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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장충성당 30주년 기념미사를 평양에서 열자

[김유철의 Heaven's door]

하느님의 선교방법

평양에 성당이 있었다. "평양 외성 산명모루(山明)의 박 진사(朴進士)의 집을 30원(당시 약1천량)에 매입한 후 1896년 임시 본당을 신설함. 1898년 5월 9일 외성에서 장대현(將台峴)으로 본당을 이전, 1900년 축성식을 거행함.(성 미카엘 성당으로 칭함) 평양 최초의 벽돌 조적조 건물로 길이 81척, 폭 24척, 종탑높이 57척의 고딕 양식. 장대현은 무인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높은 언덕으로 평양읍내가 내려다보이는 입지특성을 갖는다. 1934년 4월 평양교회에서 평양 관후리교회로 개칭되었다."(http://py.catholic.or.kr/main/ch/ch-b01.asp 참조)

평양교구 설정(1927년)이후 주교좌성당이었던 관후리성당은 1900년 축성되어 올해로 118년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북녘 땅에서 종교의 자유가 상실되고 많은 종교자산이 몰수 되었다. 그후로 거의 40년이 지난 1988년에야 평양시 선교구역에 장충성당이 건립되었다. 그곳이 올해 축성 30주년을 맞이한다. 남북은 오래도록 전쟁과 분열과 갈등의 연속이었지만 하느님의 선교는 쉼이 없었다. 사람 눈에만 보이지 않았을 뿐 하느님의 선교는 세례 이전에 어디에서나 은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장충성당. 사진출처=통일뉴스

30년-1 오묘한 시작

한반도에서 1988년은 기념비적인 해였다. 남쪽에서는 전두환의 ‘호헌’을 물리치고 6.10항쟁의 민주화 기운을 바탕으로 서울올림픽이 열렸고, 북쪽에서는 전쟁이후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종교적인 단체인 조선천주교인협회(현재 조선카톨릭교협회)가 1988년 창립되어 장충성당을 건립하였으며 그해 10월 30일 교황청 사절로 입북한 장익 신부(현 춘천교구 원로사목자, 주교)와 정의철 신부(현 로마한인신학원장)가 축성 미사를 장충성당에서 봉헌했다. 참고로 북쪽에 조선불교도연맹, 그리스도교연맹, 천도교연맹 등이 있었지만 모두 해방직후에 결성된 것으로서 한국전쟁이후 신설된 종교 단체는 없었다.

사실 북녘 땅에서 전쟁이후 성직자가 주례한 미사는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후 35년만이며, 장충성당 축성 3년 전인 1985년 9월 22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방북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의 주례로 미사가 봉헌했다. 그날은 주일로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이었다. 바로 1년 전 1984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시성된 '한국성인대축일'로서 한마디로 감격스럽고 모든 것이 오묘한 섭리였다.

30년-2 율법이냐? 은총이냐?

이후 장충성당을 방문한 많은 사제들에 의해 장충성당에서 북녘신자들과의 미사와 남북 가톨릭의 교류가 이뤄지는 가운데 ‘진짜신자론’이 제기되었다. 사람의 선교방법과 하느님의 선교방법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은 지금도 ‘뜨거운 감자’이며 한국천주교회가 넘어가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1998년 5월 평양을 방문하였던 -그 방문은 첫 번째 사목방문으로 기록된다- 최창무 주교(당시 서울대교구 민화위 담당. 현 광주대교구 원로사목자)는 북쪽 신자들이 요구한 견진성사를 거부하며 ‘진짜 신자’에 대한 의문을 제시했다.(주교회의 회보 1998년 7월 1일 PP.105-3. 제3차 민족화해 주교특별위원회 1항 참조)

놀랍게도 미사를 거부당한 일도 있다. 그것도 북쪽 당국에 의해서가 아니라 장충성당 신자들에 의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2007년 5월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일원으로 방북한 배영호 신부(당시 주교회의 사무총장)등 천주교 대표단이 장충성당에서 주일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에게 ‘영성체를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하자, 김영일 장충성당회장과 이산옥 여성회장은 이에 눈물을 흘리며 강력히 항의하고 미사가 아닌 공소예절로서 진행되었다. (<기쁨과 희망> 창간준비호. 115쪽. 2008년. 참조)

