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예수, 비우고 아래로 실패로 치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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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 예수, 비우고 아래로 실패로 치욕으로
  • 헨리 나웬
  • 승인 2016.05.0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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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이타적인 길-2

위로 올라가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고도의 기술과 경쟁의 사회를 보면, 사람들의 위로 올라가려는 경향이 지배적이고 만연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상향적인 삶의 방식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우리가 살아가는 전체 삶은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가고 꼭대기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우리가 생명력을 느끼는 때는 이러한 상향 추진에 한 부분이 되고 있는가에 따라, 그리고 올라가는 도중에 주어지는 보상에서 오는 기쁨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의 부모, 교사, 친구들은 우리가 지시들을 알아 듣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 세상에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우리의 거룩한 과제라고 새겨준다. 실제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길고 경쟁적인 싸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승리를 거두는 것을 의미한다. 기관들뿐 아니라 개인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지식과 사람들을 정복해야 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성공하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리고 사랑조차도 정복하고 이겨야 할 대상이거나 승리의 대가로 주어지는 상이라고 여긴다.

이처럼, 삶이란 우리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전투의 연속으로 제시된다. 이겼을 때 우리는 우리 사회의 이상을 이루며 사는 것이고, 졌을 때에는 분명히 우리 자신의 결함 때문에 지는 것으로 간주된다.

ⓒ한상봉

 

<계층들의 숨겨진 상처>라는 감동적인 책에서, 두 저자 죠나탄 콥과 리챠드 세네트는 그 반대 사실을 증명하는 확연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에 대하여 비난 받아야 할 사람들은 우리 자신 밖에 없다고 믿게끔 강요받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교육을 받지 못하고, 가난하거나 실업상태에 있다면, 우리의 결혼 생활이 불행하거나 반항적인 아이들이 있다면, 중대한 이유는 단지 우리가 충분히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게을렀고, 훈련이 되지 않았으며, 비도덕적이거나 그저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이런 메시지를 들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는 실업이나 가족해체 때문만 아니라 죄책감과 수치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내가 어떤 포부나, 발전 그리고 성공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끝없이 위로 올라가려는 통제되지 않는 충동이 아니다. 권력을 지향하는 가짜 포부와 사랑하고 섬기는 진정한 갈망 사이에는 깊은 차이가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들어 올리려고 노력하는 것과 동료 인간들을 들어 올리려고 노력하는 것 사이의 차이다. 문제는 개인이나 공동체로 발전하고 진보하려는 갈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 올라가는 것 자체를 종교처럼 떠받드는 것에 있다.

상향적인 종교에서, 우리에게 성공이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믿는 것이고, 실패란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와 한 편인가?” 그런 경우 하느님은 우리를 이기게 해줄 것이다. 우리는 발전이란 인간의 잠재력을 끊임없이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교육되었다. 성장한다는 것은 더 건강해지고, 더 힘 있어지고, 더 똑똑해지고, 더 성숙하며, 그리고 더 생산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우리는 이 발전의 신화를 지지해주지 않는 사람들, 예를 들면 나이든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그리고 정신 지체를 지닌 사람들을 숨기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확실한 사람들로 여기고 따라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초라한 부적격자로, 발전의 정상적인 궤도에서 벗어난 사람들로 취급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살펴볼 때, 우리는 상승 지향의 움직임을 거의 우상화하는 뻔뻔스럽고 충격적인 암시들을 발견한다. 영원히 증가하는 성장과 발전을 목표로 하면서 우리는 거기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국가의 부와 권력의 증가를 약속하지 않는 사람을 공직에 뽑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다른 가치관을 기반으로 하는 진보적 제안을 내놓는 사람들은 확실하게 국가지도력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확실한 것이 있다면, 미국을 포함해 모든 나라들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하며 힘 센 나라가 되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제일이다!”라는 태도가 모든 차원에서 가장 신속하 게 키워지고 있다. 체육, 스포츠, 기업, 기술, 그리고 군사력 등 모든 차원에서 그렇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가지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청동이든, 은이든, 금메달이든 모든지 더 가지려 한다. 컴퓨터, 위성, 혹은 연구소, 또는 핵탄두, 미사일, 잠수함 등 모든 것들을 더 원한다. 더 가지려는 이 욕구와 돌진이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의 국면으로 우리를 몰아간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구원의 이야기는 상향 지향의 철학에 철저하게 반대하며 그것을 넘어선다.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위대한 역설은 온전하고도 실제적인 자유가 오직 아래로 내려가는 가운데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내려오셨고, 그분이 우리들 가운데에서 종으로 사셨다. 거룩한 길은 참으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하느님께서 아래로 내려가라는 이끄심에 아무런 유보 없이 승복함으로써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기로 결정하셨다는 신비가 우뚝 서 있다.

