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골방으로 들어가 하느님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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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골방으로 들어가 하느님 만나기
  • 캐더린 도허티
  • 승인 2018.03.19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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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핵심으로-10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기를."(에페 3,16.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바오로 사도는 주장한다. 기도는 우리 삶의 원천이며 동시에 가장 친밀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비밀로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라.” 이 말씀은 우리 자아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 지성소를 만들라는 뜻이다. 비밀의 장소는 사람의 마음이다. 기도의 삶, 그 집중성, 그 깊이, 그 리듬은 우리의 영적 건강을 보여주는 척도가 되고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준다.

고행자들에게 “광야”는 내적인 것이고 고요해진 영의 집중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이러한 경지에서, 인간은 어떻게 침묵하는가를 알게 되고, 진정한 기도를 발견한다. 이 시점에서 인간은 신비스러운 방문을 받게 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사진출처=pixabay.com

우리가 고요하고 침묵 중에 있으면, 그분은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방문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몸소 오시고, 성경은 마치도 호두 까는 연장으로 깨는 것처럼, 성령이라는 호두 까는 연장에 의하여 열리고 우리의 이해가 넓혀진다. 말씀의 의미가 풀려나서, 우리는 기쁨과 지식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다. 그리하여 몸소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이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만일 우리가 삶에 어떻게 성찰과 침묵의 자리를 마련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거나 공공의 장소에서 기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갈증을 채워주는 물은 올바른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필요불가결한 물러섬을 제공하는 침묵 속에서 그 불순물이 여과된다.

성찰은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 나라에 열리도록 해 주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릴 수 있게 한다 … 세라핌 성인은 말한다, “내적인 평화를 얻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 가까이에서 구원을 발견할 것이다….”

오로지 외로움을 증폭시키기만 하는 이 말의 홍수 시대에, 기도하는 평화의 사람만이 아직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할 수 있고, 말씀이 얼굴이 되고 바라봄이 현존이 되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그 사람의 침묵은 어떤 설교도 다다를 수 없는 것을 말할 것이다. 그 사람의 신비는 이제 사람들에게 가까이 와 있고 볼 수 있는 계시에 그들이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 것이다. 침묵을 아는 사람이 말할 때 그는 모든 말씀의 오염되지 않은 신선함을 쉽게 발견한다. 삶과 죽음의 질문들에 대한 그의 대답은 영원한 그의 기도에 "아멘" 하는 것으로 온다….

기도 상태의 정수는 또 다른 존재,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지만,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나는 사람의 목소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목소리는 모든 인간의 목소리 안에서 우리에게 오고 있다. 그분의 얼굴은 여러 모습이다. 그 모습은 엠마오로 가는 나그네의 모습, 마리아 막달레나의 정원지기, 우리 이웃집 사람의 모습일 수 있다.

하느님이 육화한 것은 우리들이 모든 사람의 얼굴을 통하여 그분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기 위해서다. 완전한 기도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추구하고 모든 인간 존재 안에서 그 현존을 알아본다. 그리스도의 고유한 이미지는 성상이지만, 셀 수 없이 많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얼굴이 또한 그리스도의 성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에 충만한 태도는 그분의 모습을 발견한다.

기도는 그처럼 단순한 것이다. 기도는 자체의 리듬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과 접촉하고, 그리고 나서 우리 자신과 접촉한다.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기도에는 불가해한 리듬 같은 것이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머리로 절을 하며 선다. 손은 모아 인사하는 자세,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다. 만일 성부, 성자, 성령으로 그 안에 머무는 하느님을 만나려면 모든 인간이 해야 하는 내적인 여정을 우리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몸의 윗부분으로 절하고 나서 우리는 다시 일어선다. 팔을 뻗치면, 십자가 형상이 된다. 우리의 손가락 끝은 이제 사람들을 만진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만지고 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리듬을 타는 기도는 우리의 몸을 사용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하루 종일, 내적인 여정에서 우리 온 존재를 다하여 기도하고 더 깊숙이 우리 존재의 침묵과 고독 속으로 침잠한다. 하느님과 그리고 동료 인간과의 만남은 더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고 우리의 관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과의 접촉은 불가피하게 인간과의 접촉으로 이어져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기도는 인간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케노시스(자기비움)가 일어난다. 케노시스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자라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비운다는 그리스말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우리 마음의 차원들이 끊임없이 증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육화했기 때문에, 우리 역시 마음속에 인간을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단식하고 기도하는 것을 포함하여 수많은 방식으로 인간을 섬길 수 있다.

단식하고 기도하는 것은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단식과 기도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 우리들은 자기중심성과 탐욕을 비우는 길들과 방법들을 찾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이 우리 자신을 채우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여,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동료 인간들을 섬기기를 바란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1월호
[원출처] <기도의 핵심으로>, 캐더린 도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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