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 낯선 분] 예루살렘을 감시하는 안토니아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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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 낯선 분] 예루살렘을 감시하는 안토니아 요새
  • 송창현
  • 승인 2018.04.23 16: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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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와 예루살렘- 9

예루살렘의 성전 산의 넓은 뜰을 둘러싼 벽들이 사방에 있었고 성전의 뜰 안에로 통했던 문들과 계단들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현재 성전 산 부근 남쪽에서 우리는 정결예식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형태의 목욕 시설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성전 산의 북서쪽 모퉁이에는 안토니아 요새(Antonia fortress)가 있었고 마태 4,5에 언급되는 성전 꼭대기는 성전 산의 남동쪽 끝이었을 것이다.

안토니아 요새는 기원전 37-35년에 헤로데 대왕에 의해 세워졌다. 그리고 요새의 이름은 헤로데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정해졌다. 안토니아 요새는 예루살렘 성전을 보호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중 신심에서 안토니아 요새는 본시오 빌라도의 관저로 받아들여졌다.

유다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유다 전쟁사>에는 안토니아 요새에 대한 기록이 있다. “안토니아 요새는 성전의 첫 번째 뜰에 있는 북쪽과 남쪽의 두 개의 주랑이 만나는 모퉁이에 있다. 요새는 50 큐빗 높이의 바위 위에 세워졌는데 사방이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다. 이 요새는 헤로데 임금의 작품인데, 그의 타고난 재주가 가장 잘 드러난다. 바위는 아래로부터 매끈한 돌판으로 덮여있는데, 이것은 장식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거기에 올라가려거나 내려가려는 자는 누구나 미끄러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사진출처=olive.or.kr

요새 앞에는 3 큐빗 높이의 성벽이 있고, 그 뒤로는 40 큐빗 높이의 요새 전체가 솟아 있다. 요새 내부는 왕궁의 외관과 시설과 유사했는데, 각기 형태와 목적에 맞게 방들이 나뉘어져 복도와 목욕탕, 군인들이 진을 칠 수 있는 넓은 뜰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있다는 점에서 안토니아 요새는 하나의 도시와 같았고, 웅장한 모습은 궁전 같았다.

요새 전체의 모습은 각 모퉁이에 네 개의 망대가 있는 하나의 탑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중에서 세 개는 높이 50 큐빗이고 남동쪽에 있는 망대는 높이가 70 큐빗이어서, 이곳에서 아래를 보면 전체 성전 구역을 볼 수 있었다. 성전의 주랑 두 개가 모이는 모퉁이에서 양쪽 주랑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요새에는 항상 로마 수비대가 주둔하였는데 축제 때에는 군인들이 무장을 하고 주랑들에 배체되어 백성을 감시하며 봉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였다. 만일 성전이 예루살렘 도성을 지키는 요새라면, 안토니아는 성전의 요새였으며 여기에 배치된 군대는 도성과 성전, 안토니아 요새, 이 셋 모두를 감시하였다.

예루살렘의 높은 지대는 헤로데 궁전이라는 요새를 가지고 있었다. 안토니아와 벳자타는 분리되었는데, 이것이 모든 언덕들 중에 가장 높았고 도시의 다른 한 쪽과 연결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북쪽에서 성전을 바라보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 (<유다 전쟁사> 5권 238-247)

성전 산의 사방 벽에는 주랑들이 있었는데 남쪽의 왕궁 주랑(Royal Portico)의 기둥들은 네 줄로 되어 있었고 나머지 주랑들은 두 줄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쪽에는 “솔로몬의 주랑”(Solomon's Portico)이 있었다. 이 주랑들에서는 율법학자들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토론하였고,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파는 장수들과 환전상들이 있기도 하였다.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 파스카 축제 때의 일을 전하는 루카 2,41-50에 따르면,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46절) 그리고 마르 11,15-19에는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을 전한다. 요한 10,22-39은 예수와 유다인들간의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논쟁 이야기이다. 요한 복음서는 공관 복음서들(마태 26,59-66; 마르 14,55-64; 루카 22,66-71)과는 달리 최고 의회에서의 예수 재판을 전하고 있지 않지만, 그 재판의 중요한 요소들을 10,22-39의 성전 봉헌 축제 때의 논쟁 안에서 소개한다. 

송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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