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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수건과 물의 기도기도의 핵심으로-13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완전한가를 보여주셨다. …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였다."(요한 13,1.5)

하느님은 비뚤어진 글을 바로 쓴다. 우리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라는 구절을 기억한다. 인간에게 절망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 하느님께는 희망이 넘치는 것일 수 있다.

선진국의 우리들은 죄를 짓고 있다. 풍요로운 사회에 매몰되어, 우리는 관대하게 남는 것을 내놓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내놓는 데에는 인색하다. 수년 전 미국의 북서부 지방에서 감자를 불태운 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 감자들이 상품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캐나다 서부 지방에서는 곡물이 썩도록 방치하였다. 이런 생산물은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다. 우리의 형제에게 죄를 지었으므로, 우리 자신에게도 죄를 지었다. 우리는 우리의 흑인형제를 미워하고, 인디언 형제를 좋아하지 않으며, 자주 우리와 다른 모습의 사람을 멸시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우리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계명,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수행하지 못하는 죄를 짓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죄를 짓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교도들이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 보라, 그들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그런데 우리는 왜 희망을 가지는가? 왜냐하면 주님께서 땅을 갈아엎고 고르게 하며 사랑의 씨앗을 뿌리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기도의 초록순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기도하고 조용한 장소로 가서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섬길 때에 자신을 쏟아부으시는 분을 향하여 내적으로 이끌린다.

그리스도의 삶은 기도와 섬김의 삶이었다. 우리의 삶도 그래야 한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귀를 기울이는 시간, 그분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시간도 가져야 한다. 기도와 섬김은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다 가능하다.

공동체를 추구한다? 가장 위대하고 가장 근본적인 공동체는 우리가 세례 받은 날부터 우리의 마음속에 머무시는 삼위일체다. 우리는 우리 안의 삼위일체와 만난다. 우리는 한 손을 하느님에게 다른 한 손은 이웃에게 뻗는다. 이것이 공동체다. 우리가 사람을 향하여 손을 뻗지 않는다면, 삼위일체를 향하여 뻗는 손은 그냥 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그 손을 붙잡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하느님.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모습이다.

특별한 방식으로, 하느님은 모든 마음에서 이 기도를 일어나게 한다. 사랑과 섬김의 이 기도 안에서 모든 적대감, 증오, 조작하려는 욕망은 사라져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마음껏 기도하고 성경을 읽을 수 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기도의 핵심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마음의 환대를 위하여 애쓰자. 그것이 없으면, 환대의 집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심판하지 말고 깊은 존경심을 갖고 받아들이자. 전통적인 러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에게 “나의 형제는 나의 생명이요, 나의 형제는 나의 기쁨이다”라고 인사한다. 형제를 만날 때에, 우리는 그를 살피거나 질문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처럼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마음 안에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그에 대하여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이다.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자세는 영적인 투쟁을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아닌 모든 것과 싸워야 한다. 이것이 케노시스다. 하느님으로 채워지기 위하여 자아를 비우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가난이다. 하느님을 만질 때, 우리는 사람을 섬기고 십자가에 못박힌다. 무엇을 붙잡을 수 있는가? 아무것도. 우리의 의지조차 붙잡을 수 없다. 그것이 가난이다. 하느님께 속한 것들은 단순하다 – 우리가 복잡하다.

십자가의 모습일 때, 우리는 자유롭다. 난 아무것에도 매달리지 않는다. 우리는 수건과 물을 지니고, 형제의 발을 닦아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사회정치 문제에 대한 답이다. 나의 용서와 당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당신의 용서와 나에 대한 사랑 – 이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1월호
[원출처] <기도의 핵심으로>, 캐더린 도허티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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