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세탁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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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세탁하는 기도
  • 캐더린 도허티
  • 승인 2018.04.30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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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핵심으로-16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기도는 우리가 얼굴을 하느님께 돌릴 때 시작된다. 하느님이 누구이며 기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때, 기도는 어릴 적이나 삶의 어느 때든지 하게 된다. 그런 일이 벌어질 때, 성경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수백만 장의 사랑의 편지가 되어, 우리는 그 편지들을 간직하고, 묵상하며, 영원하고 열정적이며 부드러운 그 말씀들과 하나가 될 정도까지 거의 흡수되어버린다. 성경을 읽는 것은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과 같다. 결코 끝나지 않는 대화다. 왜냐하면 성경의 매 구절은 더 큰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이끌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침묵을 가져온다. 하느님의 말씀은 천천히 한결같이 읽지 않으면 그 자체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을 때에 말씀은 우리 존재 안으로 파고 들어온다. 우리는 성경의 장이나 구절을 인용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 생각들은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온다. 말씀들은 빛으로 가득하게 된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말한다, “아! 바로 그것이야! 이것이 하느님이 말씀하는 방식이야.”

 

사진출처=pixabay.com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면, 오히려 두렵고 공포스러울 수 있으나, 성경을 통하여 말씀할 때면, 덜 무섭다.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다가 무서움을 느낀다고 해보자. 성경을 열어보면, 하느님이 유다인들에게 말한 대목을 읽게 된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이사 1,18). 이것이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읽을 때에 우리가 하는 행위다. 하느님께서 이런 말씀을 유다인들에게 하기 전에 유다인들을 얼마나 꾸짖었는지 기억하는가? 그분은 우리도 꾸짖을 이유가 있지만, 우리에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초대한다. 그러면 갑자기 상황이 달라진다. 하느님께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우리가 쓰는 말이 달라진다.

말들은 무엇을 담고 있다. 의미들을 품고 있다. 말들은 선이나 악을 품고 있을 수 있다. 말들은 하느님으로, 악마로, 아니면 그냥 우리 자신으로 가득 차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말이 자아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악마에게 취약해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생각과 타인의 생각으로 가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하느님은 타자이고, 모든 “타인들”은 그분께 녹아든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분은 우리 앞에 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도망갈 수 없다. 그분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분은 그분 자신과 다른 모든 인간존재를, 그들의 죄, 그들의 슬픔, 그리고 그들의 기쁨을 짊어지기 위하여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인 형제를 만난다.

말씀들은 의미를 품고 있고, 그래서 교회는 어떤 자녀들을 침묵기도의 삶으로 불렀다. 이 거룩한 침묵 속에서, 우리는 분별하는 것을 배운다. 인간들을 사로잡는 위대한 침묵 속에서 그들은 점점 더 쓰여진 말씀과 사람이 되신 말씀에 친숙해지고 모든 말씀들은 그 진실한 의미가 드러난다.

순수한 마음은 침묵하는 마음이다. 순수한 마음은 그 말을 신중하게 바라본다. 그렇다고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 침묵은 사랑의 침묵이다. 우리의 마음은 침묵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자신의 말에 무게를 두는 내적인 공간이 만들어진다.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 오는 말들은 또한 그 침묵 속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평가되며,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사랑에 따라 평가된다. 우리가 무시된다고 느끼거나 버려지고 혹은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등 모든 종류의 상처를 주는 말들은 이 위대한 침묵의 강 속에 던져질 수 있다. 순순한 마음에서 오는 사랑의 침묵은 우리에게 오는 모든 말들을 지혜롭게 살필 것이며, 우리의 응답을 결정해 줄 것이다.

그것은 마치도 빨래하는 것과 같다. 사랑, 믿음, 침묵 그리고 희망의 정화하는 과정을 우리가 거쳐 가도록 말들이 우리에게 던져진다. 이 순간에 우리가 “분별, 식별”이라고 부르는 과정이 수정처럼 투명해진다. 하느님께서 몸소 그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런 일을 하느님께서는 왜 이전에 하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말들이 우리를 먼저 통과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가 알려진 불의한 것들을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 일치하는 것이고 우리 자신의 성화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하여 죽으셨고,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공동상속자다. 이 유산을 주장하려면, 우리는 그분께서 겪으셨던 것을 경험해야 한다. 참지 못하고 복잡해하거나 감상주의가 우리를 덮칠 때마다, 악마가 손을 뻗칠 때 자주 진리가 왜곡되고 전복될 때마다, 우리는 침묵의 심연 속으로 내려가 다시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기도하며, 우리의 마음과 생각들을 정화시킬 수 있다. 이것이 성령의 빨래이고, 이곳 지상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단련이다. 이 침묵의 심연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좀 더 자비로워진다. 애덕에 어떤 한계가 있는가? 애덕에 유일한 한계는 죽음이다. 우리는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다른 이를 위하여 죽는다. 이것이 그리스도 몸소 알고 있는 유일한 한계였다.

침묵의 심연 속에서, 우리는 여는 것을 배운다. 열림은 결코 닫히지 않는 문이고, 경첩이 빠진 문이다. 한때 문이 막아섰던 갈라진 자리가 이제 선언한다, “친구여, 들어오시오. 이곳은 하느님이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모든 마음들에 열려야 한다. 침묵의 심연속에서 우리가 이것을 배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일단 문을 열면 다시 닫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을 열면 상처를 입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 상처를 직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낯선 이들에게 상처받는 것을 감수하는 일은 더 쉽다.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받는 것을 예측하지만, 가까운 친구들에게 상처받는 것은 예측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우리 마음의 여린 문을 통과하여 들어오고,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준비된 것처럼 그럴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그분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상처를 받았다. 어떤 시점에서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마저 그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가 이런 상황에 준비가 되었다면, 우리도 준비가 되어야 한다.

고통에 대하여 이렇게 준비가 된다면, 어떤 신기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 그것은 고통이 즐거움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 마음의 열린 문을 통과하여 우리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리고 만일 우리가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 순간이 기쁨의 순간이다. 고통에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덜 상처를 입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영향을 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태도의 열매를 볼 수 없을지 모르나, 그것들은 보여 질 것이다. 고통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싸우도록 허락된 유일한 분야는 양심의 문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은 침묵의 심연 속에 던져 넣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 우리의 생각이 거대한 침묵 속에 던져지면, 우리는 말하기 전에 생각하기 시작한다 – 그러나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모든 것이 변한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싶은가? 우리 마음을 고통에, 기쁨에 모든 것에 열고 싶은가? 그렇게 열고 싶을 때 우리의 동기는 애덕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비가 하느님의 동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동기유발이라면, 그리고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연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성령의 일과 같게 생각할 것이다. 성령 안에 하나가 될 것이다.

마음을 서로 열고나면, 우리는 함께 침묵의 심연 속에 들어가고 그곳에 하느님은 현존한다. 우리는 말을 조심스럽게 사용하기 시작하고 거의 주저하며 말하며, 그 말들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말이 달라짐에 따라, 우리 마음의 문들은 더 넓어진다. 문들이 열리면 사람들이 들어간다. 우리는 서로 알기 시작하고 침묵의 거대한 심연 속에 우리는 하나가 된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1월호
[원출처] <기도의 핵심으로>, 캐더린 도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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