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기도와 일치하지 않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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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기도와 일치하지 않을 때
  • 캐더린 도허티
  • 승인 2018.04.23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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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핵심으로-15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루카 18,1. 7.)

우리가 사랑을 할 때, 오로지 한 사람만 우리에게 중요하다. 그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군중에 불과하다. 우리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하느님일 때, 우리는 그분이 왕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는 그분에게 승복해야 한다. 자아는 사라져야 한다. 기도는 이 자기-비움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고요히 머물고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

키리에 엘레이쏜, 이 두 그리스 말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이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한 아기가 동굴 속에서 태어났다. 그 아기의 사진이 내 머리에 들어온다. 강력한 하느님, 전능한 하느님이 바로 아기다. 아버지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라고 그분의 유일한 아들을 보냈다(요한 3,16).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이 아버지 앞에서 엎드린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믿을 수 없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의 지성에 빛을 주소서. 키리에 엘레이쏜. 키리에 엘레이쏜. 키리에 엘레이쏜.

 

사진출처=pixabay.com

삶의 여정을 뛰면서 가다가, 우리는 비틀거리며 땅에 엎으러진다. 아마도 우리의 친척들이 아플 수 있다. 아마 우리 각자도 오한에 떨지 모른다. 기도할 말을 찾을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외침이 터져 나온다, “키리에 엘레이쏜! 키리에 엘레이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더 이상 지적인 깨달음을 청하지 않는다. 도움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당신의 나라가 오시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 6,9-10).

우리는 자주 이 기도를 하지만 정말로 그분의 뜻에 투신하는가? 우리는 그분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꺼이 바라는가? 구약에서, 하느님은 끊임없이 유다 백성을 비난하며, 그들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굶주린 사람들, 그들의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라고 요청한다. 그분은 한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속한 마지막 에이커의 땅을 빼앗은 것에 분노한다. 끊임없이 하느님은 온갖 종류의 불의를 책망한다. 그분은 유다인들이 거만하며, 도도하다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그분은 예언자들을 계속하여 유다인들에게 보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런 것처럼. 그리스도 당대에도 그런 것처럼, 오늘날 하느님은 말씀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는가?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형제를 그리스도처럼 대우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기도와 일치하지 않을 때 그것을 알아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모방하지 않으며, 더럽혀진 모상조차도 아님을 알고 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고 주님이 말씀했다(마태 7,20). 기도는 나무와 같다: 열매가 쓰거나 없다면, 우리의 기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에 우리의 커다란 기쁨의 원천이 있다. 상황을 인식할 때,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기쁨으로 말할 수 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말을 하는 순간 그리고 진심으로 의미할 때, 우리는 용서받는다. 다시 또 다시 우리는 용서받는다. 하느님께는 모든 순간이 다시 시작하는 순간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 그리고 인간으로부터 하느님께 끊임없이 흐르는 사랑의 행위 안에서, 기도 안에 육화되어야 할 한 가지 강조점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하느님이 누구인지 안다. 그는 자신이 피조물이고, 그래서 마음에 가득한 사랑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 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 행위를 매일의 생활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아니면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마치도 찬가와 같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노래다. 충만한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노래다. 사랑, 기쁨, 슬픔의 노래들이다. 이런 기도가 전례기도 시간에 사용하는 시편들이다. 기도는 염송기도지만 마음으로 해야 하는 기도다. 사랑하고 있을 때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기도한다.

기도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말이 필요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완전한 기도다 – 그리스도께서 직접 우리에게 준 기도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진정으로 한다고 하자. 그때에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하면, 온 세계가 우리 앞에 열린다.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할 때에 우리는 즉시 삼위일체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른 연관되는 경우가 따라온다. 돌아온 아들이 떠오른다. 그리하여 “우리 아버지” 두 마디를 묵상하려면 한 두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하늘에 계신.” 우리는 마음을 위로 향한다. 그러나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 안에.” 왜냐하면 주님이 수차례 여러 표현으로 말씀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와 내가 그리고 성령께서 오시어 너희 안에 머무실 것이다”(요한 14,9-26). 천국은 우리 각자 안에 있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는 폭발할 것이다! 우리는 천국에 있게 될 것이고, 세례 받던 순간부터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셨던 분을 알게 될 것이다.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다. 그리스도가 천국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아나윔이다. 아나윔은 아무도 아니고, 주님의 가난한 사람이며, 진복팔단의 가난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아무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우쭐대지 않는다. 그는 과시하지 않는다.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안다. 창조주를 바라볼 때, 그는 그분을 알고 그분을 경배한다.

