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가난한 이들의 해방’ 선택한 메데인 주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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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가난한 이들의 해방’ 선택한 메데인 주교회의
  • 한상봉
  • 승인 2018.04.30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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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8

[해방을 위한 참여, ‘메데인’에서 ‘아파레시다’까지-1]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태, 라틴아메리카 교회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을 발표하면서 무엇보다도 바오로 6세 교황의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와 2007년에 열린 제5차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주교회의의 최종 문서인 <아파레시다 문헌>에서 영감을 받았노라고 밝혔다. 두 문헌이 ‘선교’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이 누누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선교’라는 말은 교회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을 향한’ 것이라는 점에서 세상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아파레시다 문헌>과 <복음의 기쁨>을 이해하려면 슬픔의 대륙 라틴아메리카를 ‘희망의 대륙’으로 뒤바꿔 놓은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고백을 읽어 볼 필요가 있다. 라틴아메리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를 고스란히 자기 대륙의 이야기로 만들어 놓았다. 가톨릭교회 역사에서 21차례나 보편 공의회가 열렸지만,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인 <사목헌장(Gaudium et Spes)>과 같은 성격의 문헌은 나오지 않았다. 사목헌장은 첫머리부터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1항)으로 시작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거룩한 교회와 세속’을 가르지 않았다. 그래서 ‘거룩하게 되려면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된다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말 그래도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면” 모두 교회의 관심사임을 천명한 공의회는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4항)고 선포했다. 구체적인 현실에 비추어 복음을 재해석하고, 실천하라고 촉구했다. 게다가 교회의 사명을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적용하지 않는다.

<사목헌장>은 “교회의 자녀들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뿐 아니라 곧바로 인류 전체를 향하여 말하며, 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현존과 활동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든 이에게 밝히고자 한다”(2항)고 분명히 밝힌다. 즉,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는 장엄선언이다. 이러한 공의회의 입장을 라틴아메리카 교회는 ‘메데인’에서 ‘푸에블라’를 거쳐 ‘아파레시다’에 이르도록 자기 대륙에 적용하고 있다.

 

Tree of Life by Jacques-Richard Chery

메데인 주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발견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나고, 바오로 6세 교황이 “탐욕은 가장 뻔뻔스러운 비도덕적 행위”라며 제3세계의 ‘인간발전’을 촉구하며,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부유한 국가와 빈곤한 국가 사이의 갈등을 지적한 <민족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 (Populorum Progressio)>을 1967년에 발표하자 라틴아메리카 주교들 사이에서 특별한 반향이 일어났다.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가 1968년에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열릴 2차 총회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토착화되는 기념비적 사건이 될 조짐이 보였다. 실제로 메데인 회의에서 그동안 가톨릭교회와 군부, 그리고 부유한 지배층 사이에 맺어 왔던 동맹 관계가 산산이 부서졌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직접 메데인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역사상 라틴아메리카를 방문한 첫 번째 교황이 되어 “우리는 가난하고 굶주린 민중의 그리스도를 구현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메데인 주교회의를 위한 문서를 준비한 실무자들이 통계 자료와 신학 논문, 그리고 사회학적 논쟁 자료를 들고 회의장에 나타났을 때, 주교들은 창 밖에서 벌어지는 가난한 이들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에 군사독재가 득세하면서 비참한 삶을 강요당하는 민중을 바라보면서 주교들은 “시대의 징표 속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획”에 눈을 떴다.

메데인 문헌에서 주교들은 민중들이 ‘제도화된 폭력’에 억압당하고 있으며, 이런 식민 구조는 “무한한 이윤을 추구하기 때문에 경제적 독재와 국제적 통화제국주의를 일으킨다.”고 말했다.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나쁘다는 것이다. 주교들은 사회복지보다 경제발전에 비중을 두고, 대중의 정치 참여를 가로막는 ‘개발독재’를 비난했다. 그들은 “부조리가 있는 곳에 평화가 없으며, 하느님은 배척된다.”고 말했다.

해방과 참여

메데인 회의에서 강조한 두 단어는 ‘해방’과 ‘참여’였다. 특히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의 영향을 받아 ‘해방하는 교육’에 관심이 모아졌다. 문맹률이 높은 라틴아메리카에서 행정 당국은 교육받은 소수 엘리트가 지배하는 정부를 옹호하기 위해 한심한 교육 수준을 이용하고 있었다. 교육받지 못하는 한, 민중은 민주정치에 참여할 희망을 품을 수 없었다. 라틴아메리카의 극우파는 교육받은 사람이 더 높은 임금과 더 훌륭한 사회복지 혜택을 얻으려면 대중을 암흑 속에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군사정부의 예산 순위에서 공중보건과 교육은 최하위에 머물러 있었고, 군대와 국내 치안에 가장 막대한 예산이 편성되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코스타리카만 예외였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 나라는 교사의 수가 경찰관의 수보다 많다.

정부 당국과 마찬가지로 가톨릭교회도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다. 대다수 가톨릭 학교는 부유한 상류층 어린이들을 선호했으며, 예수회는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대학교를 지었다.

