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서] 예언자는 하느님 앞에서 선 전통적 보수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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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 예언자는 하느님 앞에서 선 전통적 보수주의자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8.04.02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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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철저한 전통주의자들-6

예언자적 직분의 핵심에는 초월적인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모든 것 위에 계시며 동시에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현존은 공간과 시간의 모든 경계를 허물기 때문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사건이나 장소란 있을 수 없다.

예언자의 의식은 그런 하느님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는데, 한 번 맛들인 마음은 다시는 빠져 나올 수 없다. 그들은 그 같은 강력한 종교적 체험을 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살던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의 예언자적 통찰력도 그 경험에서부터 우러나왔고, 그로 인해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가슴속에서 하시는 일과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싼 세상에 하는 일들의 차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Br. Steve Erspamer

하느님은 생명으로 우리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하신 일이란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신 것이었다. 그분은 그들을 사랑하셨고, 부르셨고, 그분 자신에게로 끌어 오셨다. 그 분은 이스라엘이 한 무리의 노예였을 때부터 그들을 사랑하셨다. 그분이 당신의 계명을 주시고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 분은 그들을 생명에로 부르신 것이었다. 그분은 그들이 그분에게서 달아나 다른 신을 섬길 때에도 그들을 생명에로 부르셨다.

그 분은 그들이 유배를 당하며 삶을 놓으려 할 때도 그들을 생명에로 부르셨다. 거룩한 삶으로의 부르심을 직접 체험한 예언자들은, 똑같은 양상이 그들 백성의 역사에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신뢰와 충실함으로 답하자 그들은 죽지 않았고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귀를 틀어막았을 때, 그들은 죽음을 맞았고 패했다.

사랑으로의 부르심

하느님의 생명으로의 부르심은, 동시에, 사랑으로의 부르심이기도 하다.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을 통해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 또한 그 부르심을 들었고 그것을 마음에 새겼다. 하느님의 사랑에 이끌려, 그들은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야훼를 사랑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백성을 사랑하였고,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마저 내어놓았다.

명확한 통찰력으로 그들은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산다는 것이 이방인들을 친절히 맞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핍박받는 이들에게 정의를 베푸는 것임을 알았다. 그 사랑은 종종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라고 여겨지곤 했지만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은 모든 이들에게 펼쳐진다는 것을 점점 더 명확하게 깨닫게 된었다.

예언의 단순함

예언자들의 메시지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것이 아주 단순하다는 점이다. 당신이 성서의 예언서를 처음으로 읽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이 복잡하다고 생각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 저것 그리고 다른 것들에 대한 예언들이 장마다 계속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우상숭배를 탓하고, 저 부분에 가서는 정의를 부르짖는다; 여기선 죽음과 파괴에 대해 말하면서 다른 부분에 가서는 자비와 위로를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예언서를 반복해서 읽다 보면 당신은 이 세세한 사항들을 하나의 일정한 양식으로 아우르게 하는 큰 흐름을 읽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체험하고 실천하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다분히 종교적인 체험이다. 그것은 은총을 맛보는 순간이며, 넘치는 아름다움과 믿을 수 없는 자비를 경험하는 순간인 것이다. 그 순간 우리의 과오와 죄, 스스로를 못 받아들이는 경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서와 인정, 받아들여짐이라는 선물을 받는다.

그 사랑 안에 사는 것은 은총 안에 사는 것이고 다른 이에게 너그럽고 자비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이웃의 죄와 그들이 느끼는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악한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때조차도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예언자란? 하느님에 대한 보수주의자

예언자들은 그 체험의 한복판에 서 있으며 핵심을 간파한 사람들이다. 유리한 고지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이해하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보수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아니면서 동시에 그 둘 다였다. 그들은 하느님에 관해서 만큼은 초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 분은 절대자이시며, 야훼만이 주님이시며, 오직 한 분 뿐이신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한편 인간의 제도에 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 자유주의자들이기도 했다: 정부, 종교 - 이 모두가 변할 수 있다;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