하느님께서는 수세기에 걸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구원의 말씀을 간직하도록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소수의 남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 하도록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갈릴래아의 숨겨진 마을의 한 겸손한 처녀가 말씀의 성전이 되도록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의 충만함을 한 남자를 통하여 드러내기로 결정하셨는데, 그 남자의 일생은 도시의 성벽 바깥에서 모욕적인 죽음으로 끝맺었다. 이 신비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정신과 마음속에 매우 깊숙하게 스며들었고 그들은 이를 그리스도의 찬미가로 노래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참으로, 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이셨던 존재가 자신을 한 작고, 무력한 아이로 드러내셨다. 그분은 이집트의 피난민으로, 순종하는 소년으로, 그리고 평범하여 눈에 띄지 않는 어른으로, 세례자 요한의 참회하는 제자였다. 그분은 갈릴래아에서 온 설교자로서 몇몇 소박한 어부들이 따랐으며, 죄인들과 함께 먹고, 이방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으로, 낙오자로, 범죄자로, 자기 백성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로 살았다. 그분은 권력에서 권력의 비움으로, 위대함에서 작음으로, 성공에서 실패로, 강력함에서 취약함으로, 영광에서 치욕으로 움직였다.

ⓒ한상봉

 

나자렛 예수의 전 생애는 모든 상향지향의 움직임이 저항을 받는 삶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왕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들은 그분이 권력을 행사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그분의 영향력에 끼고 싶었고 그 분과 함께 왕좌에 앉고 싶었다. 그러나 그분은 끊임없이 이 모든 욕망들에 “아니오.”라고 말했으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가리켰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 … 너희들은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분이 죽은 후에도 추종자들이 그분을 실패한 자유의 투사로 여기면서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 24,21) 라고 말했을 때, 그분은 다시한번 그들에게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상기시켜야 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6).

예수님은 그분이 살았던 길이 추종자들에게도 가야할 길이라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의혹을 남기지 않는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마태 10,24). 불굴의 인내를 갖고 그분은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가리킨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6-28).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8-39) 제자란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가고 그래서 그분과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다.

복음은 철저하게 위를 향하여 움직이는 우리 사회의 전제들을 뒤엎는다. 그것은 우리를 초조하게 만들고 안절부절하게 만드는 도전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의 깊게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눈을 들여다 볼 때에,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겸손하게 주의를 기울일 때에, 그리고 그들의 관찰과 인식에 부드럽게 귀를 기울일 때에,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했던 진리를 흘낏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테르툴리아누스가 말했던 “은총으로 치유된 눈”과 순간적으로 마주치는 것과 같다.

마음 깊숙한 어느 곳에서 우리는 이미 성공, 명성, 영향력, 권력, 그리고 돈이 우리가 추구하는 내적 기쁨과 평화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느 곳에선가 우리는 모든 가짜 야심을 벗어버리고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며 더 깊은 충만함을 발견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기조차 한다. 그렇다, 우리는 어느 곳에선가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의 미소 속에서 그 신비스러운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지옥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길임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런 느낌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기쁜 소식의 전달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직관과 통찰은 우리 안의 어떤 것이 이미 위로 올라가는 길에 의심을 품고 있음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님의 철저한 응답은 우리에게 충격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기꺼이 가난한 이들을 잊지 않을 것이며, 혜택을 얻지 못한 이들과 우리의 선물을 나눌 것이고, 충분한 이익을 얻지 못한 이들과 나누기 위하여 우리의 잉여분을 포기할 것이라고 기꺼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들,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 충분한 부를 만들지 못한 이들이 실상은 하느님 나라에서 축복받은 이들로서 예수님이 했던 것처럼 우리를 아래로 내려가는 길로 초대하는 사람들이라고 고백할 준비가 되었는가? 이 모든 것은 오히려 소름끼치고 무시무시하며 억누르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가는 길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새로운 삶, 예수님의 성령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알게 되면 오히려 즐거움과 자유를 느끼게 될 것이다.

(출전: 참사람되어, 201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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