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 낯선 분] 솔로몬 성전부터 헤로데의 성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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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 낯선 분] 솔로몬 성전부터 헤로데의 성전까지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8.04.18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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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와 예루살렘- 8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수도를 확장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북쪽 언덕, 곧 옛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위에 궁전과 성전을 세우려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사 년째 되던 해 지우 달,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은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1열왕 6,1)

이곳은 모리야 산으로도 불린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모리야 산에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곳은 주님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으로서, 본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집터로 잡아 놓았다.”(2역대 3,1)

그리하여 솔로몬은 기원전 960년경에 페니키아인들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웠다. 티로 임금 히람은 레바논 향백나무와 방백나무를 보냈다.(1열왕 5,15-32; 2역대 2,2-15) 이것이 솔로몬의 성전(Solomon's Temple)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제1성전(First Temple)이다.

 

Giotto di Bondone(1304-06)

솔로몬은 이 성전에 계약의 궤를 모셨다. 이 성전을 묘사하는 성경 본문(1열왕 5,15-7,5)은 이집트 탈출 이후 하느님이 모세에게 만남의 천막을 세우기 위해 명령하신 본문(탈출 25-31장; 35장)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솔로몬의 성전은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파괴되었다.

약 50년가량의 바빌론 유배 이후, 유다인들은 귀환하였다. 그들은 다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바쳤다. 성전의 재건축은 기원전 537년에 세스바차르에 의해 시도되었고, 예언자 하까이와 즈카르야의 지원으로 기원전 520-515년 동안 즈루빠벨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이렇게 유배 이후 다시 세워진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에 이은 제2성전이다. 사실 기원전 587년의 유다 왕국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그리고 뒤이은 바빌론 유배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엄청난 상실이요 위기였다. 유배에서 되돌아온 유다인들의 주된 관심사며 과제는 상실의 회복, 과거의 복구와 재건이었다. 이 과제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통하여 가시화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는 동시에 유배 이후 유다 민족의 권위 있는 최고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함께 했다. 새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던 자리에 같은 구조로 세워졌으나 그 규모는 첫 번째 성전에 비하여 작았다.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 가운데에서 주님의 옛집을 보았던 많은 노인들은, 자기들의 눈앞에서 이 주님의 집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목 놓아 울었다. 그러는가 하면 다른 많은 이들은 기뻐하며 목청껏 환호성을 올렸다.”(에즈 3,12)

제2성전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헤로데 대왕에 의해 더 웅장하게 확장되었다. 이두매아사람 헤로데는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성전을 다시 개조하는 작업을 기원전 20년에 시작하였다. 성전은 화려하게 꾸며졌고 그 면적은 두 배로 늘어났다. 이 헤로데의 작업은 요세푸스의 문헌인 『유다 전쟁사』 5권 184-237과 『유다 고대사』 15권 380-425 뿐 아니라 라삐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예루살렘의 성전 산은 당시 유다인들의 삶에서처럼 역사적 예수의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바빌론 유배 이후 세워진 제2성전인데, 헤로데 대왕에 의해 증축된 것이다. 헤로데의 성전 산(Herodian Temple Mount)의 크기는 남북으로 450m, 동서로 300m 가량 되었다.

성전은 여러 경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방인들에게도 개방되었던 “이방인의 뜰”(Court of the Gentiles), 이스라엘의 남자와 여자들을 위한 “여자들의 뜰”(Court of the Women), 이스라엘의 남자들만을 위한 “이스라엘의 뜰”(Court of the Israelites), 그리고 사제들에게만 허용된 “사제들의 뜰”(Court of the Priests)이 있었다.

그래서 전체 성전산은 본격적인 의미의 성전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의 뜰”로 나눌 수 있었다. 이 둘 사이에는 난간이 있었고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명각(Inscription)에 경고문이 새겨졌다. 즉 이방인이 들어올 수 없음을 알리고 이를 어길 경우 죽음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경고였다.

송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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