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이민자 출신 교황, 난민을 염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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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이민자 출신 교황, 난민을 염려하다
  • 한상봉
  • 승인 2018.04.22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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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7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자신이 ‘불법’이민자는 아니었지만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이다. 교황의 조부모는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주의 작은 마을인 포르타코마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며 그럭저럭 살 수 있는 중산층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걱정에 휩싸였다. 한편 할머니인 로사 마르게리타는 성당 강론대에 올라가 독재자 무솔리니를 비판할 만큼 반골 기질의 여성으로 파시즘의 등장에 염증을 느꼈다. 마침 형제들이 당시 유행처럼 아르헨티나에 건너가 자리를 잡자, 교황의 조부모도 다른 가족들과 합류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1929년 1월, 더 나은 삶을 위해 대서양을 건너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도착한 이탈리아 사람들 가운데는 24세의 마리오 주세페 프란치스코도 있었다. 그는 1935년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레지나 마리아 시보리와 결혼했다. 이듬해인 1936년 12월 17일,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프란치스코 교황)가 태어났다.

 

열광적인 축구팬

어린 호르헤 마리오는 아르헨티나 공용어인 스페인어와 함께 어머니처럼 이탈리아 피에몬테 말을 사용했다. 그는 어린 시절 노래로 부르던 ‘라사 노스트라나(Rassa nostrana)’라는 시를 지금도 외우고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시인 니노 코스타(Nino Costa)가 지은 이 시는 이민자들의 고된 삶과 운명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하여 한 절기 손실로 망치고
노동으로 상하거나
발병하는 것보다 더 힘겨운 것은,
낯선 타향의 성당 뒤뜰
차가운 묘지로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리니.”

호르헤 마리오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13세에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아버지가 회계를 봐주던 양말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처음 2년 동안은 청소만 도맡아 했고, 다음 해에는 사무 보조원으로 일했다. 17세에는 제약회사에서 일하며 식품화학을 배우는 공업학교에 진학했다. 호르헤 마리오는 아침 7시부터 오후 1시까지 공장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밤 8시까지 학교에서 공부했다.

제약회사에 다닐 때 상사였던 파라과이 여성 에스테르 발레스트리노 데 카레아가리를 무척 좋아했다고 후일 어느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녀는 공산주의자였는데, 독재정권 말기에 그녀의 딸과 사위가 납치되었고, 그녀 역시 얼마 후 실종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녀는 앨리스 도몽과 레오니 두켓이라는 두 프랑스 수녀와 함께 납치되어 살해당했다. 이들의 시신은 산타크루스교회에 안치되어 있다.

한편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금도 열광적인 축구팬인데, 학창 시절부터 아르헨티나의 여느 아이들처럼 축구를 좋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산 로렌조 데 알마그로’의 열렬한 응원자가 되었다. 이 팀의 이름은 가난한 동네 아이들을 폭력과 갱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축구팀을 만든 어느 본당 사제의 이름을 딴 것이다. 교황은 아직까지 이 축구팀의 회원으로 ‘까마귀’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면서, ‘88235N’이라는 회원권 번호까지 갖고 있다고 한다.

당시 호르헤 마리오의 아버지 마리오 주세페 프란치스코는 철도 회사의 경리로 일하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교황은 당시 아버지가 일요일에도 오후에는 큰 장부들을 거실 탁자에 펼쳐 놓고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집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이탈리아 음악 LP판을 틀어 놓곤 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 난민에 대한 관심

프란치스코 교황이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이민자들처럼 어떤 이유에서든 자기 땅에서 떠나야 했던 이들, 난민들과 장애인과 노인과 어린아이들, 노동자와 농민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호소해 온 것은 그의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다고 보아도 좋다.

호르헤 마리오가 1958년 예수회에 입회했을 때 제일 기뻐한 것은 할머니였다. 마르게리타 할머니가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고 한 말을 교황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또한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에도 할머니의 친필 유언장이 책갈피에 꽂혀 있는 《성무일도》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지금도 교황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전한다.

“내 마음에 있는 좋은 것을
모두 다 줘도 아깝지 않은 내 손자들이
부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해 주소서.
그리고 행여 언젠가
내 손자들이 고통과 질병으로,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아파한다면,
이것을 기억하게 하소서.
십자가 발치에 계신 성모님께서는
가장 고결하신 주님의 감실을 보며 탄식하고 계신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은 너무도 아픈 상처에
한 방울 향유를 바르는 것과 같다는 것을.”