그는 그의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아나윔은 아무도 아니고 동시에, 하느님의 친구다. 그리고 예수님의 형제이며 성령의 성전이다. 그는 피조물이지만, 황홀한 피조물이다! 그는 하느님께 기댈 수 있다. 마치도 하느님은 작은 손가락의 움직임 하나에도 내려오는 것 같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고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13).

우리는 인간의 이 두 얼굴이 하나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이 그분 자신을 드러내도록 허용할 수 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다음과 같이 쓸 때에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약할 때, 나는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리의 기도는, “하느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루카 18,13)였다.

그는 회당의 뒤편에 서서 이 기도를 되풀이 하였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께 말해야 하는 모든 것을 발견한다. 우리 중의 아무도 그분을 마주 볼 만큼 의롭지 못하다. 그분의 심판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의지할 수 있다.

예수의 기도는 우리에게 충분할 것이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여,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왜 이 기도로 충분할까? 우리의 삶에 예수님을 들여놓기 때문이다. 거룩한 이름을 되풀이 말할 때 우리는 그 존재의 현존을 맞아들인다. 히브리 전통에서, 어떤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 자체다. 신약에서 우리는 모든 존재가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무릎을 꿇고”(필립 2,10)라는 구절을 읽는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 자신은 존재하기를 그친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 안으로 이끌려가고, 그분의 이름에 스며들고, 그분 안에 융화된다.

우리가 사는 사회 안에서도, 이름은 매우 강력한 어떤 것이다. 이름을 부를 때, 그 사람의 생활방식, 그 사람의 전 생애가 떠오른다. 어떤 특정한 이름은 우리의 삶에 있는 특정한 사건들을 상기시킨다.

어떤 이름들은 뛰어난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하고 또 다른 이름들은 두려움을 일으킨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이름은 모든 사람을 위축시키고, 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까지도 그렇게 만든다. 스탈린이라는 이름도 비슷한 반응을 일으키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라는 이름을 말할 때면, 그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그분의 모습이 따라온다.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은 그분의 현존의 한 형상이기 때문이다. 단지 “예수”라고 말하면 쉿, 하느님이 여기 계신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말하며 그분을 이곳에 데려온다. 예수의 이름 앞에, 모두 무릎을 꿇는다. 우리가 “예수”라고 말할 때, 많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예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이미 기도가 된다. 우리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라는 구절을 자신에게 상기시킨다. 대림절에 “오십시오, 주님 예수여,”라고 우리가 말할 때, 이보다 더 진실한 경우가 있을까. “오십시오, 주님 예수여.” 그러면 그분은 오신다! 이것은 실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놀라운 신비들 중의 하나다. 사람은 부르고 하느님은 그분 자신을 낮추셔서 하인의 형상을 다시 취하신다.

우리가 예수 기도를 하기 시작하고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면, 그 기도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계속될 것이다. 일단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나면, 그 이름이 그곳에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은 우리와 함께 남아 있을 것이다. 그분 역시 거기에 남아 있기를 원한다. 이렇게 우리와 예수님은 하나로 합쳐지기를 갈망한다.

집중하려고 너무 애쓰지 말자. 어떤 사람과 말할 때에도 우리는 예수 기도를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마음은 딴 데 가 있으면서 예수 기도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필요는 없다. “그 문제! 그 문제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내 생각을 방해하고 기도도 못하게 하네.” 이런 것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러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요가, 만트라, 특별한 호흡법과 기타 비-그리스도교 동방의 기도 형식을 알지 못한다. 그리스의 수도승들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예수 기도를 자연스럽게 할 뿐이고, 그래서 러시아인들도 그들에게서 배웠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여,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들어가고 나가고. 들어가고 나가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한다. 이것이 예수 기도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1월호
[원출처] <기도의 핵심으로>, 캐더린 도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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