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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로 망할 대한항공과 백종원 그리고 교회

[김경집 칼럼] 

갑질, 그 천박한 폭력

부자 마다할 사람 별로 없다. 열심히 그리고 정당하게 노력해서 돈을 많이 모은 사람은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그 돈으로 기업을 꾸려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참된 기업인은 진정한 애국자요 모범시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나라에 그런 기업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재벌들, 특히 2~4대 재벌 자손들이 벌이는 추악한 행태는 열심히 노력하는 일반 시민들을 좌절시키고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인격적으로 미성숙하고 제대로 된 경영 능력도 없이 그저 좋은 부모 만난 덕택에 젊은 나이에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일이 너무나 흔한 현실에서 그들이 일반 시민의 삶에 대한 기본적 공감의 능력조차 없다는 사실은 우울하고 절망스럽다.

그런 함량 미달의 인간들을 위해 취업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생계 자체만을 위해 직장을 얻은 것도 아니다. 물론 요즘처럼 일자리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인 세상에서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게 상대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오로지 돈 때문에만 일하는 건 아니다.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적으로 유익한 일을 하면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게 바로 노동이고 직장이다.

그런데 오직 돈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도 냉정하게 말하자면 흔히 오너라는 사람들이 고작 몇 퍼센트의 지분으로 마치 자신의 재산인 것처럼 전횡하면서 사람 같지 않은 짓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걸 볼 때 어떤 마음이 들까. 자괴감과 분노가 치밀 것이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마음속으로 그저 꾹 누르고 버틴다. 인격적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 자체만으로도 그것은 비극이다.

 

갑질인지도 모르는 갑질

대기업에 취업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인 세상이다.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야 들어간다. 예전처럼 승진이 빠르지도 않다. 그런데 별 능력도 없으면서 오너의 자녀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높은 자리부터 시작하는 게 다반사다. 새로운 골품계의 세상이다. 직원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절망감 따위는 애초부터 무관심이니 자기 새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리고 그들에게 자기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 내리꽂는다. 모든 의사 결정권을 쥐고 있는 엄중한 자리다. 그의 판단 하나가 기업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땀으로 일궈놓은 기업이 그렇게 망한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넘볼 수 없는 재산을 챙길 것이다. 정의는 개나 줘버린 지 오래다.

정의는 결코 쉽게 그리고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모든 시민이 각성하고 경계하며 거짓과 불의를 비판하고 저항하며 맞서 싸울 때 지켜낼 수 있다. 나는 백종원이라는 사람이 나오는 TV프로그램들을 보면 화가 치민다. 나는 그와 아무런 사원(私怨)과 사연도 없다. 그는 분명 재능 많은 사람이다. 그러니 여기저기 수많은 TV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그런데 정말 그래도 될까?

사실 이른바 먹방 혹은 쿡방의 출현은 지금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욕망이 고작해야 식욕일 뿐이라는 부끄러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두려워해야 한다. 그런데 백종원은 요리연구가나 요리평론가도 아니고 조리학과 교수도 아니며 작은 식당 하나 경영하는 주방장(요즘은 꼭 외국어로 ‘셰프’라고 불러줘야 하는 듯하지만)이나 식당 주인이면 모를까, 그는 엄청난 규모의 요식업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기업가다.

TV 출연은 대단한 혜택이다. 아무나 못한다. 그 덕에 그는 광고도 출연한다. 다양한 요식 사업도 확장한다. 심지어 다방까지 하고 호텔도 운영하며 급기야 편의점의 도시락 김밥까지 장악하고 있다. 그러면 그 이전에 편의점에 도시락 김밥 납품하던 사람은 어찌 되었을까? 길바닥에 나앉게 될지 모른다. 그가 누구인가. 바로 내 옆집 사람이다. 지금은 불행히도 그가 희생양이지만 그 다음 차례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 생각 없이 그를 스타로 떠받들고 그의 가게에 줄을 잇고 서서 음식을 사먹는다.

과연 그가 TV의 스타가 아니라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엄청난 재력을 지닌 정치인도 국회의원이나 장관 등의 자리에 오르려면 재산을 공개하고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면 주식을 백지신탁하거나 경영에서 손을 떼야 한다. 그런데 그는 방송도 하고 사업도 한다. 방송은 이미 하나의 거대한 문화권력 그 자체다. 그걸 사업에 이용한다. 이건 불공정한 일이다.

그걸 금지하는 방송법이 없더라도 PD들이 무조건 그를 영입하기보다 최소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아니, 그러기 전에 스스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방송을 하는 동안만이라도 사업에서 손을 떼거나 사업을 하려면 방송을 그만둬야 옳다. 그는 이미 불공정한 방식으로 방송의 스타가 되었고 그걸 바탕으로 기업을 빠른 속도로 키우고 있다. 그런데도 소비자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그 프로그램들을 즐기며 소비한다.

