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일 주교 "제주 4.3에 항쟁이란 이름 붙여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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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주교 "제주 4.3에 항쟁이란 이름 붙여도 좋겠다"
  • 강우일 주교
  • 승인 2018.04.10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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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70주년 기념 미사 강우일 주교 강론
강우일 주교. 사진=한상봉

나는 70년대, 80년대 군사정권 치하에서 이 명동에서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서 최루탄 냄새에 코를 막으며 살았고, 90년대에 들어와서도 전국 곳곳에서 교대로 찾아드는 철거민들과 노동자들 시위의 함성에 파묻혀 정말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제주에 내려가니 딴 세상이었다. 주교관 뒤에는 동네 사람의 텃밭이 있는데 3월이 되면 꾀꼬리가 노래하며 봄을 알려줬고, 5월이 되면 감귤꽃 향기가 가슴을 가득히 채워주니, 20년 넘게 매연과 최루탄 속에서 보낸 세월을 주님께서 보상해주시는구나 생각하며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제주도민들이 해방 이후 겪은 이야기를 듣게 되고 사제들, 신자들의 증언을 접하며 제주도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피에 젖은 땅인가를 절감하게 되었다. 내가 제주에 부임한 즈음 제주4.3진상규명위원회가 제주4.3의 진상을 조사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었고, 내가 제주에 도착하고 1년 후 2003년 10월15일 583쪽에 이르는 ‘제주 4.3 진상조사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를 읽고 또 제주인들이 토로하는 증언을 들으며 나는 충격을 받았다.

국민의 생명과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국가의 경찰과 군대가 국민을 정당한 조사나 재판의 절차 없이 무더기로 체포, 구금, 고문 하거나 처형했다. 공산폭도에 협조했거나 내통했다는 혐의로 죽였다. 그리고 중산간 마을의 집들은 거의 불태워버렸다. 내가 사는 아라동 주교관에서 불과 1킬로도 안 되는 개천가에 작은 표지석이 하나 서 있는데 읽어보니 그곳에도 백 삼십 여명이 트럭으로 실려 와서 집단 처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48년부터 1954년까지 6년에 걸쳐 제주도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3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 중 10세 미만이 5.8%나 되고 61세 이상이 6.1%로 되어 있다. 젖먹이도 임산부도 노인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하였다.

 

1948년 5월, 처형을 기다리는 제주 주민들.

이런 사실을 접하며 내 가슴에 한 가지 물음이 떠올랐다. 도대체 왜 이렇게 수많은 사람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 노인까지 빨갱이로 몰아서 죽여야 했을까?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무참하고 잔인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느님은 어째서 그런 비극을 허락하셨을까? 그런데 오늘 제주를 찾는 국민 대부분은 제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의 알지도 못하고, 제주에 와서 그냥 즐기다만 가는데, 그렇다면 그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냥 과거 역사 속에 파묻혀 사라지고 잊혀도 좋은 개죽음인가, 이런 물음이 끊임없이 내 가슴을 치고 있었다.

4.3때 죽지 않고 잡혀간 사람들 중 2530명이 전국 14곳의 형무소에 끌려갔는데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살아남은 이들은 구순에 이르렀다. 그 중 18명이 작년 4월19일 제주지방법원에 재심청구를 신청했다. 이들은 대부분 10대 후반 소년, 소녀들로 산에 소 풀 먹이러 갔다가, 아니면 학교 수업 끝나고 집에 오다가 영문도 모른 채 붙잡혀가 실컷 두들겨 맞았다. 아무런 재판도 받지 못하고, 그냥 형무소에 끌려가, 거기서 비로소 너는 7년, 너는 10년 하고 형량을 통고받았을 뿐이었다. 6.25 이후 형무소에서 많은 이들이 처형당했으나, 죽지 않고 살아남아 형기를 마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고향에 돌아왔지만, 정상적인 자유인의 삶을 살지 못하고 수십 년 동안 형사의 감시를 받으며 매주 누구와 만났고 무슨 일을 했는지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나는 이런 엄청난 제주도민들의 고통과 희생과 죽음이 우리와 무관한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 만물을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바라는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볼 때, 제주도민들이 겪은 무참한 죽음과 희생은 오늘 우리 민족, 오늘 우리 개개인의 역사와 어디에선가 연결되는 고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주 4.3은 1948년 4월3일에 남로당 무장대가 제주도내 12곳의 지서를 습격함으로써 오랜 기간 공산폭도들의 무장반란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4.3의 소용돌이가 시작된 것은 1948년이 아니라 1947년 3월1일 제주시 북국민학교에서 개최된 3.1절 기념대회였다. 제주도는 해방 후 1년 사이에 일본에서 갑자기 귀국한 7만 명 가까운 교민들로 인해 식량도 일자리도 부족하여 큰 혼란을 겪었다. 거기다 흉년까지 들어 보리 수확량이 30%나 급감하니 물가는 폭등하고 도민들은 거의 공황상태에 이르렀다.

