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공의 아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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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공의 아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
  • 한상봉
  • 승인 2018.03.2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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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3

프란치스코 교황이 새삼 연상시키는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은 베네치아 교구장이었던 알비노 루치아니(Albino Luciani) 추기경이었다. 그는 1978년 콘클라베의 네 번째 투표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루치아니 추기경은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요한 바오로'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유지를 계승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서 ‘미소 교황(Il Papa del Sorriso)’으로, ‘하느님의 미소(Il Sorriso di Dio)’로 불리며 사랑받았던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이어 가겠다.”는 의지를 수시로 밝혔다. 교황 선출 다음날인 8월 27일에 행한 ‘희망의 서광이 누리를 비춥니다’라는 제목의 첫 라디오 메시지에서 “본인의 프로그램은 요한 23세의 크신 마음으로 다져진 노선에 따라 바오로 6세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계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유산을 수행하는 일을 계속할 셈입니다. 공의회의 슬기로운 규범들은 마땅히 준수되어야 하며 실천되어야 하겠습니다. 거기에 대한 노력이 관대하게 일고 있지만 아직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과 의미가 왜곡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주저함이나 두려움이 쇄신의 추진력을 무산시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1세 연설집 《희망의 서광이 누리를 비춥니다》, 성바오로출판사, 1979)

이어 교황은 <교회 헌장(Lumen gentium)> 9항을 빌어 “유혹과 고통 사이를 걷고 있는 교회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힘을 얻어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도 완전한 충성을 잃지 않고 주님의 어엿한 신부(新婦)로 머물러 있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 끊임없이 자신을 쇄신함으로써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꺼질 줄 모르는 빛에 도달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은 특히 바오로 6세 교황을 “예언자다운 행동 양식과 잊을 수 없는 교황직 수행으로 위대하고 겸허한 인간의 놀라운 위치를 간직했다.”고 평가했으며, 자신은 요한 23세 교황처럼 교회 일치를 위한 일이라면 ‘교리를 이완시키는 일 없이, 그러나 주저치 않고’ 즉각적인 관심을 기울일 생각이라고 밝혔다.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교황관은 ‘종들의 종’이 쓰기에 너무 무겁다"

1936년 사제 시절의 루치아니

알비노 루치아니 추기경은 1912년 10월 17일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 주의 벨루노에 있는 포르노디카날레(지금의 카날레다고르도)에서 태어났는데, 벽돌공 조반니 루치아니의 아들이었다. 그처럼 가난한 소작농 출신이었던 요한 23세 교황이 벨루노의 신학 교수였던 그를 주교로 승품했는데, 그가 선택한 사목 표어는 ‘겸손(Humilitas)’이었다. 주교가 된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모든 회기에 참석했다. 1969년에 바오로 6세 교황은 루치아니를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지명했으며, 1973년에는 산 마르코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1978년 8월 26일, 루치아니 추기경은 6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은 대관식에 앞서 몇 가지 중요한 인간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연설을 담은 공식 문서를 통해, 교황 스스로 ‘짐(朕)’이라고 부르던 관례를 깨고 ‘나’라고 지칭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봉건 시대의 유물인 권위적인 호칭을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교황 전용 가마인 ‘세디아 게스타토리아(Sedia gestatoria)’의 사용을 거절했지만, 신자들이 교황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관료들의 권유로 가마를 타고 행진한 후 걸어서 교황좌로 올라갔다.

교황은 6시간 동안 화려하고 장엄하게 베풀어지는 교황 대관식마저 거부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교황은 대관식을 간단한 양식의 ‘교황 즉위 미사’로 바꾸었다. 그리고 교황 대관식 때 머리에 쓰던 삼층관(Papal Tiara, 교황관)도 ‘종들의 종’인 교황이 쓰기에 너무 무겁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보다는 어머니이시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은 “하느님은 어머니이시면서 아버지이시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보다는 어머니이시다.”라고 발언했는데, 이는 교회법처럼 엄격한 아버지[군주]의 모습보다는 백성을 돌보는 어머니처럼 ‘착한 목자’가 되기로 작심했던 요한 23세 교황의 성정을 닮았기 때문이다.

1979년에 출간된 교황의 연설집 《희망의 서광이 누리를 비춥니다》에는 착좌 후 선종하기까지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쓴 19편의 연설문이 실려 있는데, 그동안 교황들이 사용해 오던 외교 문서 같은 투의 글은 없다. 이러한 친밀한 말투도 프란치스코 교황과 비슷하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은 예화를 들며 다정하게 무르팍 앞에 놓인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말을 건넨다. 9월 3일 발표한 삼종기도 담화는 “강도도 제 나름대로 신심이 있다.”는 말을 인용하며 “교황인 나도 조금은 신심이 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운을 떼고 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이 남긴 <사목규범>을 인용하며 말을 이어 간다.

“나는 여태까지 착한 목자란 이런 사람이라고 묘사했지만 나 자신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사람이 도달해야 할 완덕의 피안을 보여 주었지만, 나 자신은 아직도 결점과 과오의 파도에 까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가 빠져 죽지 않게 기도로 구원의 판자 조각을 제게 던져 주십시오.”

교회는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한편 자신은 베드로의 교황좌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9월 20일 일반 알현 때에는 “교회는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이 나왔을 때 저는 감동했고 열성이 솟구쳤습니다. 자유, 정의, 평화, 발전 등 중대 문제의 해결을 촉진하고 대안을 제기하는 데는 교회 교도권이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하다고 봅니다.”

교황의 급작스런 죽음

이런 교황이 착좌 33일 만인 1978년 9월 28일 밤, 어느 청년의 살인 사건을 듣고 어두운 세태를 탄식하며 침소에 들었다가 이승을 빠져나갔다. 당시 바티칸 당국은 65세의 교황이 심근경색에 의한 심장 발작으로 갑작스럽게 선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발표했다. 교황의 죽음에 대한 억측이 난무하며, 당시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교황이 마피아의 돈세탁 경로로 이용되던 바티칸은행에 대한 내사를 지시한 가운데 교황청 내 마피아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추정 보도를 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이 갑자기 선종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계승하려던 행진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주춤거렸던 발걸음은 긴 역사에서 볼 때 ‘일시 정지’에 지나지 않는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1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을 맞으면서 ‘신앙의 해’를 선포했다. 교황이 말한 신앙의 해는 ‘신앙 쇄신’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며, 세계교회는 믿음의 내용인 ‘신조’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과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한국 교회는 특별히 그때 사회교리 주간을 선포하며 ‘사회교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라는 <사목헌장> 1항의 내용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가톨릭교회는 이처럼 ‘희망의 서광이 누리를 비추는’ 상황이지만, 교회 내부의 사정은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문제와 바티칸은행의 비리와 교황청 내부의 권력 투쟁 등으로 ‘결정적이며 근본적인’ 쇄신을 요청받고 있다. 이때에 교황이 된 이가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이 교황이 라틴아메리카 출신인지 이탈리아인지 따지는 것은 무익하다. 다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시작된 변화의 바람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통해 업데이트된 버전으로 다시 실행되기를 바랄 뿐이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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