소리 꽥꽥 지르고 물컵 던지고 고작 땅콩 서빙 문제로 비행기 회항시키는 것만 갑질이 아니다. 백종원이라는 사람의 행태도 이미 갑질이다. 아무리 재능이 많아도 방송 프로그램 하나 꿰차기 어렵다. 게다가 사업까지 하면서 둘 다 누리는 건 불공정한 일이다. 우리는 자극적이고 돌출적인 사건이 불거졌을 때 비로소 갑질 운운하면서 흥분한다. 재벌3세들이야 정상적 시민의 삶을 살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성장했으니 괴물 같은 자들과 행태들이 드러나지만 백종원이라는 인물은 스스로도 그리고 소비자들도 그걸 인식하지 않는다.

백종원은 재벌 3세처럼 천박하게 자란 사람도 아니다.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요식업에서 흥망을 다양하게 경험한 사람이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고 공감 능력도 충분한 사람이다. 골목 상권에서 노력하지만 사업이 잘 되지 않는 식당의 주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을 보면 그런 품성이 보인다. 나는 그가 기본적인 인성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과가 그렇지 않다면 과연 문제는 그에게 있는가, 방송 시스템에 있는가, 아니면 우리들 소비자들의 사고방식에 있는가.

내가 백종원이라는 특정한 인물을 사례로 든 것은 우리가 오만하고 무능력하며 무책임하고 뻔뻔하기 그지없으며 비인격적인 재벌 3,4세들의 사례들에만 너무 흥분하고 있지 않은가 싶어서다. 그들은 이미 보통 시민들과 ‘품계’가 달라서 ‘넘사벽’이다. 그래서 그들의 패악에 쉽게 흥분하고 분노한다. 그 흥분과 분노는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자면 그 흥분과 분노가 일시적이고 그들의 패악이 반복된다는 것은 어쩌면 분풀이의 표출로 삼기에 그만이기 때문은 아닌지, 그 다음에 사회적으로 어떻게 재발방지책을 마련할지 따위는 관심이 없는 것 아닌지 묻고 싶다.

그런 점에서 백종원은 서글서글하고 유머러스하며 서민적 풍모로 소비된다는 점에서 그가 누리는 혜택 자체가 갑질이라는 건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비판의 제기 또한 마땅할 것이다. 백종원 스스로도 그리고 소비자들도 그가 갑질을 벌이고 있다는 걸 전혀 인식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어쩌면 재벌가 자녀들의 패악적 갑질보다 더 두려워해야 하는 것 아닐까?

 

사진=한상봉

성역이라는 또 다른 갑질

갑질은 저잣거리에만 있는 게 아니다. 거의 모든 곳에 만연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회 안에서도 갑질이 벌어진다. 개신교 대형교회의 세습은 하도 흔해서 눈길도 끌지 못할 지경이다. 그러면서 북한 정권의 세습을 비판하고 기업의 세습을 비판할 수 있을까? 내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에 있는 티끌만 부풀린다. 개신교회는 원칙적으로 개별교회의 독립성을 갖는다. 그래서 그런 갑질이라고 해봐야 전체 교단의 문제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교회가 하나의 통일된 조직과 질서로 통합되어 있는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몇몇 타락한 개신교 대형교회들의 세습이라는 참담한 갑질은 엄격히 말하자면 그 교회의 일이다. 물론 그 교회들이 교단 내에서 큰 정치권력을 휘두르고 있기 때문에 개별 교회의 문제라고 국한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일단은 개별적 문제다. 그런 교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톨릭교회가 깨끗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노골적인 치부가 드러나지 않을 뿐이라면 어떤가. 모골이 송연한 일이다. 가톨릭교회는 하나의 문제가 터지면 교회 전체의 종양이 된다는 점에 늘 주목하고 경계해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교계제도(hierarchy)라는 뼈대를 갖추고 있다. ‘교종-대주교/추기경-주교-사제’로 이어지는 성직의 계급과 교구의 체제로 운영된다. 다행히(?) 독신 서약을 한 사제들이기 때문에 세습할 위험성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지만 고위 성직에 오를수록 권위와 비이성적 판단으로 교회를 재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세교회의 타락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 타락은 도덕적 타락만 전부가 아니다. 말로는 사랑과 우애의 ‘사목’이라 하지만 본질은 일방적 명령과 반시대적 권위와 판단으로 점철하는 경우가 엄존한다. 그 폐쇄성과 비소통 그리고 비합리성을 비판하거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반인권적 비민주적 문제를 지적하면 경청하기보다는 억압하고 비난한다.