그래도 미군정은 적절한 정책을 구사하지 않고 방관만 했고 일제 치하에서 경찰로 일하던 이들이 미군정 치하에서도 치안 업무를 담당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으니 도민들의 경찰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최악에 달했다. 도민들은 1947년 3.1절 대회를 기회로 민생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행정당국을 성토하였다. 제주시에만 모인 3.1절 집회 참가자가 3만 명이었다. 제주 역사상 그 전에도 그 후로도 이렇게 많은 도민이 모인 역사가 없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많은 제주도민이 하필이면 3.1절에 모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3.1절은 1919년 우리 민족 2백만 명이 전국에서 일어나 일본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봉기한 날이다. 일제의 무차별 무력 진압과 검거 작전으로 7천여 명이 사망하고 4만5천 명이 부상, 4만9천 명이 검거되니 사실상 3.1 독립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3.1절 만세운동은 곧바로 상해임시정부를 탄생시켰고, 일제강점기 35년 내내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독립투쟁을 이어가게 한 원동력이었다. 제주 4.3의 발화점인 1947년 3.1절 기념대회는 35년의 일제강점에 대해 벌인 끈질긴 저항과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다. 제주도민들은 일제에 이어서 다시 이 땅을 지배하고 수탈하는 또 다른 외세에 대한 저항의 몸짓을 1947년 3월1일 대대적으로 전개한 것이었다.

 

그런데 1919년의 3.1 독립만세운동은 그냥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니다. 그 이전에 이미 조선왕조 말엽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기상과 에너지가 있어서 가능했다. 동학농민의 봉기는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억압에 대한 민중의 저항으로 시작되었다. 동학은 인내천을 외쳤다. 사람이 하늘이라고 했다.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을 외면하고 하늘의 추상적인 이치만 따지는 조선 왕조에 저항하고 백성을 수탈 억압하는 부패한 관료를 몰아내는 싸움이었다. 정권의 위기에 직면한 조선 조정은 청과 일본군을 차례로 끌어들였고,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하며 조선을 점거하였다. 농민들은 최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낫과 죽창으로 저항하다가 5만여 명이 죽고 수십만 명이 부상하는 희생을 치렀다. 제주 4.3이 일어나기 전 이 땅에는 이런 수난과 저항의 역사가 점철되고 있었다.

며칠 전 제주 4.3평화공원에서 4.3 70주년 추념식이 거행되고, 문대통령은 그동안 4.3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시민단체, 문화 예술계 인사들의 헌신과 노력을 언급하며 이분들이 4.3의 진실을 기억하고 드러냄으로써 민주주의, 평화와 인권의 길을 열어왔다고 선언했다. 나는 이 말씀을 들으며 생각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4.3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16년의 촛불이 있기 전에, 1987년의 6월 항쟁이 있었고, 그 전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고, 또 그 전에 4.19 혁명이 있었고, 4.19 혁명 전에 제주 4.3이 있었고, 그 이전에 3.1운동이, 그 이전에 동학혁명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제주 4.3에 항쟁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4.3의 3만여 명의 희생은 결코 개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평등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순교자들의 행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2018.4.7. 명동대성당
강우일 베드로 주교
제주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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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돈 2020-06-15 00:55:52
'처형을 기다린다' 이런 표현.... 옳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