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믿음이란, 혼란을 견디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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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믿음이란, 혼란을 견디는 것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8.04.22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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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와 욥기-2] 창세기 12장 부터 50장

창세기의 저자는 이미 하느님의 구원이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역사 한가운데 살고 있다. 그러나 어딘가 시발점은 있어야 한다. 순수한 역사적 관점에서는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이 그 시발점이 될 수도 있고 그런 이유로 우리 역시 탈출기부터 살펴본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하느님이며, 야훼가 태초부터 창조주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종교적 관점에서 그것은 실질적인 시작점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성서 저자는 결국 이스라엘의 선사시대, 탈출기 이전의 시대, 히브리인 이전의 시대, 전설에 쌓인 먼 기억의 시대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 에사오와 야곱의 이야기,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언제나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이라는 역사적 관점,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이라는 종교적인 관점, 그리고 주님 안에서 그 분께 의탁해야 한다는 예언자적 관점에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시작을 돌아보았고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믿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만약 당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부름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 인도하심을 따라 당신이 원하는 것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방법으로 성취될 때 당신은 바로 주님이 당신을 그 곳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근본적인 신앙 체험이다. 올바른 종교, 올바른 교리나 훌륭한 신학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당신은 주님이 당신을 이끄시는 곳으로 가야한다. 부르심에 마음의 문을 열고, 그것을 믿고, 부르심을 따르면 새롭고 예상치 못했던 삶으로 인도된다.

길 떠나는 아브라함

12장부터, 창세기는 신앙의 문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문제, 하느님이 이끄시는 방법을 신뢰하는 문제를 계속 다루고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둘은 결국 똑같은 것이다.

그 이야기는 아브라함, 혹은 원래 그의 이름이었던 아브람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압바(abba)라고 하는 히브리어와 관련이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백성의 위대한 선조이자 아버지이며 믿음의 아버지인 것이다.

그러나 실상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인도 유태인도 아니었으며, 그리스도인도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다. 그는 성전에서 기도한 적이 없으며; 미사에도 한번 참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성 바오로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눈에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로마서 4장).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그 분이 부르시는 길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과 개인적인 신뢰 관계를 맺었고 우리는 이를 가르켜 믿음이라고 한다. 그는 약속에 불과한 것을 위해 확실한 상황을 떠났다.

성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창세기 12,1-2)

주님의 길은 항상 약속의 길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에 들어와서 약속을 하신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 약속을 믿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믿음의 표상인 아브라함은 가족을 거느리고 사막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믿음은 상식을 거스른다

이러한 결단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성서 저자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저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면에서 특별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라도 그것을 놓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저자는 역사적인 인물이 아닌 “믿음”에 관해 쓰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대범한 필체로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아브라함이 말씀을 듣고 일어나 떠났을 때 그는 이미 75살이나 된 고령이었다! 게다가 그의 아내 사라 역시 그 만큼이나 나이가 들어있었다. 그녀에겐 아이가 없었고 또 불임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위대한 민족의 어머니가 될 수 있겠는가? 저자는 결국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모든 것이 믿음의 문제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다. 주님을 신뢰하고 결과에 무심한 것은 바로 이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믿음은 상식과는 별개의 것이다. 아브라함이 주님을 믿은 것은 상식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야훼가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미래의 땅, 약속된 땅에 도착했다. 주님은 그 땅이 그 곳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 하셨고 실제 거기에 있었다. 그 곳에 도착해 주변을 살펴 본 아브라함은 땅에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지방 군주들이 자기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항시 전투를 벌이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다시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방패가 되리라.” (창세기 15,1).

믿음과 두려움은 반대되는 것이다. 믿음의 길은 신뢰의 길이며, 하느님께 투쟁을 맡기는 것이며, 주님께서 보호해 주시도록 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아직 이런 믿음의 문제에는 신참이었다. 그래서 야훼가 그에게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끌어낸 야훼다”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제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무엇을 보고 알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창세기 15,7-8).