그러나 메데인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은 파울로 프레이리가 주장한 ‘의식화 교육’을 지지했다. 이 교육 방법은 주입식이 아니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학생들로 하여금 ‘굶주림’, ‘맨발’, ‘토지’, ‘부자’ 같은 핵심적인 단어들의 실제적 의미를 따져 묻게 만들었다. 그 목적은 사람들이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환경을 깨닫고 생각할 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단 자신들이 궁핍한 이유를 제대로 알게 되면 바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프레이리의 말을 빌면 “(교육은) 불타는 건물에서 구조되기를 기다리는 ‘객체’가 아니라 변혁을 지향하는 사색하는 행위자가 되도록 돕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프레이리의 민중교육 방법론은 ‘가난한 이들의 교회’를 희망하는 해방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프레이리는 우선 권력을 장악한 다음 민중과 대화하려는 좌익 게릴라에게 한눈을 팔지 않았다. 그런 태도는 또 다른 가부장주의를 낳기 때문이다.

 

by Adolfo Pérez Esquivel

그리스도교 기초공동체

이 의식화 교육이 결실을 맺은 곳은 ‘그리스도교 기초 공동체(Comunidades de base)’였다. 서로 다른 생각과 생활양식을 가진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구 또는 본당과 달리 기초 공동체는 12~15명 정도의 비슷한 소득, 직업, 교육 수준, 개인적인 문제와 소망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작은 모임이다.

공동체 성원들은 서로 이름을 알고 있고, 자녀들의 영세식이나 견진성사에서 대부(Compadre)나 대모(Comadre)가 되어 주었으며, 서로 가족처럼 지낸다. 여기서 세례, 견진, 혼인성사 등 가톨릭교회의 의식은 ‘이웃 사이의 사회적 연대’처럼 보인다. 이들은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라는 복음 말씀에 따라 이웃에 대한 책임감을 나눠 가졌다. 어느 집 가장이 직장을 잃어버리면 그 가족을 공동체 성원들이 부양하고, 서로 도와 초가지붕을 잇는다. 여기서 발전해 공동체 차원에서 학교, 협동조합, 보건시설 등을 갖추기도 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메데인 주교회의는 국가권력과 부유층에서 벗어나 분명하게 ‘가난한 이들’을 선택했다. 그 결과 가톨릭교회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자신을 ‘백성들의 양심’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메데인 문헌>에서 주교들은 “교계, 성직자, 수도자가 부자이고, 부자와 결탁되어 있다는 불평까지 우리 귀에 들려온다. 커다란 건물, 본당 사제관, 수도원 건물이 주위 사람들의 집보다 크고 좋을 때,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사용하는 승용차가 사치스러울 때, 옛날부터 물려받은 거창한 옷을 입고 있을 때, 그런 것 때문에 성직자와 수도자를 부자로 보는 현상이 생겼다.”고 반성했다.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가 그런 것은 아니라 해도, “우리 주교와 사제, 수도자들은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필요 불가결한 것마저 결여되어 있으며 고뇌와 불안 사이에서 고투하고 있다.”는 게 주교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구조악의 결과인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과 ‘우선적으로’ 연대할 것을 천명했다.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는 비단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부유하시면서도 가난해지셨고, 가난 속에서 생활하셨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시는 일에 당신의 사명을 집중하셨으며, 당신 교회를 사람들 사이에 가난의 표지로 세우셨다.”

탄압받는 교회

메데인 주교회의 때문에 빚어진 부작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메데인 회의는 교회 안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사제들을 주교에게 복종시키는 여러 가지 교회법적 전통들을 폐지했다. 이 때문에 1960년대 말에 많은 사제와 수녀들이 다른 대륙의 성직자들보다 많이 서약을 깨고 결혼했다. 사제들은 좌익 단체를 구성하기도 하고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등에서 급진 정당이나 사회주의 정부를 공공연히 지지했다. 몇몇 교구에서는 사제들이 공개적으로 보수적인 주교들의 사임을 요구했다. 이상주의적인 반체제적인 사제들은 보수적인 볼리비아 주재 교황대사의 퇴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소란이 일어나자, 1972년 이후 많은 주교들이 메데인 문헌의 정신에서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메데인 주교회의를 앞장 서 추진했던 주교들은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직무에서 물러나야 했고, 해방신학을 다루던 연구기관들이 폐쇄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3년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군부 쿠데타로 처절하게 무너진 뒤 찾아온 파시즘에 경악하면서 다시 마음을 모으기 시작했다. 반공주의자였던 칠레의 실바 추기경은 아옌데 정부와 냉랭한 관계였지만, 아옌데 실각 후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인권 옹호자라는 이유만으로 비애국자이며 공산주의자라고 매도되었다.

군사정권은 사제든 수녀든 상관없이 정치적 자유를 주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누구든 투옥, 고문, 살해했다.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은 반체제 인사들을 직접 경찰이 체포하러 나서지 않고, 이런 ‘국가의 적’으로 지목된 이들을 신원을 알 수 없는 암살자들이 납치해 살해하도록 했다. 그리고 경찰은 그런 희생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이런 선례를 남긴 군사정권아래에서 아르헨티나의 경우에는 1970년대에 하루 평균 30명가량이 ‘사라졌다.’ 칠레 교회는 1973년 군사 쿠데타 이후 4년 동안 2천 명의 시민들이 증발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주교들은 공산주의보다 파시즘을 더 문제 삼기 시작했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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