같은 맥락에서 예언자들은 극단주의자면서 전통주의자였다. 그들은 주님을 믿고 그의 민족을 사랑하는데 있어서는 극단주의적이었다. 그들을 심지어 극단적인 전통주의자들이라고까지 일컬을 수 있다. 꿰뚫는 통찰력으로 그들은 이스라엘과 하느님이 맺으신 계약의 전통, 당대의 종교 제도보다도 훨씬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그 계약에 얼마나 충실하신지를 일깨웠으며 계약을 주신 주님께 충실할 것을 촉구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다면 우리 역시 그 예언자들처럼 살아야 한다. 우리 역시 극단적인 전통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100년의 전통도 아니고 400년의 전통도 아닌 4000년의 전통을 고집하는 그런 전통주의자! 가톨릭의 역사적인 전통은 2000년간의 히브리 전통과 다시 2000년간의 그리스도교 역사에 걸쳐 이룩되었다. 

우리가 만일 지속적이고 시종일관된 그 전통 안에서 산다면 단기적이고 최근의 생긴 전통들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일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가톨릭 교회의 보편성, 모든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진정한 보편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언자 앞에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구별은 의미 없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의 예언자들에게도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구별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아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구별일 뿐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알고, 그 분에게 자신의 생명을 내어 드리고, 주님을 믿고 온 마음을 다해 그를 섬기는 보수주의자들이 있다. 반면 자신의 권력과 특권을 유지하고, 익숙한 전례를 고집하거나 그때까지의 율법주의를 고집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알고 사랑하면서 교회의 정책이나 정부 정책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자유주의자가 있다. 그러나 주님을 모르고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면서, 자신들의 목적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자유주의자들도 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수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로 생각하는 것에 상관치 않았다. 그들은 오직 주님과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전하라고 주신 말씀에만 관심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들은 케케묵은 종교를 가르치는 보수주의자들처럼 비쳤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은 현재의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유주의자들로 생각되었다.

현대의 예언자들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마틴 루터 킹은 인종주의에 반대하고 억압받는 소수의 권리를 옹호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지나치게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그러나 그는 자유라는 복음에 대해 알리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했던 것 뿐이다. 그리고 다른 예언자들처럼 그도 살해당했다.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을지 모르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 분의 극단적인 헌신은 보수주의자들의 지탄을 받았던 도로시 데이의 복음적 가난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그 뿌리를 같이 하고 있다.

반전을 외치는 예언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적 평화주의라는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극단주의자로 몰리곤 한다. 낙태를 반대하는 예언자들은 그들이 모든 인간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철저한 사랑을 선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자로 낙인 찍히곤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시도록 하자

예언자들의 과거와 현재는 제일 먼저 우리가 자기 자신과 삶에 갖고 있던 생각을 철저히 바꾸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도록 부른다. 우리는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너무 고민한다. 우리의 삶과 주변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모른 채 우리는 너무 사소한 일에 매달리며 시간을 낭비한다. 우리는 침몰하고 있는 타이타닉 호의 갑판에서 의자를 정리하며 그것이 마치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더욱 큰 모순은 우리는 그것이 하느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시도록 하자. 하느님이 하느님이 되시도록 하자. 주님이 진정 주님이 되시도록 해 드리자. 하느님이 이끄시도록 해 드리자. 그 분의 현존과 사랑을 체험하자; 그런 후 당신이 무엇을 하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의 전통을 사랑하게 되더라도 결코 놀라지 말아라. 당신이 현재의 상황을 극단적으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당황하지 말아라. 당신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일이 갑자기 중요하게 생각되더라도 놀라지 말아라. 하느님의 생각과 사랑에 빠져드는 순간 현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바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서론이 된다. 우리가 마음과 가슴을 하느님께 열어 놓기만 한다면 과거의 예언자적 양심은 현대의 예언자적인 의식이 된다. 미카 시대의 사람들은 신심이 깊은 사람이 되는 올바른 방법이 무엇인지, 어떤 예식 방법이 올바른 것인지, 좋아 보이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고 있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미가 6,8)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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