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교회는 자선단체 NGO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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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교회는 자선단체 NGO가 아니다"
  • 한상봉
  • 승인 2018.03.1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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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2

“지금 주교와 신자들 모두 새 여정을 막 시작했습니다. 이 여정은 세상의 모든 교회를 사랑 안에서 이끄는 로마 교회의 여정입니다. 우리 사이의 형제애와 사랑, 그리고 신뢰의 여정입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위대한 형제애의 정신이 있는 이 세상을 위해 기도합시다.”

2013년 3월 13일 성 베드로 광장으로 열린 발코니에서 새 교황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로마의 주교’라고 소개하며, “이 주교가 여러분에게 축복하기 전에 주님께서 저에게 강복해 주시도록 여러분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이 겸손한 교황이 고개를 숙이자 광장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교황 이름으로 선택한 첫 번째 교황이며,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탄생한 첫 번째 교황이며, 예수회에서 탄생한 첫 번째 교황이며, 731년 이래 비유럽인으로 선출된 첫 번째 교황이었다. 라틴아메리카는 유럽의 식민지로 지난 500년간 슬픔의 땅이었다. 그 땅에서 ‘가련한 자들의 보호자’로 ‘복음의 기쁨’을 선물한 교황이 탄생했다.

 

베네딕토 16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황

"좋은 저녁입니다"

새 교황으로 선출된 사람은 마리오 호르헤 베르골료(Jorge Mario Bergoglio) 추기경으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이었다. 그는 ‘눈물의 방’에서 추기경의 진홍색 옷을 벗고 흰색 교황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추기경단의 순명서약을 먼저 받았다. 그러나 예전교황처럼 순명서약을 앉아서 받지 않고, 성당 바닥으로 내려와 추기경과 나란히 서서 서약을 받으며 한 사람씩 안아 주었다. 그 뒤에 발코니에 나가 군중들에게 “좋은 저녁”이라고 첫 인사를 나누었다. 교황은 만찬이 준비된 숙소인 성녀 마르타의 집으로 갈 때에도 다른 추기경들과 마찬가지로 미니버스에 동승했다.

다음 날 아침 교황은 바티칸 경찰이 제공한 메르세데스가 아닌 폭스바겐을 타고 교통 혼잡을 뚫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마리아 대성당에 찾아갔다. 이 대성당에는 예수회 창립자인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첫 미사를 봉헌한 제대가 있었고, 로마의 수호자인 성모 마리아의 성화가 걸려 있다. 교황은 이 성화가 걸린 보르게세 경당에 꽃다발을 봉헌하고 기도했다. 이날 16세기 후반에 가톨릭교회를 개혁하는 데 열성이었던 비오 5세 교황의 무덤에서도 간단히 기도했다. 바티칸으로 돌아오는 길에 카사 델클레로 호텔에 들러 가방을 직접 챙기고, 호텔 프런트에서 호텔비를 신용카드로 지불했다. 이 호텔은 콘클라베가 시작되기 전에 2주 동안 교황이 머물던 곳이다.

이날 오후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스틴 성당에서 추기경 선거인단과 함께 교회를 위한 미사를 봉헌했다. 이날 교황으로서 행한 첫 강론에서 교황은 “야곱의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으로 걸어가자.”(이사야 2,5)는 구절을 들어 “자신의 현존 안에서 거닐며 결백하게 살아가라.”며, 우리의 삶은 ‘여정’이며, 늘 움직여야 한다고 전했다. 또한 “교회를 세우자.”고 권했다.

사실상 교황이 선택한 ‘프란치스코’ 성인은 무너진 산 다미아노 성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형제들을 모으고, 세상의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언하지 않는다면, 자선을 베푸는 NGO가 될 수는 있지만, 주님과 연결된 교회가 될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덧붙여 교황은 이 모든 일에서 ‘십자가’로 상징되는 고난을 감당할 용의가 있는지 물었다.

“우리가 십자가 없이 여정을 계속하고, 십자가 없이 교회를 세우고,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다면, 세속적으로 우리는 주교요, 사제요, 추기경이요, 그리고 교황일 수는 있지만, 주님의 진정한 제자는 될 수 없습니다.”

2005년,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첫 강론을 위해 전날 밤 라틴어로 손수 쓴 원고를 의자에 앉아서 보며 강론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강론대로 걸어 나와 즉흥적으로 강론을 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이전 교황이 신학적으로 엄밀한 분이었다면, 새 교황은 요한 23세 교황처럼 친밀하고 사목적인 프란치스코 교황이었다.

교황즉위미사 "진정한 권위는 섬김 그 자체"

바티칸은 이 교황을 위한 ‘즉위 미사’를 성 요셉 대축일인 3월 19일 화요일로 결정했다. 이날 20만 명 이상의 군중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오픈카를 타고 손을 흔드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향해 환호성을 터뜨렸다. 교황은 어린이들에게 축복하고, 차를 세워 장애인들을 끌어안았다. 즉위 미사 직전에 권위의 상징인 팔리움을 받아 어깨에 걸치고, 성 베드로가 쥐고 있던 열쇠 이미지를 새긴 어부의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추기경 대표 6명에게서 순명서약을 받았다.