움막에 살든, 생존을 위해 난민 보트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든, 누구에게나 교황처럼 다정한 가족이 있을 것이다. 교황이 보기에 ‘가난’은 일차적으로 ‘가족’을 해체시키고 불안으로 몰아 넣는 죄악이었다. 교회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자신이 가난한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고향인 나자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가던 중 객지에서 예수를 낳았으며,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한 가족인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아기를 낳자마자 국가권력인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가야 했던 이민자 가정에서 예수가 태어났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가난’ 또는 ‘가난한 이들’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 되시어 언제나 가난한 이들과 버림받은 이들 곁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사회에서 가장 방치된 이들의 온전한 발전에 대한 우리 관심의 바탕이 된다.”고 전했다.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가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도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교황은 해방신학의 출발점이 되는 구약성서 ‘탈출기’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말을 시작한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귀담아 들으신다는 것이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내가 그들을 구하러 …… 내려왔다. 내가 너를 보낸다.”(탈출 3,7-8,10)

그래서 교황은 “가난한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느님의 도구인 우리가 그러한 부르짖음에 귀를 막는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계획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어 “자비의 복음과 인간 사랑으로 인도되는 교회는 정의를 요구하는 울부짖음을 듣고 있으며, 온 힘을 다 기울여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덧붙여 “이는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없애고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발전을 촉진하도록 일하라는 의미”라고 되새겼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택은 유보될 수 없다

아울러 교황은 이러한 복음적 메시지가 “매우 분명하고 직접적이며, 아주 단순 명료하여” 교회라 해도 이 메시지를 마음대로 다르게 해석할 권리가 없다고 단언한다. 교황은 1968년에 메데인에서 열린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이후 푸에블라와 산토도밍고, 아파레시다에 이르기까지, 주교들이 성찰하고 결단을 내린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음적이고 우선적인 선택’에 대해 한 치도 생각을 유보하거나 양보할 생각이 없다.

교황은 “정통 교리의 옹호자들은 가끔 수동적이라거나 특권층이라는 지탄을 받으며, 무참한 불의의 상황과 그 불의를 지속시키는 정치체제와 관련하여 공모자라는 비난을 받는다.”라는 신앙교리성의 <자유의 전갈>에서 지적한 내용을 다시 인용하며, “형제애로, 겸손하고 너그러운 봉사로, 정의로, 가난한 이를 향한 자비로 그토록 힘차게 초대하는 성경의 권고들”을 복잡한 말로 희석시키거나 구름으로 가리려는 보수적 태도에 대해 일침을 놓았다.

교황은 오히려 “하느님께서 친히 ‘가난하게 되실’ 정도로 하느님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의 구원 역사 전체는 가난한 이들의 존재를 특징으로 합니다. 구원은 거대한 제국의 변두리 작은 마을에 사는 보잘것없는 처녀가 말한 ‘예’를 통하여 우리에게 왔습니다. 구세주께서는 가난한 집의 아기들처럼 가축들 가운데에서 태어나 구유 안에 누워 계셨습니다. 어린 양을 장만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이 제물로 바치는 산비둘기 두 마리와 함께, 구세주께서는 성전에 봉헌되셨습니다. 또한 평범한 노동자 가정에서 자라나셨고 손수 노동하여 양식을 마련하셨습니다.

구세주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셨을 때, 가진 것 없는 무리가 그분을 따랐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시어 ……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루카 4,18)라고 그분께서는 친히 말씀하신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분께서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하시며,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과 가난에 짓눌린 이들에게 하느님 마음속에 그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다고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구세주께서는 그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너희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다.’(마태 25,35) 그리고 이 모든 이에게 베푸는 자비가 천국의 열쇠라고 가르치셨습니다.” - 《복음의 기쁨》 197항

그렇기 때문에 교황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문화, 정치,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에, “이러한 정신으로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을 해 왔다.”는 것이다. 교황은 더 나아가 “가난한 이들을 통해 교회 자신이 복음화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라는 초대”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들의 요구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 주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에게 귀 기울이며 그들을 이해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그 신비로운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 《복음의 기쁨》 198항

이러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각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푸에블라 주교회의 개막 연설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교회의 복음적 투신은 그리스도의 경우처럼 가장 궁핍한 이들을 향한 투신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을 계승한 것이다.

푸에블라 주교회의는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 처한 윤리적 또는 인격적 처지가 어떻든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다.”고 밝혔다. 덧붙여 “가난한 이들 역시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는데, 가난 때문에 이 모상이 흐려져 있고 심지어 더럽혀지기조차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느님은 그들의 방벽이 되시고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했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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