영사, 2014)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저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논란을 벌이지 않습니다. 그저 그것이 하나의 오랜 과정, 숙성화 과정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뿐입니다.”(101쪽)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 교리와 교리 변천사와 관련해 던져볼 만한 질문에 대해 핵심을 관통하는 질문이라 생각한다. 다른 문화와 만남 속에서 그런 숙성 과정이 더해졌을 것이다. 이 땅의 그리스도교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물감 없이 온전한 우리의 종교로 자리 잡아 가는 것이겠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이해한다면, 그리스도교가 갖는 타종교나 타문화에 대한 배타성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김지환 파블로
출판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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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co 2018-05-01 16:45:25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유해가 있는 곳이 고야가 아니고 인도 고아(Goa)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