이날 교황 즉위 미사 강론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떻게 요셉은 마리아, 예수, 그리고 교회의 수호자로서 그의 소명에 응답했는지” 성찰하며 “요셉 성인은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하느님 현존의 징표에 개방되어 있고,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 계획을 존중함으로써 응답했다.”고 전했다. 여기서 ‘수호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을 책임 있게 보호한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인간이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마다, 또한 그 창조물과 우리 형제자매들을 보살피는 데 실패할 때마다 파괴는 자행되고, 마음은 닫히게 됩니다. 비참하게도 역사의 모든 시대마다 살인을 음모하고, 파괴를 자행하고, 그리고 사람들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헤로데들’이 있었습니다. 감히 나는 경제, 정치, 사회생활의 책임자들과 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청하고자 합니다. 창조물이나 자연에 새겨진 하느님의 계획, 그리고 환경의 ‘수호자’가 됩시다. 이 세상의 발전을 유지하기 위해 파괴와 죽음이 예상되는 그 어떤 조짐도 허락하지 맙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진정한 권위는 섬김 그 자체”라면서 “교황이 지닌 권력도 십자가 위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섬김를 위해 더욱 더 충실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황은 성 요셉이 보여 준 섬김의 자세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면서 “저도 요셉 성인처럼 팔을 벌려 하느님의 모든 백성을 보호하고, 모든 인류를, 특히 가정 가난하고, 가장 힘없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부드러운 사랑으로 끌어안으려 합니다.”라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여 준 모습은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지하 묘지 카타콤 벽에 그렸던 턱수염 없는 젊은 양치기 모습의 예수를 닮았다. 이처럼 친밀한 모습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종교로 받아들였던 4세기 이후 턱수염을 기르고 준엄한 표정을 지으며 복종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던 예수의 ‘군주적’ 초상화와는 무척 다른 모습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회는 ‘권력 구조 이전에 하느님 백성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수는 세속적인 권력과 부를 거부한 민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거듭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군주의 모습으로 덧칠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불리던 교황의 모습 역시 황제의 모습과 겹쳐서 나타났다. 덧붙여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궁정 주교였던 에우세비우스는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로고스, 하나의 황제, 하나의 제국”을 표방하며 “하느님이 한 분이듯이, 하나의 제국 안에서 황제 역시 하나”라고 전했다.

이 문법이 그대로 교회 안에 유입되어 결국 하느님이 한 분이듯이, 제국 안에서 교황 역시 하나인 신권(神權)을 지닌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그래서 교황직은 언제나 통치권으로 해석되었고, 마찬가지로 주교직 역시 교구 안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자리로 인식되었다. 이후 교회 안의 직무는 권력의 자리가 되었고 1962년에 개막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와서야 비로소 “교회 직무는 권력이 아니라 봉사”임을 분명히 천명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는 요한 23세 교황이 시작하고 바오로 6세 교황이 계승한 것인데, 교리논쟁을 다루지 않고, 교회의 현대화를 꾀한 개혁적 공의회였다. 공의회는 “나그네 길에 있는 교회는 교회 자체로서나, 인간적이며 현세적인 제도로서나, 언제나 필요한 이 혁신을 계속하도록 그리스도께 부르심을 받고 있다”고 했다.

또한 교회는 “역사의 저편에 있는 게 아니라, 역사 안에 자리 잡은 ‘지상의 교회’”라고 말함으로써 시대의 징표를 읽고 예언직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교계제도를 강조하던 이전 교회에서 벗어나 교회를 평신도, 수도자, 사제, 주교, 교황을 포함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규정하면서 교회의 ‘봉건성’을 탈피하려고 시도했다.

이처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를 ‘권력 구조이기 전에 하느님 백성’이라고 선포하면서 교회 전통 안에서 생소한 ‘교회의 민주화’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교회의 수직적 차원보다 수평적 차원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단두대 위에 오른 것처럼 위태로워진 것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등장 이후였다. 그 많은 덕성에도 불구하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황 중심주의를 강화하고, 세속화에 대한 염려 때문에 교회 안에 퍼지기 시작한 자유주의적 성향을 단속했다.

교황의 숱한 해외 순방 과정에서 평신도 대중은 교황을 열렬히 사랑했지만, 교황은 대중의 복음을 이해하는 신앙 감각을 ‘사실상’ 믿지 않았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베네딕토 16세 교황으로 이어진 가톨릭교회는 정의평화운동과 환경운동 등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진보를 이루었지만, 요한 23세 교황이 가까스로 열어 놓은 교회의 창문을 도로 닫고 교회 쇄신 노력에 빗장을 걸었다.

그 후 ‘사회적으로는 진보이지만 종교적으로는 보수’라는 어색한 교회 분위기가 지난 30년 동안 이어져 왔다. 한국 교회 역시 그 영향이 커서, 사회문제에 과감하게 예언자적 발언을 하는 진보적인 사제들도 교회의 권위주의와 비리에 대해서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현재 자기분열증을 앓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청을 비롯한 교회 개혁을 ‘복음화’ 과정에서 이루겠다고 공언하고, 스스로 겸손한 자리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몸으로 재확인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오로 6세 교황이 자신의 영대를 걸어 주었던 사람, 교황좌에 오른 지 33일 만에 안타깝게 선종했던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재위: 1978년 8월 26일∼1978년 9월 28일)을 ‘사실상’ 계승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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