이것은 당시 정진석 추기경을 비롯한 한국교회가 지닌 북한교회관을 대변한 일종의 사건이었다. 평양의 광너울 공소, 논재 공소, 은산 공소 등이 말해주듯 평양교구 역시 1800년대 후반 평신도들에 의해 천주교가 전래되기 시작된 점을 생각하면 미사를 거부한 이 사건은 언젠가 한국교회사에 기록될 일이다.

 

김희중 대주교 등 북한을 방문하여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사진출처=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30년-3 평화의 인사와 영성체의 기쁨을 아는가?

2000년 1월 방북했던 조환길 신부(당시 대구교구 사무처장, 현 대구교구장. 대주교)은 방북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번 방북에서 무엇보다도 귀한 경험은 북한 신자들과 함께 2000년 대희년 첫 미사를 봉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주님의 은총이었다. 미사에 참례한 130여 명의 북한 신자들도 기뻐하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 사람들은 북한에 다녀온 나에게 그들이 진짜 신자 맞느냐는 질문을 한다. 엄밀히 말하면 나도 모른다. 그 자신과 하느님만 알 뿐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들도 누군가에게 세례를 받았고, 지금은 사제가 없어 미사를 드리지 못하지만 공소 예절로 주일을 지키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당에 등록되어 다닐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사람들이며,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노동당원은 될 수 없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 진짜 신자들인가?” (‘평양에서의 7박8일’, <경향잡지> 2000년 6월호, 70쪽)

가장 최근이라고 할 2015년 12월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 민족화해 주교특위 위원장 김운회 주교와 조환길 대주교, 이기헌 주교, 박현동 아빠스를 비롯한 17명이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는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남북교류가 전면 중단된 5.24조치 중이었지만 주교회의 민족화해특위가 방북을 제안하자 조선카톨릭교협회가 공식적으로 초청했고 통일부가 승인한 방북이었다. 아래는 방북 이후 주교회의 보도자료 일부다.

“셋째 날 주교들의 뜻 깊은 평양 장충성당 방문이 이루어졌다. 장충성당의 김철웅 프란치스코 회장과 신자들은 방북단을 환대하였고, 이어 주교들과 신부들은 7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남북 화해를 상징하는 성화도 선물로 전달하였다. 이 자리에서 주교들은 장충성당에서 이미 세례 받은 신자들이 지닌 신앙생활의 어려움들을 풀어주고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는 의미로 사도신경을 함께 바쳤고, 성찬례와 영성체를 거행하면서 북한 신자들을 격려하고 축복하였다. 김희중 대주교는 강론을 통하여 방북단을 환대해 준 장충성당 신자들에게 감사하며 가톨릭 신자로서 선교의 실천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구체적인 노력을 함께 기울이자고 격려하였다. 북한 신자들은 장충성당을 방문한 주교들을 비롯하여 방북단과 함께 시종 밝은 목소리로 성가를 부르고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영성체를 하는 기쁨을 가졌다.”

우리의 희망, 그리스도의 평화

올해, 2018년 10월이면 북녘 땅 유일의 평양 장충성당 30주년이다. 평신도희년을 맞은 한국평협 대표단과 교황청 사절로서 알프레드 수에레브 주한교황청 대사와 함께 한국주교회의 회원들이 30주년 기념미사를 위해 장충성당에 방문하기를 기대한다. 단순한 남북신자의 만남이나 교류를 넘어 완고하고 고집스런 ‘진짜신자론’보다 훨씬 이전에 그곳에 임하시고, 일 하시고, 기다리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 천주교회가 전할 수 있는 모든 것, 민족이 나가야 할 유일한 길 그것은 우리의 희망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누고 체험하는 일이다. 그것이 민족의 부활이다.

김유철 스테파노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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