사라의 출산

야훼는 더 깊은 믿음을 요구하는 전형적인 대답을 하신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대단한 것이었으나 그것 보다 더 굳건해야만 했다. 하느님은 징표를 보여주시지 않는다. 대신 그 분은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과 친교를 가질 때 치루던 고대 의식인 제물을 바치라고 하신다. 다시 말해 주님은 아브라함이 당신과 좀 더 가까이에서 걸어가기만을 원하신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 분께 의탁하고, 그분과 일치함으로써 그분을 알게 된다. 다른 논리적인 방법으로는 증명이 안된다. 점장이의 예언구슬 같은 것도 없다. 친구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듯이 주님도 약속을 지키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 분이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시고 당신은 그 분의 마음을 보며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이 다음으로 아브라함이 가졌던 커다란 질문이었다. 어떻게 90살이 가까워진 불임인 아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주님께서 자신이 무엇인가 하기를 기다리신다고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 부족의 관습에 따라 하녀에게서 이스마엘이란 아들을 얻게 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아니다. 너는 그저 사라의 남편으로만 있으면 된다. 그 일을 하는 이는 네가 아니라 나다. 나를 믿어라.” 그래서 아브라함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사라가 아들 이사악을 잉태하게 된다. 드디어 약속이 실현되는 듯이 보인다!

믿음은 논리적이지 않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직까지 완전치 못하다. 야훼께서는 그를 한 번더 시험하신다. 몇 년 후 야훼께서 그에게 와 말씀하시길, “그래 아브라함아,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믿고 있는지 알고 싶다. 나를 위해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쳐라.” 그러나 이때쯤 아브라함은 이미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전에 하느님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대답하기를, “알겠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그 약속을 아십니다. 저는 그 약속을 믿고 그것이 실현될 것임을 믿습니다. 당신이 진실로 제 아들을 죽이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믿음은 늘 논리적이지 않고 어떤 때는 비도덕적인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데리고 언덕으로 올라가 이사악을 제단에 눕힌다. 그는 자신의 부성에 맞서는 일을 하려고 한다. 그는 모든 상식과 어긋나는 일을 하려고 한다. 그가 칼을 막 쳐들자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칼을 내려놓아라. 그 아이를 해치지 말아라. 이제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를 확실히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창세기 22,12).

주님은 이사악 대신 번제물로 바칠 동물을 보내주셨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과의 일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모두 내어놓았기에 하느님도 아브라함과 일치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그에게 주셨다: 그분은 모든 것을 주셨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자유인이 되었다. 고향을 떠날 때 그는 가족과 고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는 적지에 걸어 들어감으로써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 주님이 그에게 아들을 주심을 믿었을 때 그는 의심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자녀들로부터도 해방되었으며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겼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도 해방되었다.

 

Hecho por Juan de Valdes Leal

자유, 믿음에 대한 보상

그리고 하느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모든 것을 되돌려 주셨다. 아브라함은 가족, 국가, 아들, 미래를 모두 다시 찾게 된다.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자유,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가장 깊은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자유를 받는다. 그 소망은 주님께서 그 곳에 불어넣어 주신 것이며, 믿음이 위대한 인간 완성을 이루듯, 믿음으로 이끄는 소망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행복하게 죽는다. 그는 후손들을 보지 못했다. 그는 약속한 땅이 그의 것이 되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보았으므로 모든 것을 다 본 것이다.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에서 성서의 저자는 이사악과 그의 두 아들 에사오와 야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야곱이 어떻게 야훼와 씨름을 했으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원조인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 대해 들려주며 그들이 가나안의 가뭄을 피해 어떻게 에집트로 가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야곱이 가장 사랑한 아들, 하느님을 믿고, 그의 가족을 노예 상태에서 구한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러나 실제로 이 모든 이야기들은 모두 똑같은 주제를 담고 있다. 그 이야기는 결국 모두 아브라함의 이야기다. 그것은 믿음의 이야기인 것이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이사악, 야곱, 요셉의 믿음의 여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물론, 그들은 완전하지 못했다. 야곱은 엉터리 예술가였고 진짜 수완가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주님을 믿는 법을 배웠다. 그의 아들들은 동생 요셉을 시기하여 그를 노예로 팔아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이 그들의 죄까지도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았고 요셉이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이 기아에서 구원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브라함에서 요셉에 이르는 창세기의 이야기는 포기와 완성의 이야기로, 우리가 그분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관계없이 하느님께서 자신의 약속에 얼마나 충실하신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예를 들어가며 계속되는 믿음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보상, 약속의 완성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약속은 거의 언제나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지곤 한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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