주교들과 사제들이 예언자의 역할은 포기하고 제사장의 권위만 누리려고 하는 모습은 그 자체가 반 복음적인 일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갑질이다. 갑질은 해야 할 의무는 외면하고 권리는 과도하고 누리려고 하면서 발생한다. 사회가 불의와 폭력, 비인격성과 비도덕의 나락으로 빠질 때 의연히 나서서 책망하고 깨우치는 예언자는 외롭고 힘들다. 특히 주변에 있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기득권을 누리고 있거나 권력의 자락에서 이익의 부스러기를 얻고 있다면 그들은 결코 예언자의 편에 서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억압의 주체 곁에 서서 예언자들을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갑질하는 자들의 편에 서지 않으셨다. 그분은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사람들 편에 서서 깨우치고 가르치며 사랑과 정의를 실천해야 함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게 복음의 메시지가 담고 있는 수많은 사건들이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채찍을 들고 야단친 건 단순히 거기에서 장사하던 이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런 판을 벌여놓고 이익을 취하던 교회와 사제들에 대한 준엄한 질책이었다.

가톨릭교회의 보수성의 뿌리는 보수적 교계제도와 그것을 유지하며 제사장의 권위에 더 충실한 성직자들의 태도에 있으며 이미 거기에 순치된 많은 신자들의 맹목적 태도에 근거한다. 그 맹목성을 ‘순명’이라는 미명으로 분칠한다. 교회와 성직자들이 엄중하게 알아야 한다. 신자들이 몰라서 비판하지 않는 게 아니다. 아무리 말해도 들으려 하지 않거나 권위로 눌러버리는 일이 다반사거나 함께 힘을 합쳐 잘못을 지적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제기하기는커녕 오히려 옆에서 비난하거나 잘난 척한다고 비아냥거리는 동료 신자들의 외면과 질시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교회라고 무조건 성역일 수는 없다.

대주교나 주교의 입장에서는 모든 비판을 다 들어줄 수 없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비판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달리 보일 수도 있고, 아래에서 보는 것과 위에서 보는 것이 다를 수 있다. 혹은 작은 돌 하나 건드리면 자칫 축대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경험적(?) 위기의식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합리적인 소통과 포용적 이해를 외면하고 권위와 직분으로 억압하는 것은 엄연히 갑질이다.

모두가 깨어나야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갑질을 키운 것은 어쩌면 우리들 자신일 것이다. 알아서 기고 윗사람 듣지 좋은 말만 골라서 아부하며 자신의 위상을 확보하려는 알량한 셈이 만들어낸 괴물이 갑질이다. 미투 캠페인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진 게 아니다. 이전에는 몰랐던 게 아니다. 모두가 외면하고 내 일이 아니라고 모른 척했을 뿐이다. 아주 오랫동안 휘둘러온 폭력이었다. 그게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폭력이라고 느끼지 못했거나 느끼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용기가 그 폭력을 고발하게 만들었고 그동안 억눌리고 왜곡된 인식의 허물을 깨뜨렸다. 거기에는 그냥 넘겨도 될 가벼운 허물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안타까움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흐름은 도도한 강물이 되었고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조아무개의 황당하고 이해 불가한 횡포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저 그러려니 외면했기에 점점 더 심해진 횡포였다. 그러나 정작 노블리세 오블리쥬와는 거리가 먼 그릇된 오너 의식에 젖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보고도 불이익을 당할까봐, 혹은 일상적인 일이어서 체념하고 외면한 우리들이 키워낸 괴물이 빚어낸 갑질이었다.

갑질은 가장 천박한 폭력이다. 유별난 갑질은 쉽게 인식된다. 그리고 쉽게 분노한다. 그러나 교묘한 갑질과 갑질인지도 모르는 채 굳어진 관습처럼 만연한 갑질은 쉽게 눈에 잡히지 않는다. 이제 그 허물들을 다 벗어야 한다. 쉽게 벗겨지지 않을 것이다. 쉽게 벗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분명히 말한다. 그 허물을 벗고 새로운 아담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그게 부활이다.

‘어제의 내가 아니다(I am no what I was)’라는 고백이 바로 복음의 고백이고 실천이다. 갑질은 저지르는 자들만의 잘못이 아니라 그것에 길들여지거나 굴복한 우리들 모두의 허물이다. 작지만 용감한 고백에서 시작된 혁명이다. 그 혁명에 걸맞게 혁명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루카 21, 20)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생각을 걷다> 저자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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